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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33년간 친구가 잠도 안오고 해서 술한잔 하자고 해서 동네 퓨전포차에서 소맥으로 술 몇 잔 했습니다.

이 친구 말이 이번 일욜날(6일) 자기 차로 어머니와 동생을 교회에 모셔드리고 슬쩍 빠져나와서 집으로 다시 갔다는데 그래서 내야 될 헌금 안내고 술값으로 대신한다고 하더군요...

이것만 읽어보면 교인이 보기엔 참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친구만큼 하느님을 섬기고 믿는 사람을 곁에서 본 적이 없다는 점이 위선적인 교인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집안에서 부모님부터가 장로요, 누구보다 더 독실한 교인이시고 아주 착하시고 성실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교인이라고 하면서, 장로라고 하면서 더러운 인간들도 많은데-이고 이 친구도 그에 영향을 받아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섬기면서 성실-양심-거짓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이 친구가 지금은 교회를 불신하고 있는 저를 교회 다니라고 전도하면 바로 교회 다니고 싶어지는, 인간적으로 믿음직한 사람이 교회 나왔다 슬쩍 빠지고 안낸 헌금으로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진실된 얘기 오고갔다고 해도 교회에 헌금을 하면서도 위선적인, 이중적으로 말과 행동이 틀린 사람보다는 백배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은 어느 교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이 30대라고 집사라고 불리우면서 일욜날 교회 나갈 때마다 봉사를 해야한다는 점이 못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욜날 교회 가서 슬쩍 빠져나왔다고 하는데, 교회봉사도 어느정도껏이지 일욜날 교회 갈 때마다 집사로서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교회를 매주 한번씩 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 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것이니까요...이건 독실하고 안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느끼는 감정일테죠. 직장생활 하느라 피곤한데 일욜날 교회갈 때마다 봉사를 해야한다니...하느님을 더많이 섬기고 따르려고 교회를 가는 것인데 이쯤 되면 교회 가는 것 자체가 부담백배일겁니다.

차라리 안낸 헌금으로 오늘 새벽의 경우처럼 진실한 벗과 술 한잔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야기와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삶이야기, 사람간의 교류 등을 하는 게 마음에도 없는 교회봉사 하려고 교회 다니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33년 친구는 그런 진실하고 양심적이고 거짓말 없는 참된 사람이니까요. 이런 사람과 얘기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까요.

소맥 넘어간 김에 횡수 한번 해봤습니다. 글이 이해못할 못된 글이라고 생각되시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술 마신 김에 주저리한 것이니까요.^^

추부길, 뜨끔한 한방 먹었넹...ㅋㅋ

2008.01.07 01:04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지금 한반도대운하를 대상으로 방송하는 KBS생방송심야토론을 보고 있습니다.

초반 한동안 경제효과를 두고 찬반이 옥신각신하다가 추부길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 정책기획팀장(한나라당 한반도대운하 특위 부위원장)이 반대측으로부터 한방 먹었습니다.

반대측인 홍종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가 운하 개통후 50년간을 기준으로 한 자체 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0조원 이상의 적자가 난다는 자료를 제시하자 추부길 팀장이 KDI 등의 연구기관의 의견을 내세워 30년간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러자 홍교수가 "50년간 운하수익은 줄어드느냐 늘어나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추팀장이 "줄어든다"고 하자 홍교수가 "초기비용은 많이 들어가지만 30년이든 50년이든 수익은 계속 늘어가야 하는 게 경제원리인데 왜 줄어드냐"고 되묻더군요.

그러자 추팀장이 "유지보수비용이 많이 들어가니까 줄어든다"고 하니까 홍교수가 "그럼 유지보수비용이 계속 들어간다는 것은 인정하시는 것이네요"라고 하니 추팀장이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한방 먹었습니다..ㅋㅋ...

물론 이에 대해 추팀장이 반박을 해야 할 차례였지만 사회자가 다른 질문으로 넘겨버려서 마치 추팀장이 말도 못하고 한방 먹은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암튼 홍교수님의 대운하에 대한 "경제적 효과는 적자"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이더군요...

추부길 팀장님, 5년간 땅 열심히 파세요. 5년후엔 그냥 물러나지 말고 판 땅 다시 메꾸고 물러나세요!!
홍교수님, 대운하 반대하는 국민들 많습니다. 땅파는 대한민국 절대 없게 강력하게 반대논리 개발해주시구요...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대한민국강산 물려주도록 수고해주세요!! 국민들이 뒤에서 응원드립니다.^^

PS.
1. 위 내용만 올리려고 저장을 누르려다가 추부길팀장이 웃긴 얘기를 해서 한마디 더 덧붙입니다.
추팀장이 "대운하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전문가, 국민들이 이명박이니까 반대한다, 한나라당이니까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네요. 사회자가 이에 대해 "정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걸로 생각하냐"고 하니 추팀장은 "그렇다"고 대답하는군요.. 에라이...또라이 정치꾼같은 말을 하는구나..니가 더 정치적인거 아니냐?.....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게 반대논리를 무력화시켜보려는 아주 야비한 정치꾼발언이란 걸 모르느냐 추팀장!!!....이런 방식으로 남을 반박하려는 행태, 찬성논리가 빈약했을 때 써먹는 딴나라당의 못된 대응방식이 저는 싫습니다. 이명박이 청계천 하나 만들었다고, 남들 다 반대하는 청계천 2년만에 잘 만들었지 않느냐며 대운하도 이명박이면 만들 수 있다고 무진장 많이 잘도 써먹네요..어찌 청계천을 대운하와 비교하며 자화자찬하면서 잘된다고 확신을 하는 것이뇨?...실패해도 정권 물러나면 책임 안지니까 확신하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 대한민국 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확신하는 것이냐? 스스로 자문자답하여라. 난 정치적으로 대운하를 반대하는 게 아니란다 추팀장...만약 노무현 지지자인 나도 노무현이 대운하를 한다면 반대한다. 이게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냐?...추팀장, 그럼 난 정치인?...에라이...  

2. 대운하 찬성측인 정동양 한국교원대학교 기술교육과 교수"국민들은 조용히 지켜봐달라"고 말하는구나.. 국민들은 찍소리 말고 조용히 하고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이냐?..교수의 탈을 쓰고 에잇 못된.....

티스토리에서 좋은 기능이 많이 있지만 특히 나는 팀블로그기능이 좋다고 생각한다.

블로그를 혼자서 운영하기에 벅차거나 전문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카페처럼 모여서 글 올리고 대문(첫 페이지)이 있으면 관리자는 팀원이 올린 글을 거기에 배치시켜주고 서로 글 올려주고 꾸며주고 하는 공동작업이 가능하기에 좋은 기능이라고 본다.

팀블로그 만들기 전에 필자로 가입한 사람이 어떤 경로로 가서 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지 보기 위해 시험삼아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초대장으로 내 또다른 메일에 초대후 팀블로그 필자로 가입메일을 보내 가입해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필자로 가입된 사람은 가입하기를 누르면 내 블로그의 관리자메뉴로 오게 된다. 그러나 필자의 관리자메뉴에는 센터와 글과 환경설정만 보이고 글은 글쓰기와 글목록만 보여서 글만 써서 올릴 수 있다. 환경설정은 팀블로그항목만 나와 자신의 팀블로그 탈퇴를 스스로 할 수 있다. 주인이 필자를 탈퇴시킬 수도 있다. 필자 스스로 탈퇴시 그동안 자신이 올린 글을 삭제한 후 탈퇴하면 좋지만 탈퇴후엔 자기가 올린 글이라도 삭제할 수 없으니 유의바란다.

그런데 팀블로그 운영시 한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팀블로그에 있는 모든 글은 필자가 삭제를 못하는데 유독 남이 올린 댓글과 방명록, 트랙백은 필자라도 삭제/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팀블로그에서 블로그 주인은 필자와 달리 모든 글의 삭제와 수정이 가능하지만 필자에게까지 댓글과 방명록, 트랙백을 고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분명 잘못됐다. 일반적으로 댓글과 방명록, 트랙백은 올린 해당 내용만 자신이 수정/삭제가 가능하지만 팀블로그 운영시 필자에게까지 남의 댓글과 방명록, 트랙백을 수정/삭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상식적이지 못하다.

팀블로그에서의 필자란 초기엔 다루는 정보가 같고 마음이 맞아 관리자와 같이 하는, 그러나 아직은 글만 올릴 수 있는 '유연한' 동지일 뿐인데 해당 블로그 주인의 재산이랄 수 있는 남의 댓글과 방명록과 트랙백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있게 해놓았을 때 맘만 먹으면 또는 실수라도 몽땅 다 없애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티스토리에서는 이 점을 고려해서 팀블로그의 필자가 블로그의 주인재산인 (남이 올린)댓글과 방명록, 트랙백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없겠금 해주길 바란다.  
    

각 신문의 2008 신춘문예 당선작

2008.01.02 02:19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08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오리떼의 겨울 - 이지현
(0) 입력 : 07.12.30 20:18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떼가 함께 날아 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심사평-시]시문학의 양산, 빈곤한 시대의 역설
(0) 입력 : 07.12.30 17:45


위-정양(시인, 우석대 명예교수), 아래-이동희(시인) 시대는 참으로 수상하다. 사람됨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물질의 위력과 현실 의제에 밀려나는 형국이니 어찌 수상타 하지 않으리오. 사람됨의 최소한의 덕목들이 정신의 가치로 승화되지 못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정신·문화적 가치가 황폐한 시대일수록 이를 안타까워하고 이를 정신력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욕구는 더 뜨거워지는 것인가?

올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품 수가 모두 1351편에 이르렀다. 양적인 수확에서 기록적이며, 각 작품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정신의 치열성에서도 기대에 값하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0여분의 응모자들이 투고한 30여 편이었다. 이희정의 ‘기억의 성지’는 시적 완결성에서는 일정한 구성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흡하다는 데서, 원창훈의 ‘FTA’는 현실을 조응해 내고 이를 시적 어법으로 형상화하는 시력은 확인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시적 긴장도가 처진다는 데서, 이혜숙의 ‘빌딩’은 소재가 주는 비인간성의 측면을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으나 시정신의 참신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데서 심사자들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지현의 ‘오리떼의 겨울’은 일단 정통적인 시수업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는 데서 안정감을 주었다.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해 구축해 내는 이미지들이 여타 응모작들에 비해서 참신하였으며, 소재를 응시하는 서정으로 시의 의미 맥락을 담아내는 솜씨를 인정하면서 최종 당선작으로 삼았다.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나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등의 아름다운 의미나 참신한 표현은 시 수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시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사족 하나. 응모자들이 서너 편의 응모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올린 시보다 그 다음 장의 시들에 호감이 가는 시가 많았다. 야구선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홈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시도 그럴 것이다.


[당선소감-시]"열심히 새로운 짐을 꾸려야죠"
(0) 입력 : 07.12.30 17:39

 막상 짐을 꾸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옮길 것들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면서 하루 해를 다 보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보자기는 펼쳤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 했죠. 당선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앞서 그 짐꾸리던 일들이 퍼뜩 떠오릅니다.

이제 또 짐을 꾸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무거워서 그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새로운 짐을 꾸리는 일은 기쁨에 앞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겠죠. 묵은 먼지도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묻혀보고 구석에 숨어 있는 동전들도 하나씩 챙기면서 열심히 저만의 짐을 꾸리겠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 이용범 선생님, 누구보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부모님께 이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약력

1987년 전북 부안 출생

현재 우석대 문창과 재학중


['08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수필]항아리 - 방민실
(0) 입력 : 07.12.30 17:39

 웅덩이 안을 들여다보니 나뭇가지 끝을 담고 활동사진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여주고 있다. 열 서너 살까지 그랬듯이 그 안에 발을 담그고 실컷 꾸정거리다 물을 가라앉혀 웃물에 물수제비뜨듯 발에 묻은 모래알을 씻어내고 싶다. 그냥 스쳐가기가 망설여진다. 들여다볼수록 우묵하니 폭 파인 모양이 항아리 속 같다.

그즈음 우리 집에는 하릴없이 입을 벌리고 빗물이나 받아마시던 큰 독이 있었다. 웅덩이 같은 독이었다. 주둥이에 금이 간 그 큰 항아리를 자주 들여다보았었다. 항아리를 들여다 볼 때도 내 배경으로 구름이 흘렀었다.

나를 보다가 내 배경을 바라보다가 그도 시시해지면 손으로 휘휘저어 항아리 안이 소용돌이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더 이상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배경이고 뭐고 얼굴까지 일그러져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니 항아리속이 우렁잇속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뱅뱅 돌아가다 급작스레 항아리 밑이 열리며 딴 세상으로 연결된 통로가 나타날 것도 같았다. 물길을 따라 눈을 굴리다 아차 싶은 생각에 고개를 추켜세울 때면 반쯤 쓸려 들어가다 빠져나온 듯 머리가 더없이 무거웠다.

자연과 어우러져 자연이 깃든 순박하고 수더분한 장독대 옹기는 보는 마음에 여유를 준다. 그러나 항아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속에서 폭 곰삭든지 익어가든지 분주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듯 은밀한 울렁임이 충만하다. 사람 속도 항아리와 같아서 편안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한가지씩은 속에 담고 있는 크고 작은 고민이 있는 듯하다.

요즘 본의 아니게 내 안에 많은 비밀을 담아두게 되었다. 우연히도 만나는 이마다 비밀이라며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속내를 털어놓고는 마지막으로 뚜껑을 덮듯이 비밀이라고 말하는 통에 나는 얼떨결에 항아리가 되어 꾹꾹 눌러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하여도 그랬다. 햇빛 좋은 1층 카페에 앉은 나는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셨지만 다른 자리로 옮겨 앉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넓은 창을 등지고 앉아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창 밖 도로에서는 그녀의 머릿속의 엉킨 실타래처럼 교통수단들이 그녀의 꼭뒤를 중심으로 양 갈래로 더 없이 복잡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에 들락거리는 듯한 그 모습에서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녀와 누군가의 사이에 연결된 소통의 길이,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져 흐물떡거리는 그 그림의 길처럼 어지럽게 엉켜 그녀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듯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햇빛에 눈부신 일쯤은 참을만하였고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당부할 때까지 눈을 끔벅일 뿐이었다.

웅덩이를 만나는 일이 산책할 때만은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감정을 나누다 좋았던 감정은 오해와 실수로 웅덩이처럼 고여 앙금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런 일에 부딪히면 나는 웅덩이가 된 상처를 감추기 위해 슬슬 위장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갔었다. 무작정 덮어놓아 빛에 말라버릴 시간도 없이 곪아 터지도록 상처를 키우곤 하였다.

그녀 역시 웅덩이를 하나 품고 있는 듯 수심이 언뜻언뜻 보였다. 두고두고 웅덩이가 되었을 상처지만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 살갗에 앉은 딱지처럼 말라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성급히 떼어버리면 아직 깨끗이 아물지 못한 핏빛 새살이 아려올 것이다. 웅덩이가 차츰 말라서 비었다가 원래의 흙길로 돌아가듯 아물어갈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녀는 베보자기를 덮듯 살포시 내 손을 잡더니 밀봉하듯 비밀이라 말했다. 그렇다고 자리를 옮겨 앉은 말이 새어나갈까 염려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단지 옮겨 퍼 담아 둘 곳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바닥에 깔린 눅눅한 심기를 걷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무거운 이야기와 함께 덩달아 앓기도 했으나 곧 일부러 심드렁하니 마음을 비워 버릇하였다. 무거운 이야기는 바다 밑바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어 사는 한 마리 쑤기미처럼 항아리 밑에 가라앉아 항아리 주인인 나도 잊어먹고는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은 비슷비슷한 문제를 끌어안고 산다는 것을 절감하기에 내 고민도 한 마리 쑤기미처럼 가라앉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항아리 중에 뱃심 두둑한 전라도 항아리가 눈에 익다. 옛적에 우리 집에서 빗물을 받아마시던 항아리와 비슷하다. 언제 보아도 듬직하고 안정적으로 자릴 잡고 있으니 닮아봄직 하다는 생각이지만 남의 이야기까지 담아둔 내 항아리는 비온 뒤 논물 넘치듯 넘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찰랑찰랑 넘치려 간지럽게 목줄에 올라서는 이야기를 간신히 눌러 놓곤 한다. 몇 번은 주둥이에 금이 간 깨진 항아리 꼴이었다. 항아리는 깨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눈치 없는 누군가는 여전히 내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디를 가더라도 질그릇은 내 눈을 사로잡는다. 더욱이 웅덩이처럼 움푹한 항아리가 날 잡아끈다. 항아리에 홀딱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넘치기 전에 내 속의 이야기를 부어놓기 위함인지 모른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덜어내고 싶다. 내 이야기도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다. 큰 항아리라면 듬직하여 좋겠지 싶다. 그 안에 빗물을 반쯤 받아놓고 들여다보면 내 멍울도 풀어져 푸른 하늘빛이 내 배경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가 항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심사평-수필]문학 장르로서의 수필 그리고 항아리
(0) 입력 : 07.12.30 19:52


위-공숙자(수필가), 아래-오하근(문학평론가, 원광대 명예교수) 새삼스러워 구태여 말하기도 뭣하지만, 수필은 자판 두들겨지는 대로 두들겨 그렇고 그런 내력이나 생각의 내용을 담아내는 문학 장르로 인식하고, 아무나 기웃거리고 껄떡대는 떡판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모두 수필가이다. 이는 이왕의 대가나 중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겠는데도 그들도 한통속으로 그 수많은 문학지와 수필지를 통해서 그 수많은 수필가를 생산하고 있다. 거기에 기왕의 시인 작가들까지 덩달아서 수필집 한 권쯤은 우리들의 코끝에 들이대니 수필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점에서 신문의 신춘문예를 거친 수필가는 제법 점잔을 빼도 될 성싶다.

이번 수필 부문에는 총 428편이 응모되어 그 중에서 10명의 30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결심에서 다시 4인의 작품이 최종에 올랐지만 결국 방민실씨의 ‘항아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윤남석씨의 ‘낫 놓고 기역 자를 되짚어보며’는 ‘낫’처럼 날카로운 지적인 문장이 뛰어났으나 그 ‘낫’에 마지막 작업을 부여하지 못하고 단지 ‘조선낫’의 찬양으로 끝맺음한 것이 흠이고, 이문자씨의 ‘대청소를 하며’는 비유가 거의 시에 육박한 듯하나 ‘방’의 소통뿐만 아니라 ‘먼지’의 행방까지 그 폭을 넓혔으면 싶고, 허효남씨의 ‘노고단 가는 길’은 문장이 거칠 것이 없이 참 매끄러우나 ‘세파’와 ‘화엄’의 갈등을 ‘노고단’의 높이와 ‘하늘’의 허허로움만큼 높이고 펼쳤으면 싶다.

방민실씨의 항아리에도 불만은 있다. 문장이 왠지 번역체처럼 꺼끌꺼끌한 느낌이다. 그러나 ‘웅덩이’에서 ‘항아리’로 다시 ‘가슴’으로 또 ‘컴퓨터’로 그리하여 끝내 수필로 이어지는 연상과, 고여 있는 물의 어둠과 무거움, 비밀과 폐쇄, 꾸정거림과 맑힘, 무의식과 의식, 넘침과 해방,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등의 갈등과 조화 등의 의미가 흔한 우물이나 거울,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이미지와 별스럽다.

수필은 단지 아무나 그 속에 내력과 생각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아니라 시와 소설의 원료를 간직하는 ‘항아리’인 듯하다. ‘항아리’의 이미지를 늘어놓으면 시가 되고 ‘항아리’의 침전물을 꺼내면 소설이 되리라. 그러나 수필은 단지 삶의 내용물이나 시와 소설의 재료를 보관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며 ‘그 안에 빗물을 반쯤 받아놓고 들여다보면 내 멍울도 풀어져 푸른 하늘빛이 내 배경으로 떠오르’는 존재물로서 문학 장르이다.


[당선소감-수필]"버거운 알맹이 어떻게 채울지…"
(0) 입력 : 07.12.30 17:41

 빠릿빠릿한 구석이 없는 내게 작명가는 ‘민실(敏實)’이라 이름 지었으니 이제야 이름값을 하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민첩하게 열매를 매달았으니 말이다. 그것도 너무도 탐스러워 나에겐 더없이 큰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열매를 매달았으니 이 버거운 알맹이를 어떻게 야물게 채워나갈지 걱정부터 앞선다. 그리고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스친다.

숯을 만드는 과정 중에 가마 안에 나무를 차곡차곡 쌓을 때 흙에서 자랄 때와 달리 나무의 우듬지 쪽을 밑으로 하여 세운다고 한다. 나무가 땅에서 수액을 끌어올린 그 길을 거꾸로 물구나무를 세워야 수액을 제대로 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수액 같은 내 유년의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으며 수필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 수액이 다 빠지고 나면 숯이 되어 다른 사물에도 남다른 인식으로 활활 타오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의 불씨를 품고서. 그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신 유병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전북일보사에 마음깊이 감사를 드린다.

약력

1967년 충남 부여 출생

2007년 수필과비평 신인상 등단

띠풀 동인


['08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동화]약속 - 서성자
(0) 입력 : 07.12.30 20:17

“여러분들은 방금 군사 분계선을 넘어왔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안내원 아저씨가 감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북한 이래요!”

“뭐가 어드래? 새봄이 너 지금 북한이라고 했넨?”

할머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셨다가 다시 앉았다. 창틀을 잡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금강산이 바라보이는 온정각에 도착 하겠습니다.”

안내 방송이 계속 되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창밖만 바라보던 할머니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흙을 두 손으로 모아 냄새를 맡았다. 혀끝으로 흙을 맛보시던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흙속에 스며들었다. 나도 할머니 곁에서 흙을 만져 보았다.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할머니는 북쪽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철조망 사이사이로 코스모스들이 까치발을 들고 우리를 바라보고 저쪽 언덕에선 하얀 억새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중간 초소마다 군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저쪽만큼 학교가 보였다. 내 또래 아이들이라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다. 나를 보고 아이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아이들, 우리 새봄이 친구하면 좋갔구나야.”

할머니도 함께 손을 흔드셨다.

점심때가 가까워져서야 우리는 금강산에 도착했다. 일만 이천봉우리가 있다는 금강산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신기한 모양의 바위, 푸른색이 감도는 계곡물이 사진처럼 아름다웠다. 크고 작은 나무, 작은 풀꽃들, 발아래까지 쪼르르 달려오는 다람쥐를 보느라 엄마와 나는 발걸음이 자꾸 뒤처졌다.

“새봄이랑 에미랑 어서 따라오라.”

언제 가셨는지 할머니가 저만큼에서 엄마와 나를 불렀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빨간 단풍잎을 따서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풀 한 포기도 손대서는 안 된다는 안내원 아저씨의 말이 생각나서 꾹 참았다.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 얼른 수첩에 끼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깨끗한 계곡물도 빈 병에 채워 가방에 넣었다. 일 때문에 같이 못 온 아빠와 고모에게 갖다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내려오는 길에 할머니가 신발을 벗으셨다. 맨발로 천천히 걷기 시작하신 것이다. 바라보던 엄마도 신발을 벗었다. 관광객 몇 사람도 할머니를 따라서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나도 운동화를 벗어 양손에 들었다. 이번에 새로 산 빨간색 운동화였다.

걸어오는데, 잔돌이 발바닥에 밟혀 아팠다. 그러나 신발을 신고 올라갔던 때 보다 맨발로 내려오는 길이 더 정답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기 전에 흙 묻은 발을 씻으려고 골짜기 물에 발을 담갔다.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내려가고 있는 계곡물은 발을 담그기가 미안할 정도로 맑았다. 차가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물 묻은 발을 닦고 돌 위에 올려놓은 운동화를 신으려다가 발끝에 채여 한 짝이 ‘풍덩’ 물에 빠져 버렸다.

“엄마, 내 운동화!”

얼른 손을 내밀었지만 놓치고 말았다.

엄마가 따라서 내려가려 했지만 어른 키를 넘을 것 같은 깊은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는 운동화를 잡을 수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두고 운동화는 점점 멀어졌다.

그때 할머니가 남은 한 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려가고 있는 빨간 운동화 쪽으로 ‘휙’ 던졌다.

갑작스런 할머니의 행동에 발을 씻던 사람들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운동화는 사이좋게 ‘동동’ 떠내려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신기야요? 할머니, 말해 보시라우요?”

북쪽안내원이 뛰어 내려오며 말했다.

험악한 말투에 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저 물을 따라가면 내 고향이 나오겠디요. 내 고향 가는 걸 평생 소원으로 알고 살아왔디오.”

할머니는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러니끼니 할머니의 고향과 운동화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네까?”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쪽 안내원이 다그쳐 물었다.

“내 딸과 약속을 한 게 있었디요.”

먼 곳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겠시오. 따라오시라요.”

안내원은 할머니를 회색 건물로 데리고 갔다.

일행들은 수근 거리며 가슴을 졸였다.

“어쩌면 좋지? 몇 년 전에 말실수를 해서 붙잡힌 아주머니가 끌려간 곳도 저기였는데.”

남쪽 안내원 아저씨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저씨!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엄마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할머니 뒤를 따라 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임자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주머니의 차가운 표정을 보니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사정을 해도 소용없겠다. 할머니만 이곳에 남겨두고 우리만 돌아가게 되면 어떡하지?’

아주머니는 북쪽안내원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었다. 그리고 할머니 목에 걸린 여행증을 건네받아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나쁜 뜻은 전혀 없었디요. 새 운동화가 떠내려 가서리, 한 짝이면 소용이 없을 끼니께 나머지 한 짝도 같이 던진 것 뿐이었디요.”

“그러니끼니 지금 우리 공화국이 거지나라라는 말씀입네까? 거지처럼 운동화 주워서 신으라는 겁네까? 뭡네까? 더 들어볼 필요도 없습네다.”

책임자 옆에 서있던 군복아저씨가 말했다.

남쪽 안내원 아저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가슴도 콩당콩당 뛰고 다리도 덜덜 떨렸다.

“내가 알아서 처리 할 끼니 동무는 가서 일 보시라요.”

아주머니의 말에 군복 아저씨가 밖으로 나갔다.

“이보시오. 높으신 양반 내 말 좀 더 들어보기오. 아까 신발이 떠내려갈 때 기냥 그 신발이 아까워서리 누군가 주워 신으라는 에미의 마음이었지 다른 마음은 전혀 없었디요.”

그러나 책임자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서류만 들추었다.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내레 남쪽에 있는 영감을 찾아 둘째를 업고서리 큰집에다 어린 딸을 맡기며 약속을 했디요. 데리러 올 때 새 신발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결국 내가 떠난 얼마 후,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식만 들었디요.”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책임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아주머니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할머니의 눈 가장자리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몸도 건강하지 않으세요. 고향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가슴 병을 앓고 계시단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울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조용히 하라며 나를 달랬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를 달래는 엄마도 울고 있었다.

볼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던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로 숨었다.

“눈물 닦으시라요.”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내래 고저 우리 동지고 오마니 같아서 봐주는 기라요.”

아주머니는 서류를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고맙습네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거, 맞을지 모르갔시오. 이 신발이라도 신고 가라요.”

아주머니가 신발장에서 파란운동화를 꺼내 내 발 앞에 놓았다.

나는 엄마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신발안에 발을 넣었다. 약간 컸지만 양말을 껴신으면 맞을 것 같았다.

“고맙습네다.”

“고맙습니다.”

할머니와 내가 동시에 인사를 했다.

“뭐, 일 없습네다.”

남쪽 안내원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 창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활짝 웃으며 팔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할머니가 나오려고 하는데 책임자 아주머니가 할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외할머니도 남쪽에 있시오. 고향은 강원도 철원, 이름은 김성임이야요. 우리 오마니는 아직도 외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시요.”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할머니가 또 한 번 눈물을 닦았다.

할머니가 북쪽 아주머니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내가 신은 파란 운동화에 가을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내 빨간색 운동화를 싣고 떠난 계곡에도 햇살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맑고 푸른 물은 남과 북의 소망을 싣고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심사평-동화]동화 너무 쉽게 생각해선 안 돼
(0) 입력 : 07.12.30 20:26

 신춘문예 동화 공모에 70여 편이 넘는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그동안 전북일보가 동화 공모를 중단해 섭섭했는데, 이번에 다시 부활하고 보니 그간 분출구를 찾지 못한 예비 동화 작가들이 한꺼번에 모여 든 것 같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계단과 엘리베이터’(노은희), ‘안녕, 오빠!’(박시영), ‘약속’(서성자), ‘까망길’(김순아), ‘아기수달 초록 바람’(장은영), ‘안녕,차이’(최선영) 등 6편이다. 그러나 한 눈에 들어올 만큼 참신하고 착상이 돋보인 작품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동화를 너무 쉽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

응모한 작품들은 내용과 전개 방식이 서로 비슷하고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안녕, 오빠!’는 상황설정에 무리가 있고 비약이 너무 크다. ‘약속’(남북문제)은 할머니 아픔을 보다 디테일하게 형상화하지 못했다. ‘까망길’과 ‘아기수달 초록 바람’은 이야기의 당위성과 주제가 선명하지 않았다. ‘안녕, 차이’(게이 문제)는 소재 면에서 참신성을 주었지만 차이의 심적인 갈등을 피상적으로만 그려 아쉬움을 주었다.

당선작을 내는 게 무리라는 의견이었지만 ‘동화’의 활성화를 위해 길을 내주자는 뜻에서 서성자의 ‘약속’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은 내용이 상투적이지만, 근래 부각되고 있는 현실상황을 소재로 삼아 문장이 그런대로 유려하고 상황설정에 무리가 없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었다.

동화는 아이의 시점에서 쓰는 것이지만 소설과 같이 서사성을 기본으로 하는 장르다. 이야기에는 사건과 갈등이 있고 형상화에 있어 개연성이 필연적이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다. 오늘의 도전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도 동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진 발랄하고 참신한 신인들이 많이 응모해 주길 기대한다.

김자연(아동문학가) 서재균(아동문학가)


[당선소감-동화]"주눅 든 가슴에 불씨 댕겨줘 감사"
(0) 입력 : 07.12.30 20:21

 하나님 땡큐!

전북일보사의 전화를 받고 울먹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다. 광주 이성자 교수님과의 만남은 내게 분명 축복이다. 그리고 전주의 평생교육원에서 동화를 써보라는 용기를 주신 교수님들과 내 젊은 글 친구들과의 만남 또한 축복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하는 동화 같은 바램을 가져본다.

동화를 사랑하는 아이가 있었다. 서너 살 때부터 이야기 듣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한 아이였다. 대여섯 살이 되어서는 동화구연으로 동네 사람들의 일손을 놓게 만들기도 했다.

책이 귀한 그 시절 아이는 항상 책에 목말라 있었다. 친구들의 책을 빌려 밤새워 읽고, 다음날 친구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친구들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다른 집의 책까지 빌려다 아이에게 주곤 했다. 내 어릴 적 이야기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다. 퇴직 후 후회를 많이 했다. 이것도 해 줄걸 저것도 해줄걸. 그건 하지말걸 등.

그러나 유일하게 잘 했다 여겨지는 것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것이다. 퇴직 후 잘했다고 생각한 것도 역시 동화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해도 해도 어렵기만 해, 잔뜩 주눅 든 제 가슴에 불씨하나 당겨준 심사위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동화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이라고 평생 착각 속에 사는 남편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시 한 번 하나님 때앵큐!

약력

1951년 전남 곡성 출생


['08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 가작 - 낙서(곽재동)
진정한 바보는 스스로 돌아볼 줄 모른다 내가 탑을 동경할 줄 아나?
(0) 입력 : 08.01.01 21:07

 베이지색 벽면은 하얀 얼룩들로 번져있었다. 환경미화 아주머니와 수백 번을 싸운 흔적이었다. 그 속에 과거의 낙서들이 화석처럼 흐릿하게 묻혀있다. 나는 휴지걸이를 들추어보고 변기물통의 벽면을 돌아봤다. 간혹 생소한 낙서들이 보였지만 글씨체가 달랐다. 며칠 전부터 그의 낙서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그 낙서를 발견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사유서 제출 건이 많았다. 스트레스가 머리꼭지까지 올라왔다. 담배생각이 간절했다. 금연빌딩이 된 후로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골초들은 여전히 화장실에서 공공연하게 담배를 피웠다. 구석진 곳에 있는 변기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바로 위에 공기정화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유서를 펼쳐보던 중 휴지걸이 뒤 벽면에 깨알 같은 글씨를 발견했다. 글씨는 대충 휘갈긴 듯 성의 없어 보였다.

<당신은 탑 속에 갇혀있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여기가 탑인 줄은 알고 있나?>

낙서를 도서관이나 거리화장실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회사에서는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여러 회사가 사용하고 있으니 공중화장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분명 다른 건물의 회사 직원이 외근 나왔다가 심심풀이로 적고 간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회사에 버젓이 낙서를 하는 위인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좀 아쉬웠다. 음담패설이나 보다 직설적인 표현도 괜찮을 듯싶은데.

나는 펜을 꺼내 답변을 썼다.

- 이렇게 멋지고 높은 탑 보았소? 당신 혹시 이 탑에 들어오기 위해 안달이 난 건 아닌가? -

별 생각 없이 적은 것인데 이틀 후에 가보니 내 글씨 밑으로 보란 듯이 답변이 적혀있었다.

<바보 같은 놈. 진정한 바보는 스스로 돌아볼 줄 모른다. 내가 탑을 동경할 줄 아나? 나도 이곳에 살고 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배변도 이뤄지지 않았다. 펜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담배만 한 대 피우고 당장 사무실에 달려가 펜을 가져왔다.

- 탑 속에 갇혀있다고 믿는 당신이야 말로 정신병자다. 탑은 당신을 가둬놓은 적 없다. 당신 스스로 갇힌 것이지. 그리고 이럴 시간 있으면 사회봉사나 해라. 하긴 탑 속에 갇혀서 나가지도 못하겠구나. 무능력한 불만분자 같으니. -

이렇게 누군가와 낙서대화는 시작되었다. 그가 적어놓으면 내가 답변을 하고 또 2,3일이 지나면 어김없이 그가 답변을 했다. 날이 갈수록 표현은 과격해지고 상호 비난조가 되었다.

<정신병자 낙서라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대꾸하다니……. 당신도 정상은 아닌 것 같군. 열심히 남의 의견을 무시하니 악플러 소질도 다분히 보이고. 혹시 온라인에서 뛰쳐나온 건가?>

- 악플러라는 말을 쓰는 것 보니 인터넷에서 상처 많이 받았나보구나. 상처받아서 진출한 곳이 고작 화장실이냐? 이런 신성한 곳에서 더러운 입을 나불대다니. 회사에서 왕따인가 보군. 숨어서 낙서나 하고 있고. -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깨알 같은 낙서들이 제법 벽면을 차지하였다. 유성 펜이 지워지지 않아 환경미화 아주머니들이 그냥 방치해 둔 것이었다. 낙서들은 휴지걸이 부근에서 시작해 벽면을 타고 올라갔다. 낙서 량이 증가한 것은 가끔씩 제3자도 심심풀이로 낙서를 했기 때문이었다. 벽면의 반 정도가 채워지자 아주머니들이 화학물질 같은 것들로 지우기 시작했다. 낙서는 가끔씩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당신 때문에 낙서가 번지고 있다. 자제해라. 게다가 회사 아닌가. 당신은 애사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것 같군. 청소 아주머니께 미안하지도 않나?>

- 애초에 낙서를 시작한 건 당신이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아라. -

<무지 덥군. 야근하는 데 에어컨도 안 켜주는구나.>

- 무능력하니까 야근을 하지. 에어컨보다 당신 능력을 더 키워! -

<지랄 같은 상사 때문에 오늘 완전히 헛물 켰다. 그 놈만 없으면 다닐만 할 텐데. 혹시 당신이 그 놈이 아닐까?>

- 맞다. 내가 그 놈이다. 너 같은 놈을 부하직원으로 두어서 나도 다닐 맛 안 난다! -

농담반 진담반 낙서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가까워졌다. 비꼬는 어투나 냉소적인 태도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마치 고등학교 단짝 같은 느낌이었다. 진한 욕설은 친근함이 배어 있고 죽도록 싸웠다가도 내일이면 거리낌 없이 어깨동무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낙서는 우리 둘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층에 불특정 남자 직원들도 보고 있었다. 입사동기인 정철도 그중에 하나였다.

“너 혹시 화장실 낙서 봤냐?”

“무슨 낙서?”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담배 피우는 변기 있잖아. 구석진 곳에 있는 거.”

정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른 체구에 새하얀 피부는 목소리와 제법 어울렸다.

“봤어. 꼴사납게 나이 먹어서 무슨 짓인지 몰라. 벽만 지저분하게.”

“누가 제우스 이야기는 안 써줄까?”

정철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그러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쉽게 구분이 안 갔다. 그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제우스?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

“응.”

“그랬다간 단박에 들키지. 그거 사용하는 것은 우리 부서뿐인데. 팀장 귀에 들어가면 난리날 걸.”

“누가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너 팀장 성격 알잖아. 누가 썼건 간에 분명 사무실 뒤집어 놓을 거라고.”

낙서는 익명성이 보장되기는 했지만 상세한 회사 이야기는 자제해야 했다.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적정선을 유지했다. 내용들도 대부분 업무 스트레스에 관한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참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우리 글에 댓글을 달거나 대화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왈가왈부 떠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했다. 낙서의 원조는 우리였고 왠지 다른 글들은 정이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낙서는 점차 신상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딸아이를 보면 눈물이 난다. 와이프를 보면 눈물이 난다. 왠지 아나? 나의 한계 때문이다.>

- 나는 결혼 안 했다. 아니. 솔직하게 못했다. 결혼 못한 나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라. -

그는 가장이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대략 돈이나 회사 진급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벌이가 시원찮은가? 회사원 봉급이 많아 보았자 오십 보 백보 일 텐데.

<숫자가 나를 짓누른다. 사람은 숫자로만 살 수 없지 않은가?>

실적에 허덕이는 샐러리맨이 떠올랐다. 숫자는 샐러리맨에게 인격이다. 인격을 높이려면 숫자를 높여야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신용카드 특수 관리팀이다. 신용카드 부정사용을 사전에 방지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적발건수를 높이는 것. 카드 사고를 방지하는 비율이 내게 부여된 숫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숫자를 높이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올해 초에 도입한 엉터리 시스템 때문이었다. 그 시스템은 카드사고가 아니라 사람을 잡았다.

“예전처럼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다. 이 프로그램이 속 시원히 해결해 줄 것이니까. 이제 인원도 줄이고 비용도 절감될 거야.”

프로그램의 공식명칭은 ‘제우스 프러드 매니저(Zeus Fraud Manager)’였다. 팀장은 프로그램이 제우스처럼 사고들만 골라서 번개처럼 보내줄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우리들도 그렇게 믿었다.

“앞으로 이것만 사용해야 된다. 이 프로그램의 뛰어난 효율을 수치로 보여 달란 거다.”

팀장은 연일 제우스의 우수성에 열변을 토했다.

“미국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수입한 거야. 충분히 그 값을 할 거다. 카드 사고의 패턴들이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입력되어 있지. 제우스는 의심되는 카드 사용들만 골라서 실시간으로 쏴 줄 거야. 예스나 노만 결정하면 돼. 예전처럼 일일이 카드사용 목록 전부를 훑을 필요 없어.”

그러나 제우스가 보내주는 사건들은 대부분 정상거래였다. 안 쓰던 카드로 오랜만에 100만원 대출받으면 어김없이 모니터에 부정사용이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제우스가 적발한 1000건 중에 2,3건 정도만 진짜 사고였다. 그런 무용지물의 제우스를 이용해서 수치를 높여야 되는 것이었다.

나는 답변을 했다.

- 나 또한 숫자에 얽매여 있다. 그러나 별수 있는가? 숫자는 인격이다. -

<숫자가 인격이라면 나는 패륜아 수준이다. 너무 심한 자학인가? 당신과 달리 나는 타인에게도 숫자를 강요한다. 만약 거부하면 맞출 때까지 다스려야 한다. 그 자체가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매일 바위를 굴려야 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남에게 숫자를 강요한다면 낮은 직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높은 사람이 이런 곳에 쭈그려 앉아 낙서나 하고 있을까? 낮은 직위면서 남에게 숫자를 강요하는 사람이 있을까?

20층 빌딩 중에 이곳은 15층. 이 건물은 신용카드 본사였다. 회사는 현재 타 은행에 인수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올해 안으로 이전될 계획이었다. 그래서 타 회사들도 이 건물에 이주를 한 상태였다. 15층에는 우리 팀이 소속된 리스크 본부가 있고 나머지는 위층에 있다. 같은 층의 타 회사라고 하면 온라인게임회사, 해운회사, 신용정보회사 세 곳이 있었다. 그는 어디 소속일까?

나는 게임회사 직원인 것처럼 글을 써보았다.

- 지금 개발되는 게임이 완성되면 한몫 잡고 숫자에서 벗어날 것이다. 누구든지 희망은 있다. 당신과 당신이 강요하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희망은 있을 것이다. -

<게임 속은 모든 게 허용된다. 괴물을 죽이고 사람을 해쳐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현실이다. 당신은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 있나? 실제로 죽이고 죽는다. 그것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이다. 나는 매일 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그 낙서는 나를 망설이게 했다. 펜을 들었지만 쉽사리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제로 죽이고 죽는다. 그것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이다.’

한낱 낙서일 뿐이라고 되새겨 봤지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퇴근길 전철에서 책을 들었지만 내용이 읽히지가 않았다. 낙서는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번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흔한 내용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문구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역에 정차하며 퇴근길의 인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나는 구석까지 밀려들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문득 이들 중에 몇 명이나 낙서 속의 사람들에 해당될까 생각했다.

전철이 다음 역에 도착할 즈음에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다음 역에 거의 다 도착해서 멈춰버린 것이었다. 내가 타고 있는 칸은 제일 앞쪽 기관차 칸이었다. 역내에 사람들이 기관차 쪽으로 몰려들었다. 전철 밖 곳곳에서 끔찍한 표정들이 보였다. 저마다 입을 막았지만 눈은 또렷했다. 게 중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다. 몰려있던 무리들이 갈라지며 안전요원이 나타났다. 동시에 수습 중이라는 간단한 방송이 나왔다.

그때 전철 안에 누군가 말했다.

“자살했나봐.”

“허…….”

“왜 하필 이 시간에 자살하고 지랄이야.”

“이유가 있었나보지.”

“죽으려면 혼자 아무도 모르게 죽던가.”

그들은 대학생들 같았다.

잠자리에 들기까지 여전히 낙서들이 떠올랐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TV를 켰다. 자정 뉴스에 퇴근시간의 그 자살사고가 나왔다. 모자이크한 누군가 플랫폼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탔던 전철이 두 눈을 부릅뜨며 어둠에서 나타나 그 위를 지나갔다. 흑백의 화면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담담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담담했다. 50대 가장의 자살 동기는 숫자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어? 요즘 왜 이리 실수가 많아?”

팀장은 내가 제출한 사유서를 허공에 휘저었다.

“평소에 3,4건 하던 것을 하루에 7건이나 하면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냐?”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팀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제우스는 점점 우리들을 궁지에 몰았다. 목표치는 올라가고 사유서는 늘어갔다. 팀장은 수치가 낮게 나오는 것을 우리 탓으로 돌렸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검토하고 판단도 빨라야했다. 그것도 올바른 판단으로. 실수는 곧 사유서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에는 이미 제우스가 보낸 사건이 떠 있었다. 사용자는 필리핀 마닐라의 백화점에서 400달러 값어치를 구매했다. 최근 구매내역은 보름 전 서울이었다. 해외여행 시 대체로 국내면세점에서 먼저 구매를 하고 해외에 도착해서 구매하기 마련이다. 해외에 나가면서 면세품을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사용자는 해외에서 바로 400달러나 구매한 것이다. 사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은 확인을 해야 했다. 사용자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회사번호도 없다. 이번 건은 사고일까? 정상일까? 머리 속에서 어제 보았던 TV속의 50대 남자가 떠올랐다. 스스럼없이 뛰어내리는 모자이크의 남자. 그리고 숫자…….

나는 정상으로 체크했다.

점심시간의 공원은 회사원들로 붐볐다. 따사로운 햇살이 사람들을 빌딩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정철과 나는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나는 요즘 회의가 들어.”

정철은 햇살에 눈을 찌프렸다.

“너는 이번 달도 무난히 목표 달성할 것 같던데. 뭐가 걱정이야?”

“왠지 이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정철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철아. 네가 남 부러울 게 뭐가 있어? 집도 있겠다. 와이프에, 딸아이에, 갖출 거 다 갖추었지. 팀에서 실적도 제일 높지. 팀장한테 인정받지.”

정철은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 계속 침을 삼켰다.

“두려워.”

정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새하얀 정철의 얼굴이 문득 병자처럼 느껴졌다.

“뭐가 두려워?”

“문득 어제 생각난 건데. 지난 삼십년 동안 나는 지시만 받아왔어. 부모님, 큰형, 선생님, 지금은 회사.”

“누구나 그렇지. 안 그런 사람 있나? 이젠 너도 부모가 되었으니…….”

정철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괜한 말 한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렵다는 말은 정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전철에 뛰어드는 사람의 심정을 정철은 이해할까? 괜한 허영심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소리였다. 문득 낙서의 주인공을 찾아 정철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현재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불쑥 그를 찾아가 직접 대화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모든 것을 탁 터놓고 밤새워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나는 그 동안의 낙서들을 떠올렸다. 그는 실적이 낮은 샐러리맨이다. 가족도 있다. 돈 때문에 사생결단난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또한 그 사람들에게 돈에 관련된 것을 강요한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는 게임회사도 해운회사도 아닌 것 같다. 돈과 관련된 것은 우리 부서와도 연관이 있지만 강요를 한다는 점은 신용정보회사에 더 가깝다. 그 신용정보회사는 모 카드회사 채권추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신용정보회사 사무실을 슬쩍 들어갔다. 대부분 외근을 나간 듯 사무실은 반수 정도가 비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거대한 현수막이 보였다. 시뻘건 바탕에 흘려 쓴 서체가 마치 공산국가의 슬로건 같았다.

‘국가경제를 위하여 악착같이 회수하자.’

‘독종같이 회수하여 위기극복 앞당겨라!’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보드에 개인 실적표가 붙어있었다. 개인마다 그래프가 할당되어 공개적으로 실적이 체크되었다. 아직 달 중순이었지만 목표치를 돌파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평균을 뜻하는 붉은 선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그 중 한 명만 시작점 부근에서 멈춰있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며 그 이름이 붙어있는 책상을 찾았다. 그는 외근 중이었다. 대신 모니터 위에 사진액자가 놓여 있었다. 초등학생 딸과 아내와 같이 찍은 것이었다. 40대 초반에 작은 키와 마른 체격이었다. 고교시절 신경이 예민했던 수학선생과 닮았다. 항상 검정 정장에 도수 높은 커다란 금테 안경을 썼었던, 말수도 적고 가끔씩 농담을 던져도 사무적인 말투 때문에 분위기만 가라앉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커다란 덩치에 짧은 헤어스타일의 남자였다. 이곳의 관리자 같았다.

“옆에서 왔습니다.”

나는 명함을 건넸다.

“채권업무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지나치다 저것이 눈에 띄어서 한번 들러봤습니다.”

나는 현수막을 가리켰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니까요. 아까 보니까 이분 사진을 유심히 보던데.”

그는 내가 보았던 사진 액자를 가리켰다.

“사실은 저 실적표를 보고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분이죠. 다만 이번 달에는 조금 부진하네요.”

“그렇군요.”

“아마 저분은 다음 달에 여기를 떠날 겁니다.”

“무슨 일 있나요?”

“요즘 채권업무가 많이 줄었어요. 신용도 많이 호전되었고요. 예전처럼 마구잡이로 발급을 안 하니까요. 대부분 채권보다 대출 쪽으로 많이 갈 겁니다.”

“그러면 지금 업무보다 편해지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것도 영업이니까요.”

과연 사진 속의 남자가 낙서의 주인공일까? 이제까지 낙서들을 봐서는 그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최근 실적도 안 좋고 딸아이와 아내가 있으며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내는 업무까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 분은 사실 나이가 좀 많아요. 다른 일을 하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신용정보 관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답변을 적었다.

- 아직 미혼이고 업무도 당신보다는 자유롭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매일 바위를 굴려야 하니까요. 지겹고 힘들겠지만 그러다보면 분명 탑을 떠날 때가 올 겁니다. -

답변을 적고 나오려는데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팀장님. 그만 접어야 합니다.”

“너 도대체 오늘 왜 이래!”

정철과 팀장이었다. 둘은 흥분된 목소리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예전처럼 인원 늘리고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활용을 못해서 그래. 너희가 너무 느리니까 결과가 그 따위로 나오는 거 아냐!”

“저희 탓만 하지 마세요. 그리고 직원들 모두 같은 생각이에요. 제우스는 엉뚱한 곳만 번개를 때린다고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왜 너만 혼자 난리야!”

“다들 입 다물고 있으니 제가 대표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철의 말은 모두 옳았다. 제우스는 모든 팀원의 불만이었다. 다만 말을 못할 뿐이었다.

“너 다시 봐야겠다. 조용하고 차분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팀장은 호통을 치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는 정철 혼자 남은 듯했다.

“정철아. 무슨 일 있냐?”

정철은 아무 말 않고 세면대 거울만 바라봤다.

“나 정말 놀랐다. 이 안에서 정말 부들부들 떨었다고. 어떻게 팀장한테 그렇게 대들 수가 있니?”

정철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입사 후 처음이었다.

“네가 말한 거 팀장도 알고 있어. 효율 떨어진다는 거. 그런데도 폐기 못한다는 건 알잖아.”

제우스는 수 억짜리였다. 매달 유지비도 몇 천 만원이 나간다고 했다. 만약 실패한 시스템으로 판명되면 도입한 책임자들은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회사는 현재 다른 은행에 인수절차를 밟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퇴근 후 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며칠 전부터 상당히 예민 해보여. 평소 네 모습이 아니야.”

정철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아까 화장실사건도 그래. 그거 제정신으로 말한 거냐?”

정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올해 진급심사인데 그렇게 초치면 어떻게. 진급이나 하고 말하던가. 아님 내년에 타부서로 옮기면서 말하던가.”

“그냥 말하고 싶었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저 프로그램 팀장 목숨이 달린 거라고.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냐?

정철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원체 말수도 적고 입도 무거워서 평소 내가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편이었다. 그런 점은 여전했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동안 참았던 것이 폭발한 것일까?

정철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탁자가 심하게 울리며 주변 시선이 우리한테 쏠렸다.

“너 요즘도 화장실에 낙서 보고 있니?”

“예전에 말했던 그 낙서들?”

“응.”

“가끔씩 보기는 하지.”

“누가 썼을까?”

“글쎄. 왜 그렇게 낙서에 관심이 있는 거야?”

정철은 꼬부라진 발음으로 말했다.

“읽을 때마다 느낀 건데. 왠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느리고 여린 목소리. 정철은 술에 취해도 톤이 높아진 적이 없다.

“네 이야기? 글쎄. 나도 몇 번 읽어봤지만 너하고 어울리는 글은 별로 없던데. 써 놓은 것 보면 온갖 푸념에다가 열등의식만 꽉 들어차 있잖아.”

정철은 말없이 술만 따랐다. 혹시 낙서를 읽고 심경의 변화라도 일으킨 것일까? 말 그대로 낙서에 불과할 뿐인데. 아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상황으로 봐서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팀장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들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날 술자리에서 헤어지면서 정철은 꼬인 말투로 말했다.

“성호야. 부탁이 있는데.”

정철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나중에 그 낙서…….”

“그거 왜?”

“낙서 주인공을 찾아서 말해줘.”

“뭐라고?”

“나는 탑을 빠져나갔다고.”

“탑?”

“응. 제일 처음 누군가 거기다 썼었어. 탑이라고.”

“넌 역시 심각해. 누가 신세한탄하면서 끄적거린 것 뿐이라고.”

“그래. 알아. 반드시 말해줘야 해.”

정철은 비틀거리며 거리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멀찌감치 정철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술 취해 걷는 모습이 속이 비어버린 허수아비 같았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정철은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글쎄요. 도통 연락이 안 되네요. 집에서도 모른다고 하구요.”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같이 술 마셨다면서 뭔가 없었어?”

“특별한 건 없었어요. 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정철이 성격이요. 다만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했어요.”

“회사는 그렇다고 쳐도 처자식 놔두고 어디로 내 뺀 거야?”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집에 전화해보니 와이프가 일단 경찰에 신고했답니다.”

“그래서 찾고 있데?”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은가 봐요. 대개 이런 경우 제 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요.”

내가 전화를 했을 때 정철의 아내는 지쳐있었다. 아기울음소리에 오래 통화는 못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실종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정철은 그날도 평소처럼 오전 7시에 출근했다고 했다.

“정철이가 상담을 받았었나봐.”

“무슨 상담이요?”

“거 있잖아. 열 받거나 짜증나면 가는 곳.”

팀장은 회사가 운영하는 상담센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업무로 스트레스 받는 직원들을 위해 회사 측에서 배려한 병원이었다.

“혹시나 해서 거기 문의해 봤지. 처음에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더라고.”

“그렇죠. 대부분 비밀로 하니까요.”

“불안장애가 있었데.”

“불안장애요?”

“별일 아닌데도 쓸데없이 걱정하는 거 있잖아. 직장에서는 가족 걱정하고. 집에서는 업무걱정하고.”

“이해가 안 가네요.”

“맞아. 내말이 그거야. 내가 알기로 그 놈은 아무 문제없어.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예쁜 마누라와 자식도 있잖아. 재무구조도 튼튼해. 빚도 없다고. 오히려 걱정이라면 내가 많지.”

팀장은 눈을 찌푸렸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죠.”

“그때 제우스 이야기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그런데 너는 이상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부터 정철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이렇게 극단적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정철이 집과 회사에서 완벽했던 이유가 불안장애 때문은 아닐까 생각 들었다. 사소한 일도 걱정이 되고 걱정하면 불안하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정철은 자신의 온 힘을 쏟지 않았을까 생각 들었다. 온몸의 신경들이 바닥 날 때까지. 어쩌면 그것이 정철을 막다른 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이하게 정철이 무단결근한 날부터 화장실의 그 낙서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쓴 낙서 이후로 답변이 없었다. 화장실 벽면은 낙서를 지운 화학물질로 하얗고 커다란 얼룩들만 남아있었다.

나는 신용정보회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실적표의 주인공이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와 정신없이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만큼 과묵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도 크고 말도 빨랐다. 벽에 걸린 실적표를 보니 그의 그래프가 평균을 넘어 제법 순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낙서의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정철이 낙서의 주인공이 아닐까? 단순히 그의 실종과 낙서의 소멸이 연관되었다.

보름이 지나자 결국 정철은 해고 처리되었다. 그동안 우리들은 정철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팀장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평소보다 말수도 적어졌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충격은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정철의 행방불명을 나름대로 해석했지만 제우스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표면적으로 정철은 제우스를 반대했지만 정작 업무에서는 제우스를 이용해 가장 높은 실적을 냈기 때문이었다.

낙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정철이 해고된 날이었다. 화장실에 갔을 때 막 팀장이 그 변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변기는 팀장의 온기가 남아있어 따듯했다. 담뱃불을 붙이던 중에 휴지걸이 뒤로 낙서를 발견하였다. 귀찮은 듯 혹은 해탈한 듯 흐느적거리는 글씨는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몇 년 만에 만난 단짝처럼 반가운 나머지 낙서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잉크가 손끝에 묻어나며 글씨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허리가 하얗게 잘린 글씨는 왠지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낙서는 의미심장했다.

<제우스는 죽어야 한다.>

-끝-


['08 전북일보 신춘문예]심사평-치열한 작가의식 아쉬워
(0) 입력 : 08.01.01 21:10


임명진(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이병천(소설가·전주MBC PD) 새삼스럽지만, 소설은 ‘이야기(story)’와 ‘이야기하기(discourse)’를 양 축으로 하는 양식인 바, 스토리를 진술하는 문장 및 사건과 인물을 얽어내는 짜임새로 이루어진 그 후자에서 예술성이 확보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다시금 환기하게 되었다. 결선에 오른 일곱 편을 읽고, 대체적으로 그 스토리는 재미있었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유달리 눈길을 끄는 문체도 없었고, 탄탄한 구성력을 찾기도 어려웠던 것인데, 이는 응모자들이 소설 쓰기를 쉽게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겠고, ‘글쓰기/글짓기’를 귀치 않게 여기는 사회풍조 탓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재독한 결과 다음 세 편으로 압축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자작나무’(안금열)에서는 고양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목소리로 시종 차분하게 화자의 심리 풍경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만만치 않은 솜씨가 확인된다. 허나 이야기 속 사건이 단조롭고 ‘당신’이란 존재가 관념화되어 있는 것까지는 이 작품의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으되, 그것이 너무 반복·강조되다보니 전체적으로는 스토리가 희석된 내적 독백 위주의 수필식 소품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구경하는 집’(전석순)의 경우, 일상적인 소재에서 깊이 있는 주제를 끌어내는 작가의 안목이 눈에 띄고, 문장의 기본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소도구의 과장스런 부각과 다소 혼란스럽게 진술되고 있는 가족관계 등이 전체 구성상 불균형을 초래하고, 편지글 형식도 이 주제에 충분하게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여겨진다. ‘낙서’(곽재동)는 우선 구성력이 돋보인다. 군더더기 없이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 독자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함축적 문장, 영업사원들의 강박적인 삶이라는 시의적인 주제 설정, 그것을 숫자로 연결시키는 장치 설정 등에서 단편소설의 미덕을 고루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문체상 치밀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가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또 보다 더 면밀한 구성으로 주제가 작품 전반부에서 일찍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독서의 긴장을 후반까지 강하게 밀고 갈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심사자들은 의논 끝에 ‘낙서’를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결정하였다. 크게는 앞에서 언급한 몇 가지 아쉬움 탓이지만 실제로는 작품 전체에서 뭔가 ‘2%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인데, 굳이 그게 뭣인가 밝히라면, 다소 상투적 표현이기는 하나, ‘치열한 작가의식과 지극한 장인정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임명진(문학평론가, 전북대 교수)·이병천(소설가, 전주MBC PD)


['08 전북일보 신춘문예]당선소감-"평생 짊어지고 갈 업이라 생각"
(0) 입력 : 08.01.01 21:09

 모니터를 바라본다. 19인치 화면에는 붓 모양의 커서가 움직이며 선을 긋고 색을 입힌다. 그림속의 인물들에게 슬픔이란 없다. 언제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완성이 된 그림은 세상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당신은 보다 많은 것을 취해야 한다고. 내가 그린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기쁨, 즐거움, 사치, 소비, 향락, 남보다 우월한 가치 등을 전해준다. 소비촉진은 주목적이자 사명이다.

매번 상업적인 그림을 그릴 때 마다 이면에 숨겨진 혹은 가려진 것들이 눈에 밟히곤 했습니다. 누군가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면 그 풍광을 만들기 위해 흘렸던 땀과 희생들을 떠올렸습니다. 항상 소설은 제 직업의 반대편에서 저를 부르곤 했습니다.

기대와 실망이 반복될 때마다 신춘문예는 저에게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대신에 평생 짊어지고 갈 업이라 생각하고 매년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지원과 딸아이 수연, 아버지, 어머니, 장인어른, 장모님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영감을 준 친구 연태에게도 감사의 글 올립니다.

미숙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약력

1974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제1회 사이버 중랑 신춘문예 단편소설 장원

2007년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

현재 프리랜서 디자이너


['08 전북일보 신춘문예]동화 '서성자' 수필 '방민실' 시 '이지현'
당신들의 '문학 열정'이 향기로웠습니다
도휘정(hjcastle@jjan.co.kr) 입력 : 08.01.01 20:03

 “연락이 없어 떨어진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다”며, 전화기 너머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열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밀려오다가도 기쁨도 잠시, 이내 막막해 지고 만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새해를 특별하게 시작한 ‘2008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들. 이들은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이 표현되지 않을 때, 가장 힘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교단에 있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자주 이야기를 들려줬었어요. 그동안 30∼40명 아이들에게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면, 이제는 전국의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어요.”

동화 부문 당선자 서성자씨(57·전주시 서신동)는 29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 때는 ‘괜찮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퇴직하고 보니 후회되는 것들이 더 많다는 서씨. 그는 “퇴직하고 나서 할 일이 없어 동화를 쓰게 됐지만, 쓰다 보니 퇴직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신춘문예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수필은 진실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지 글이 술술 나오진 않는 것 같아요.”

당선 소식에, 전화를 끊자마자 소리를 질렀다는 수필 당선자 방민실씨(41·부산시 신평2동). 그에게 신춘문예란 ‘한마디로는 표현이 안되는 것’이다. 5년 전 수필을 시작해 올 여름 「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신춘문예는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생각에서 응모한 것. 방씨는 “이것 저것 늘어놓기만 하다 글쓰기의 줄기를 잡는 데 5년이 걸렸다”며 “글을 많이 고치는 편인데, 당선된 ‘항아리’는 가장 나중에 써 퇴고가 아쉬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수필을 택한 것은 소설은 너무 길고 시는 너무 짧기 때문.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호흡이 수필이라고 생각했다.

시 당선자 이지현씨(21·우석대 문예창작학과3)가 시를 택한 것도 “짧아서”. 긴 글은 깔끔한 맛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쁘기 보다는 무서워 졌다”는 이씨는 아직은 배워야 할 단계라고 말했다.

“신춘문예는 문학인들에게는 1년에 한 번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요. 하지만 아무리 잘 쓴 글도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제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1월 1일이 생일이라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는 그는 작고 하찮은 것에 집중하며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쓰고싶다고 했다.

“파격적인 글이 많은 ‘신춘문예용’에 도전도 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했다”는 서씨도 사실 잔잔한 글을 더 좋아한다. 삭막한 시대 동화의 역할은 따뜻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씨는 요즘 한국적인 소재가 눈에 들어왔다. 읽었을 때 ‘그림이 그려지는 글’을 좋아하다보니 묘사에 치중, 글이 어렵다는 말도 듣지만 그 안에 소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담고 싶다.

누구에게는 간절한 ‘통과의례’로, 누구에게는 떨쳐버릴 수 없는 ‘미련’으로 남겨지는 ‘신춘문예’. ‘전북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이들과 글의 인연은 더욱 질겨졌다.



2008 강원일보 신춘문예 결산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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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지난해 12월 20일 편집국 회의실에서 심사를 하고있다. 김남덕기자
 
도출신 ‘스타 예감’ 젊은 소설가 탄생

신춘문예의 큰 파도가 ‘문청’으로 통칭되는 예비 문학인들의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등용문을 나선 영예의 당선작가가 탄생한 반면 무수한 낙선자들은 시린 가슴을 여미고 또다시 문필을 다듬어야 하는 처지에 맞닥뜨려졌다.

2008년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는 지난해보다 200여편 가까이 늘어난 1,701편이 응모했다.

단편소설 101편, 시(시조 포함) 1,020편, 동시 510편, 동화 70편이 접수됐다.

제주도를 비롯한 국내 전지역은 물론 특히별 해외에서 응모한 작품이 많았던 것도 특기할 일이었다.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이집트 카이로, 아일랜드, 중국 연길에서 작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김도연(소설가) 김창균(시인) 차재연(아동문학가) 박성호(동화작가) 4명의 젊은 작가들의 예심을 한 결과 본선에 오른 것은 소설 9, 시 17, 동시 10, 동화 10편이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을 응모자의 신상을 가린 익명으로 복사해 본심위원에게 제시했고, 지난해 12월20일 강원일보 편집국 회의실에서 최종 토론을 거쳐 당선작을 선정했다.

본심에 심사위원은 단편소설 전상국 최수철, 시 이영춘 최승호, 동시 이창건 민현숙, 동화 이규희 권영상씨였다.

〈2008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심사평 당선소감=35∼37면〉 본심에 오른 작품 중 동시와 동화부문에서는 비교적 쉽게 당선작이 합의됐다.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이 미리 검토한 작품 중 당선작이 돋보여 흔쾌히 심사평을 쓸 수 있었다.

단편소설과 시부문에서는 고심이 있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지녀 심사위원들이 강조하는 문학적 관점에 따라 당선작이 가려졌다고 할 수 있다.

소설 당선작 ‘회전의자(전석순)’는 다소 거친 듯하지만 이 점이 개성으로 읽혔고, 이야기의 소재 선택과 구성에 무리가 없어 작가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높게 평가됐다.

시는 가장 고심한 부문이었다.

두 본심위원은 3편의 작품을 놓고 최종토론에 들어가 시적 함축성과 정갈하고 단아한 점이 돋보인 ‘소라의 집(김정임)’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단편소설 당선자 전석순(26)씨는 춘천 태생으로 일찍부터 작가를 삶의 방향으로 잡아놓은 문학도.

강원고 재학시절 문예부 활동을 거쳐 명지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문학수업을 받아왔다.

다음달 대학을 졸업하는 전씨는 지난해경희대 전국대학생문예공모전 소설 부문 대상을 비롯해 재학시절 백마문학상 오월문학상 국원문학상을 수상, 자신의 문재를 확인해왔다.

도내 문학계에서는 오랜만에 지역출신의 촉망되는 젊은 소설가를 발굴했다고 반기고 있다.

시 당선자 김정임(54)씨는 대구출생으로 경북의대 간호학과를 나와 서울 평화초교에 재직하는 현직교사.

뒤늦게 문학수업을 시작한 늦깎이 신인이다.

박제천 문효치 시인에게서 탄탄한 문학수업을 받아오며 2002년 미네르바 신인상, 2006년 공무원문예대전 행자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동시 당선자 신지영(34)씨는 서울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문학수업을 받아 온 문재.

‘아동문학평론’ 2007년 겨울호 신인문학상에 당선, 신인작가로서 거듭 문재를 확인받은 경우가 됐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한국아동문학계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동화 당선자 김인숙(44)씨는 전북 익산출신으로 원광대 국문과를 나왔지만 뒤늦게 본격 문학수업을 받은 신인.

서울 송파문화원에서 도출신 소설가 유재용(철원) 전 한국소설가협회장으로부터 창작수업을 받았다.

당선작 ‘동강할미꽃은’ 영월 현지를 찾아 때마침 열린 축제를 보고 얻은 글제로 창작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남편이 서정우시인이어서 부부문학인 가족이 됐다.

본명이 소설가 김인숙씨와 같은 이름이어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필명을 ‘이 수’라고 쓰겠다고 전해왔다.

올해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은 오는 10일 오후2시 강원일보 대강당에서 2007 강원문화예술인 신년교례회를 겸해 열린다.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회전의자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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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한 박스를 이고 컨테이너 박스로 가는데 글쎄 나무들이 울면서 통째로 떠내려 오더라.

우우거리면서 쓸려 가는데 별안간 네 생각이 나지 뭐니.

너도 거기서 그렇게 울고 있을 것만 같더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꽁꽁 묶어놓은 것처럼 엄마의 목소리는 아득했다.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나름대로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사는 곳에 버스사고가 났다는데 혹시 내가 거기에 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해서, 오랜만에 집으로 외삼촌이 놀러 왔는데 한참 동안 내 얘기만 하다가 가셔서, 청소를 하는데 오래전에 내가 잃어버렸다고 속상해하던 머리핀이 나와서.

심지어는 밖에 바람이 부는데 자꾸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아서 전화를 하신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예요?

어디긴, 떠내려간 집 위에 임시로 마련해준 곳에서 지내고 있다.

안이 찜통이라 들어가 있진 못해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니.

집 떠내려가고 이 더운 날씨에도 네 애비는 잘도 들어가 낮잠을 잔단다.

그래도 사람 안 다친 게 다행이지.

누구 다녀간 사람 있어요?

다녀가긴 누가 다녀가니.

자식이라곤 달랑 너 하난데.

여긴 연일 건조할 뿐이었다.

나는 엄마의 눅눅한 목소리를 낯설게 받아들었다.

어느 날은 계란말이를 하는데 맛소금이 없었다.

된장이며 고추장에 간장까지 챙겨주던 엄마는 굳이 가방 안에 굵은 소금까지 챙겨주었다.

여기서 마트까지 나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때문에 보통은 주말에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사오는 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굵은 소금을 꺼내 손가락 끝으로 잘게 부수어 계란을 푼 그릇에 넣었다.

그러다가 손끝이 아려서 보니 살짝 피가 돋아 있었다.

그 사이 굵은 소금이 꾸둑꾸둑 말라 있었던 것이다.

연일 건조한 날씨 때문에 굵은 소금에 손까지 베었다.

물기 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병에 담아두고 싶다.

아직은 좀 그래.

아버지도 건강하지? 엄마도.

그래.

너무 걱정 마라.

내가 괜한 소리 했나 보네.

여기 자원봉사자들이 수두룩하니까.

네 애비는 종일 자는 게 일인 사람인데 건강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니.

그래도 언제고 한 번 여기 들러라.

장마 지나간 뒤로 너무 변했어.

한창 공사하는데 너 올 때쯤엔 예전 모습이 하나라도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집이라도 못 찾으면 어쩌니.

엄마의 목소리엔 금방이라도 곰팡이가 꽃처럼 피어나고 불규칙한 무늬들이 돋아날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촘촘하게 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났다고 했다.

곧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가 끊어지고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긴 날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안전한 초등학교 체육관으로 피신했다.

아버지는 그때도 구석에 웅크리고 곤하게 주무셨다.

마을에서 급히 떠나온 사람들은 집에서 귀중한 것들을 챙겨 나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죄다 그걸 하나씩 들고 나왔더라.

하긴 그게 제일 중요하다면 중요하지.

전화를 끊자 물기가 고일 것 같던 바닥이 금세 말랐다.

나는 엄마에게 여기는 너무 건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 계절에 건조한 곳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누진 옷들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를 틀 때면 나는 가습기를 주기적으로 작동시켰다.

바닥에 물을 쏟아도 걸레를 찾아 빨아서 오면 온데간데없이 물기가 사려졌다.

아무런 무늬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린 것이다.

뭐든 아무런 무늬를 남겨놓지 않고 허공에 붕 뜰 것 같은 나날들.

세탁기 안에 밀어 넣었던 빨래들을 도로 빼냈다.

더 이상 동전은 들어가지 않았다.

투입구 안쪽으로 꾸역꾸역 채워진 동전들이 보였다.

도열해 있는 기계들이 죄다 그랬다.

아무도 동전을 거둬가지 않으니 더 이상 세탁기를 쓸 수 없었다.

빨래방은 며칠 동안 이런 상태로 고여 있었다.

세탁기 안은 세제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섬유 유연제를 판매하는 자판기는 텅 비어 있었다.

바구니 안으로 빨랫감들을 아무렇게나 담았다.

거긴 빨래를 해도 금방 마르겠구나.

여기는 아침에 널은 네 아버지 팬티가 해가 질 때까지도 마르질 않는구나.

마르는가 싶으면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젖은 팬티를 입는 것과 더러운 팬티를 입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쁜 거라고 생각하니.

세탁기를 들여놓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엄마는 세탁기가 없는 집에 사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잔뜩 따라놓았던 물은 전화하는 사이에 한 모금 정도가 줄어들었다.

엄마는 내 옆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건조함을 잔뜩 미화하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물기 있는 엄마의 목소리에 대해 부러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뿌옇게 솟아오르는 흙먼지들과 퍼석하게 말라버린 짐승의 배설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눈물은 뺨에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엄마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는데도 눈물을 흘리는 거 같다고 했다.

닦아보면 그것은 빗물이라고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우산 하나씩은 끼고 다닌다.

저 사람은 우산이 없어 어쩌나, 하고 시선을 주다 보면 건물에서 나올 땐 가방에서 여지없이 우산을 꺼내 경쾌하게 펼치곤 한다.

그런 계절이다.

우산을 펼치는 소리만 가볍게 튀어 오르는 계절.

처음엔 예전에 살던 방에 들러 물건을 챙겨 엄마에게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전기세와 가스요금을 납부해야 했고 주인집에 수도세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터미널에 들러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는 없던 길들이 생겨나고 있던 길들이 하룻밤 사이 사라진다고 했다.

멀쩡한 길이 강이 되어 흐르고 집 한 채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아직 시외버스가 다닐 때 가야했다.

엄마에게 다녀오고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 복구공사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비가 내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공중을 누렇게 떠다닌다.

이렇게 비가 쏟아질지 누가 알았겠니.

엄마는 목줄을 풀어놓지 않아서, 개집에 물이 들어찰 때까지 꼼짝없이 묶여있던 누렁이 시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모종삽을 들고 산으로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복구공사 중이라 산을 오를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아버지는 곧 다시 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창 더울 때 잡아먹는 건데 말이야.

모로 누운 아버지는 부러 큰 소리를 냈었다.

터미널 매점 여자는 깊숙한 곳에서 우산을 꺼내준다.

가방에는 조악한 꽃무늬 양산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어떤 우산을 드리냐는 물음에 내가 했던 대답은 심드렁했다.

그냥 아무 거나요.

여자는 수북이 쌓인 우산들 중에서 맨 아래에 있는 것을 빼준다.

손의 움직임이 제비뽑기를 할 때처럼 사뭇 진지하다.

아래에서 우산을 빼내자 빽빽하게 쌓인 우산들이 흐트러진다.

그러는 사이 빼낸 자리가 메워진다.

우산 하나를 빼낸 자리는 이제 티도 안 난다.

여자는 장마 동안 우산을 다 팔 수 있을까.

아무런 무늬도 없고 두 번밖에 접혀지지 않아 핸드백에 넣을 수도 없는 우산을 쓰고 예전에 살던 방으로 왔다.

사람들은 조금만 조밀해지면 저마다 우산을 번쩍 들었다.

나도 덩달아 우산을 높이 들었지만 사람들 얼굴에 닿기 일쑤였다.

우체통에 고지서 용지가 반도 넘게 삐져나와 있다.

나는 화장실 안에서 줄기차게 노크소리를 듣고 있을 때 화장지를 풀어내듯, 신경질적으로 고지서 용지를 그러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과장된다.

멀리 누군가가 내가 걷고 있는 만큼만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걸음을 딱 멈춘다.

현관문 앞에는 젖은 박스가 놓여있다.

밑에는 물이 고여 있다.

물기들이 박스를 타고 올라와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이 안에 뭔가 들어갈 수 있을까.

내 허리까지 올라오고 한 아름이 넘는 박스는 눅눅하다.

덕지덕지 붙여놓은 테이프도 쉽게 뜯겨나간다.

주소에는 내 이름이 정확하게 쓰여 있다.

혹시라도 잘못 보내질까 힘을 주어 반듯반듯하게 쓴 글씨체다.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이제 엄마와 아버지의 집에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떠나온 것이다.

테이프를 뜯어내고 흐물흐물해진 박스 안을 열어본다.

아직 여독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회전의자가 돌고 있다.

나는 맹렬하게 돌고 있는 회전의자를 세운다.

등받이까지 물방울이 송골송골 돋아나있다.

나 무 꼭대기에 훌라후프가 걸려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가지들이 동그랗게 휘어져 있나 했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훌라후프가 걸려있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젖은 옷가지들과 책가방, 줄넘기, 국자나 고무장갑 같은 것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마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하나가 휘우듬하게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자 나무 옆에 꼿꼿하게 서 있던 여자 둘은 마스크를 벗었다.

둘은 쌍둥이 같아 보였다.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선 목에 건 수건으로 연방 땀을 닦고 있었다.

나무 앞에서 굴착기가 장마에 쓸려 내려온 토사물을 거둬내고 있었다.

둘은 굴착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좇고 있었다.

나도 함께 서서 굴착기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길들이 사라지고 흙에 파묻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오던 길에 이층집이었던 벽돌집이 층 하나를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와보니 일층 전체가 흙에 파묻혀 있는 것이었다.

내가 딛고 있는 곳은 허공으로 붕 떠있는 지점이었다.

날씨가 줄기차게 더웠다.

땀이 흐를 때마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아예 한 손에 쥐고 걸어왔다.

무른 땅은 밟을 때마다 구두굽이 푹푹 들어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땅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주면서 온 것 같다.

아버지가 누워있을 집을 가늠하다가 여자 둘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내 앞을 지나쳐 부리나케 달려갔다.

자원봉사자는 여자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부리나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뭐니?

이번엔 은수저.

젓가락은 어디 갔을까? 다음엔 언니 차례야.

여자는 뒤에 놓인 바구니에 자원봉사자에게 건네받은 은수저를 담아놓았다.

둘은 다시 마스크를 쓰고 꼿꼿하게 서서 굴착기의 움직임에 시선을 꽂았다.

바구니에는 은수저를 비롯한 더럽혀진 책들과 아령, 장난감 자동차나 파리채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번엔 언니라는 여자가 자원봉사자에게 달려갔다.

은수저는 아버지 거예요.

무슨 상을 받으셔서 받아온 건데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저걸로 식사를 한 번도 못하셨어요.

그깟 은수저 아낄 게 뭐 있다고.

그나저나 나오라는 건 안 나오고 계속 쓸데없는 것들만 나와서 큰일이네요.

언니가 자원봉사자에게 받아온 것은 슬리퍼 한 짝이었다.

여자 둘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슬리퍼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흙을 털어내기도 했다.

둘은 일단 바구니 안에 슬리퍼를 넣어두었다.

이게 내건 지 언니건 지 구분이 안 가요.

게다가 하나뿐이니.

여자 중 하나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부러 설명해주었다.

둘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굴착기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종일 그렇게 서 있을 생각인 거 같았다.

흙이 덜어질 때마다 지붕이 살짝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붕 끄트머리가 드러나자 둘은 손을 잡았다.

이제 곧 나올 거 같아요.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는 훌라후프가 걸린 나무뿐이었고 풀들이 물결무늬를 그리며 쓰러져있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어쩌면 길이었을 곳으로 방역차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는 천천히 마스크를 내렸다.

하얀 마스크는 때에 절어있었다.

잠깐 서 있었는데도 몸이 노곤해졌다.

그래도 여자는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자원봉사자가 흙더미 안에서 뭐가 나왔다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곤 물건을 들고 내게 다가와 그것에 대한 일화들을 나열했다.

여자는 지붕이 반쯤 드러나자 언니와 손을 붙잡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게 아직 안 나왔나 봐요.

뭐가 더 나올 게 있어요?

아버지요.

아버지는 내가 동전 하나를 없애봤을 때 간장종지를 던졌다.

다시 한 손에서 숨겨뒀던 동전을 보여드렸을 때에도 수저로 내 머릴 치시려고 하셨다.

종이컵 안에서 동전이 두 개가 되자 다시 식사를 하셨다.

아버지에게 마술사는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없애는 존재가 아니라 맨땅에도 우물을 만들어내는 의미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던 두 번째 동전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동전 하나가 생긴 줄 아셨다.

컨테이너 박스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세간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서랍장이나 항아리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고 바퀴가 없는 자전거도 버리지 못하고 일단은 문 옆에 세워두고 있는 듯했다.

곧 자전거 바퀴 하나쯤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문이란 문은,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놓고 있었다.

문 옆에 세워진 선반에는 신발들이 칸칸이 채워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못하고 마른 흙이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 이름을 말할 땐 고개를 갸우뚱하던 사람이 아버지 이름을 말하자 단번에 알아챘다.

끝에서부터 여섯 번째 컨테이너 박스.

모두 똑같이 생겨서 나는 몇 번이고 수를 헤아리는 데 실패했다.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여섯 번째 컨테이너 박스에 도달했을 땐, 밖으로 터져 나온 세간들이 우리 집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아버지의 발이 보였다.

단정하게 겹쳐진, 거무스름한 발이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다.

땀을 흘리면서도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자꾸 닫히려는 문 앞에 구두를 벗어놓았다.

문은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열려있었다.

선풍기 한 대가 툴툴거리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컨테이너 박스 안은 밖과 다를 것 없이 후텁지근했다.

선풍기가 아버지 쪽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아버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선풍기 바람이 아버지를 지나서 내 목덜미에 끼얹어졌다.

야아, 네는 언제 왔어?

방금 왔어.

찾느라 혼났어.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야? 도통 모르겠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과수원 뒤쯤이 아닐까 한다.

영철이네 집 파묻힌 게 저쪽에 있으니.

언제 비가 왔냐 싶게 하늘이 이래 맑네.

엄마가 젖은 수건으로 몸을 툭툭 털어낼 때마다 먼지가 났다.

내가 선풍기를 엄마가 있는 쪽으로 향하려는데 엄마는 됐다며 손짓을 했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는 부탄가스와 라면 몇 개, 간단한 그릇과 모기향과 옷 몇 가지가 전부였다.

엄마는 쌀 한 봉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오늘 배당받은 거 같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몸이 고단해졌다.

게다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컨테이너 박스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질 않았다.

챙겨온 건 이게 다야?

뭐 챙겨 나올 틈이나 있었니.

잠만 자던 네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나온 건만도 다행이지.

신발도 어쩜 그렇게 한 짝씩만 건져내는지.

뭐 하나 제대로 신을 수가 있어야지.

여자 둘은 해가 지기 전에 아버지를 건져낼 수 있을까.

밖이 일순 시끄러워지면서 먼지가 일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컨테이너 박스 한 가운데 퍼런 방수천을 펼쳐놓았다.

그리곤 각자 가져온 물건들을 쏟아 부었다.

젖은 것이 건조해지면서 불은 책들과 깨지지 않은 그릇들과 커다란 여행가방, 한쪽 팔이 없는 인형들이 선물처럼 쏟아졌다.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왔나 싶게 사방에서 수재민들이 몰려들었다.

방수천 사이를 빙 둘러싸고 본인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물건들을 가져갔다.

엄마도 한쪽 발엔 슬리퍼를 한쪽 발엔 아버지 운동화를 꿰어 신고 나갔다.

나도 구두를 신고 엄마를 따랐다.

엄마를 따라 몇 발자국 디뎠을 때 컨테이너 박스의 문이 쿵하고 닫혀버렸다.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싸우기도 했다.

동네에 하나뿐인 초등학교 체육복이 나왔을 땐 서로 자기 아들의 것이라고 우겼다.

결국 자기 아들을 데려와 억지로 입혀본 아줌마의 것이 되었다.

몸에 죄어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이는 아무 소리 없이 냉큼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갔다.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찾았다.

자식이 받은 개근상장을 찾고 울음소리를 내는 남자도 있었다.

상장은 코팅을 해놓아서 멀쩡했다.

옆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이들이 받아온 걸 모조리 코팅해 놓을 걸, 하는 여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결국 엄마는 우리 집의 물건을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없구나.

이번에도 없어.

왜 그걸 챙길 생각을 못했을까.

바보같이.

제일 중요한 건데.

뭘 두고 나왔는데? 통장?

아니, 앨범 말이다.

앨범.

앨범을 들고 나왔어야지 엉뚱한 걸 들고 나오지 말고.

엄마가 말했던, 사람들이 죄다 들고 나왔다던 것은 앨범이었다.

나는 정말 한순간에 집을 빠져나와 다시는 들어갈 수 없게 된다면 무엇을 들고 나와야 할지 생각해봤다.

아무 것도 중요한 게 없다가도 전부 중요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일어나 컨테이너 박스로 갔다.

그렇게 큰 소리로 문이 닫혔는데도 아버지는 잘 주무시고 계셨다.

얘, 얘! 이거, 여기 네 것 있다.

엄마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멀리 엄마가 나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중에 햇빛이 걷히고 자세히 봤을 때는 그것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굴러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분명 내 것이었다.

이제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엄마는 득의만면하게 내 앞까지 왔다.

한 밤중이 되었는데도 열기는 가시질 않았다.

끈적끈적하게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컨테이너 박스는 세 사람이 눕자 관처럼 딱 맞았다.

누운 자리를 빼고 나면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엄마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덩달아 나도 몸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배에 두른 차렵이불이 들썩였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덮지 않고 곤하게 주무셨다.

어쩜 이 날씨에 땀 한 방울 안 흘리시고 잘 주무실까.

아침에 보급받은 웃옷은 한 벌 뿐이었다.

낮에 엄마가 입었던 웃옷을 아버지께 덮어드렸다.

목 밑까지 덮어드리다가 나는 숨은 쉬시나 싶어 아버지의 코끝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엄마가 내 손등을 탁 내리쳤다.

내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닿을 뻔했다.

자는 게 일인 양반이야.

그래도 이럴 때 없는 거보다는 나아.

엄마는 다시 들썩이며 모로 누웠다.

그리곤 이불을 내 쪽으로 밀어주셨다.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 한 점 없었다.

목 밑으로 굵은 땀들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는데도 밤이나 낮이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로 마주쳐도 고개만 숙일 뿐이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앨범을 찾거나 들고 나온 사람들만이 종일 앨범을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회전의자는 플라스틱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이 자려면 회전의자를 바닥에 부려놓을 수 없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자는 한이 있더라도 회전의자를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회전의자를 서랍장 위에 올렸다.

밖에 두면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고 흙먼지를 뒤집어쓸 거라고 했다.

회전의자는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목덜미에 땀을 닦는 횟수가 잦아들었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엄마와 나와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와 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회전의자를 돌려 시선을 조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것 좀 밖에 내놓으면 안 돼? 아니면 바닥에 내려놓던지.

바닥에 내려놓으면 우리 셋이 어떻게 눕는다니? 그리고 밖에 내다 두면 지금 먼지 뒤집어 쓰기 딱 좋구만.

저거라도 찾아서 얼마나 다행이냐.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회전의자를 사주셨다.

책상도 아니고 달랑 의자 하나를 사주셨다.

시내에서 제일 비싼 걸로 사신 것 같았다.

하지만 짙은 고동색의 낡은 책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의자 높이를 제일 낮게 맞추어도 책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이미 제일 높게 조절한 회전의자에 앉아도 발이 바닥에 닿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기숙사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책상에 앉을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가끔 엄마는 회전의자에 빨래를 널어놓거나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받혀놓았다.

고추를 널어놓을 때도 쓰고 손이 닿지 않는 찬장에서 물건을 꺼낼 때도 몸을 흔들거리면서도 굳이 회전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회전의자가 집에서 잘 쓰이고 있음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내 방에서 흐릿하게 엄마의 웃음소리가 났었다.

엄마의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못할 만큼 가느다란 것이었다.

마치 먹이사슬의 가장 낮은 단계 생물이 내는 소리 같았다.

방문 앞까지 갈 때까지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엄마는 회전위자에 앉아 물색없이 웃고 있었었다.

발로 가볍게 바닥을 튕기며 회전의자를 돌렸다.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회전의자가 서너 바퀴 돌았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엄마는 끊임없이 웃었다.

회전이 멈췄을 때 엄마는 다리를 움직여가며 회전의자를 끌고 곤충처럼 방안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끄트머리까지 갔다가 벽을 차고 반대편까지 미끄러져 갔다.

그때마다 구슬이 또르륵 구르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한 엄마는 의자에서 일어나 후다닥 나갔다.

내가 뭐라고 말을 걸 틈도 없이, 신발도 제대로 꿰어 신지 못하고.

그래도 회전의자에 앉아서 몇 바퀴 돌고 나면 그래도 좀 견딜만한 힘이 생기는 거 같았지.

뭔가 내 맘대로 되는 것도 같고 말이지.

엄마의 등이 들썩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떠내려간 회전의자를 찾았다고 해도 의자를 타고 그때처럼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엔 늘 아버지가 누워있었고 밖은 장마 뒤라 바닥이 성한 데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들썩이는 엄마의 등은 우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머리맡에 있는 손전등을 켰다.

밋밋한 천장에 커다란 무늬가 생겼다.

엄마는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해서 천장을 쳐다봤다.

울고 있었는지 웃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왜 화장실 가려고? 아버지 깨지 않으시게 조심해라.

아버지는 내가 옆에서 노래를 불러도 안 깨실 텐데, 뭐.

그게 아니라 일어나봐.

덮고 있었던 차렵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엄마와 나는 일어나 마주 보고 앉았다.

손을 펴서 앞뒤로 엄마한테 보여줬다.

엄마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내 손을 봤다.

앞뒤로 돌려가며 비어 있는 손바닥을 보여줬다.

엄마는 건성으로 내 손동작을 따라했다.

그게 아니라 내 손을 잘 보라고.

곱구나.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엄마한테 보여줬다.

엄마는 받으려고 했지만 나는 손에 동전을 쥐고 엄마한테 다시 보여줬다.

왼쪽 엄지가 동전을 쥔 오른손 사이로 교차하면서 동전이 사라졌다.

꽃처럼 편 왼손에도 동전은 없었고 가만히 있던 오른손에도 동전은 없었다.

건성으로 보던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엄마 귀 뒤로 오른손을 가져가 동전을 꺼냈다.

엄마는 연방 귀 뒤를 쓰다듬었다.

미심쩍은지 귀 뒤를 오래 쓰다듬고 앉아 동전을 바라보았다.

내 귀에 언제 그런 게 있었다니.

다시 한 번 꺼내봐라.

마술은 뭔가를 없애고 만들어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참 찾던 것들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발견하는 것도 마술이었다.

너는 생각보다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구나.

어두운 방안에서 천장을 향한 손전등 불빛은 마치 크고 흰 꽃이 돋아난 것 같았다.

그림자 진 엄마의 얼굴이 처음인 듯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고 이것도 없앴다가 다시 귀 뒤에서 나오게 할 수 있냐고 했다.

아니면 수저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서랍장도 회전의자도, 네 아버지도 너도 그리고 나까지도… 너는 마음대로 없앴다가 아무 때나 맘 내킬 때 꺼낼 수 있겠니.

처음으로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셨다.

회전의자가 불현듯 기울었고 난데없이 창가에서 가느다란 바람이 스며 들어왔다.

굵은 땀이 고인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나는 두터운 손바닥에 위태롭게 쥐고 숨겨놓았던 동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전은 바닥을 굴러 손전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득히 사라졌다.

엄마는 손전등을 끄고 다시 몸을 뉘었다.

천장에 돋아났던 꽃의 잔상이 잠이 들 때까지 남아있었다.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던 장마는 다시 도드라졌다.

아침쯤 세간 건질 게 남아있는지 집에 가보려던 엄마는 다시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지방도로가 완전히 유실되어서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고개로 구조물품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험준한 산길이고 흙이 무뎌져서 지원해주는 물품들은 양초나 라면이 고작이었다.

하나 둘 세워지던 전신주는 다시 쓰러지기 시작했다.

흙더미 속에는 감자나 양파들이 함부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거멓게 썩은 것들은 벌써 첨예한 악취를 내기 시작했다.

개중에 멀쩡한 것들을 골라 서로 가져갔다.

굵직한 빗방울들이 촘촘해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고개를 내밀면 멀리 지붕들만 비죽하게 보였다.

마치 흙탕물 위에 꽃잎을 몇 개 던져놓은 듯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버스정류장이 통째로 박혀있었다.

입구에 있던 정류장이 물을 타고 마을 한 가운데까지 들어선 것이었다.

마을회관이 반쯤 부수어져 속이 다 드러났고 정갈하게 심겨졌던 과실수가 흩어졌다.

아마 나무에 훌라후프가 걸렸던 자리만큼 다시 물이 찰 것이었다.

아버지의 잠은 오래 이어졌다.

아버지는 보급된 옷을 단정하게 입고 계셨다.

엄마는 그릇들을 죄다 밖에 내놓고 빗물을 받기 시작했다.

밥공기에 빗물이 금방 찼다.

나는 쉴 새 없이 빗물을 받아 대야에 부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얼핏 아버지는 빗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듯 고개를 까닥이는 것도 같았다.

함지에 물이 가득 차자 엄마는 주전자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식혀 물병에 담아 한 곳에 모아두었다.

그 중 한 병은 아버지 머리맡에 두었다.

엄마도 고개를 까딱거리는 아버지를 본 것 같았다.

전신주가 여기저기 쓰러져있기 때문에 나갈 때는 무릎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신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전될 수도 있었다.

엄마는 야무지게 고무장화를 신었다.

구호물품을 주는 곳까지 가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여기서 아버지랑 좀 있어라.

구호물품 받아올 테니까.

같이 갈게.

하나는 아버지 옆에 있어야지.

둥그렇게 둘린 컨테이너 박스에서 샛노란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씩 나왔다.

긴 줄을 허리에 묶고 일렬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라지는 길까지 나가보려 했지만 내겐 양산뿐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터미널에 들러 우산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마가 끝날 때쯤엔 아버지도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음식을 먹고 내 마술을 보며 돈을 좀 만들어달라고 하실까.

아버지 옆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곤하게 주무셨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내 뺨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왔을까.

어슴푸레 눈을 떴을 땐 이미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 위에 비가 새고 있었다.

얼굴에 물기가 가득했다.

손전등을 천장으로 켰다.

천장에 돋아난 흰 꽃 사이에서 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빈 그릇을 찾아 아래에 받혀놓았다.

밖은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급한 발자국 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천천히 목소리가 다가왔다.

아마 누군가가 컨테이너 박스를 돌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언제 오는 것일까.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받혀놓은 그릇에도 빗방울들이 빠르게 고이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박스에 난 창이 열렸다.

창은 반쯤도 열리지 않았다.

밖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단지 목소리만 들렸다.

지금 여기도 위험합니다.

중요한 물건 챙겨서 어서 나오세요.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컨테이너 박스 안을 돌아보았다.

무얼 가져가야 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엄마는 아직 안 온 것일까.

엄마라면 무엇을 챙겼을지 생각해봤다.

나는 서랍장 위에 위태롭게 얹힌 회전의자부터 바닥에 부려놓았다.

회전의자는 생각보다 꽤 무거웠다.

의자 바퀴가 아버지의 왼팔을 건드렸다.

잠을 자던 아버지가 몸을 움찔했다.

밖엔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보니 다들 앨범 하나씩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모로 누웠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사람들이 왜 앨범을 챙겨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종 일 열어두던 창으로 빗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호품을 받으러 나간 엄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양산을 꺼냈다.

양산이라도 쓰고 엄마를 찾으러 나가볼 심산이었다.

창으로 빗물이 덩어리째 들어왔다.

누군가 창을 향해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물을 한 바가지씩 퍼붓는 것 같았다.

무작정 양산을 펼쳤다.

내 몸 하나 가리기에도 작은 것이었지만 컨테이너 박스 안이 양산에 새겨진 꽃무늬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차렵이불도 서랍장도 부탄가스도 아버지도 조악한 꽃무늬가 덮어버렸다.

양산을 펼치고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꽃이었다.

문이 있던 자리로 걸음을 디디었다.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은 이미 발등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빗물이 떨어지던 자리에 받혀놓았던 그릇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위는 온통 꽃인데 바닥은 흙탕물이 고여 세간이 떠다녔다.

아버지는 귀밑까지 물이 찼는데도 일어나지 않으셨다.

엄마는 어디쯤 왔을까.

나가는 문을 열려고 했다.

문은 밖에서 누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나는 양산을 집어던졌다.

물이 고인 바닥에 떨어진 양산은 누운 아버지의 얼굴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이번엔 두 손으로 힘껏 문을 열었다.

완강한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힘을 쓰는데 별안간 뒤에서 손이 겹쳐졌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겹쳐진 손으로 손잡이를 당겼다.

문은 그제야 쉽게 열렸다.

열린 문으로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 순식간에 흙탕물이 들어찼다.

뒤에 서 있던 아버지는 돌아볼 틈도 없이 휩쓸려 갔다.

컨테이너 박스가 통째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떠다니는 회전의자를 타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회전의자를 타고 나무와 컨테이너 박스들과 함께 떠내려갔다.

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어 봤지만 회전의자는 다만 물결을 따라 흘러갈 뿐이었다.

회전의자는 정신없이 돌아 시선이 제멋대로 바뀌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두꺼운 울음이 장마처럼 쏟아졌다.

눈물과 빗물이 뒤범벅되었다.

회전의자를 타면서 엄마가 냈던 소리는 웃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소리를 내봤지만 내 귀에서조차 빗소리뿐이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멀리 라면 한 박스를 이고 올라오는 엄마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끝〉


전석순 춘천시 퇴계동


[신춘문예 단편소설]심사평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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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삶에서 우러나오는 유머와 페이소스

최종심에서는허남화의 ‘죽은닭고기요리법’과 권영란의 ‘극락조’ 전석순의 ‘회전의자’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당선작의 선정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는데 작품 의특징은 서로 확연히 구별되면서도 수준에서는큰차이가없었기때문이었다.

우선 ‘죽은닭고기 요리법’은 레시피라는 다소 이질적인 요소를 소설속 에 끌어들여 이야기의 근간으로 삼은 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극적으로 설정된 상황이 요리법의 제시와 서로 잘 어울리지못하여 설득력을 발휘하기에 부족했다.

‘극락조’는 전통적인 문법에충실한 작품이다. 과거의 가슴 뭉클한 사연을 이만큼 안정된 서술을 통해 절실하게풀어내는것은분명쉽지않은 일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성격과 일화들의 연결구조가 다소평면적이어서 이미 익숙해진 경험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수 없었다.

‘회전의자’는 무엇보다도 섬세한 문체와 세밀한 관찰이 인상적이었다. 재난을 당한 가족의 상황을 회전의자라는 모티브와 관련지어 유머와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솜씨도 높이 살만했다.

이야기의 진행에서 다소 균형이 흔들리고 초점이 흐릿한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소설이 장차 더 깊고 단단한 작품 세계의 초석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상국 최수철, 예심 : 김도연(소설가)


[신춘문예 단편소설]당선소감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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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믿어 들통나지 않게"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뭐가 그렇게 당당했을까.

생각해보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거짓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내 거짓말을 믿지 못하는 순간이 들통 나는 순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뻔뻔하게, 완벽한 거짓말을 상상했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나마저도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의 거짓말.

언젠가 앨범을 넘기다가 이건 내가 나오지도 않은 사진인데 왜 끼워두었냐고 하면 당신은 금방 나를 찾아낸다.

네가 거기 왜 없니, 하시면서 날 찾아낸다.

여기 세 번째로 있는 것도 너고, 저기에도 있는데 네가 왜 없니.

나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게 나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세탁소에 들르면 내 얼굴에 대뜸 다리미 스팀을 뿌리신다.

그건 당신이 날 사랑하는 방식이다.

내 과거를 문장으로 기억해주는 당신과 오랫동안 소통하길.

내가 당신이 날 사랑하는 방식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듯, 당신이 내가 거짓말을 하는 방식을 눈치 채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길 바란다.

어디서든 나를 찾아낼 수 있는 당신처럼, 나도 어딜 가든 당신을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내가 내 거짓말을 믿지 못하는 순간이 들통 나는 순간임을 잘 알고 있다.

△전석순 △1983 춘천출생 △강원고 졸,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2003 백마문학상, 2005 오월문학상, 2006 국원문학상 △2007 경희대 전국대학생문예공모전 소설부문 대상 


[신춘문예 당선작]시-소라의 집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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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 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쭈꾸미가 소라의 빈 집으로 스며든다 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 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김정임 경기도 용인시


[신춘문예 시]심사평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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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으로 정제된 단아한 멋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올라온 열일곱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권혁찬씨의 ‘노트북’ 외4편과 김정임씨의 ‘소라의집’ 외 4편이었다.

권혁찬씨의 작품들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능력이 있고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공을 들인 문체에서 만만치 않은 문학적 역량이 느껴진다.

선이 굵고 리듬에도 탄력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볼때 산문적으로 읽힌다.

시는 확산의 문법이 아니라 응축의 문법이고 생략의 문법이면서 여백의 문법이다.

언어를 최소화하는 과정 뒤에 남는 광채나는 보석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이 좀더 정제되고 표현의 광채를 획득하기 바란다.

김정임씨의 시는 단아하다 절제에서 우러나오는 응축의 힘이있고 활달한 어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감정의 과장없이 조심스럽게 망설이듯 전개되는 그의 시들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깊이 각인되는 예리한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독특함이자 매력이다.

당선작 ‘소라의집’에서확인 되듯이 노련한 장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인에게 요구되는 패기나 대담함 출렁거림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이영춘 최승호, 예심 : 김창균(시인)


[신춘문예 시]당선소감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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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얻은 언어의 새벽

오늘은 시가 내 안의 어둠을 말끔히 털어내며 내가 소망하는 경이로운 당선소식을 가지고 왔다.

갑자기 울컥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한 덩어리의 붉은 슬픔.

아마 중간 중간 너무 멀게 느껴져 무릎을 꺾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때의, 참담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예고 없이 경쾌하게 날아든 당선소식에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내 안에 깊숙이 숨겨진 상처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아직 흰 종이에 담아내지 못한 언어들이 탄력을 받게 될 것 같다.

용기와 힘을 얻었으니 채찍으로 알고 더 열심히 써 나가겠다.

부족한 글을 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시의 아름다운 문장에 처음 눈뜨게 해 주신 문효치 선생님, 시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보여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를 고민하는 나의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김정임 △1953 대구출생 △경북대 의대 간호학과 졸업 △2002 ‘미네르바’ 신인상 △2006 공무원문예대전 행자부장관상 수상 △서울 평화초 교사


 [신춘문예 당선작]동화-동강할미꽃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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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루 끝에 앉아 있습니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누워있습니다.

도시에서 문구점을 할 때만 해도 항상 바지런했는데, 동강에 이사 온 이후로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친하게 지내던 사람한테 사기를 당했답니다.

아버지는 배신감 때문에 걸핏하면 술을 마셨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했답니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어머니 얼굴이 달라진 건 들판이 연한 새싹을 돋을 무렵부터입니다.

오늘도 어머니는 아침 일찍 영철이네로 갔습니다.

부락의 부녀회장인 영철이 어머니와 농사일을 의논하고 마을축제 행사도 준비한답니다.

하지만 도영이는 무심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아버지의 병이 옮아온 것일까요.

모든 것이 다 시들합니다.

교실을 꽉 채우는 도회 학교와는 달리 이곳은 전교생이 11명입니다.

그중에 영철이도 끼어있습니다.

도영이 아버지는 영철이 아버지와 어릴 적 친구랍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영철이 아버지가 찾아와도 좀체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도영이도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랍니다.

쌀쌀한 요즘 날씨와 표정이 같았으니까요.

영철이가 대문 안으로 고개를 삐죽이 들이밉니다.

하지만 도영이는 못 본 척 합니다.

잠시 쭈뼛거리더니 영철이가 들어섭니다.

도영이가 슬쩍 건너다보니 제법 큼지막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습니다.

“꽃 사진 찍으러 가지 않을래?”

“날씨가 쌀쌀한데 무슨 꽃이 핀다고?”

“동강할미꽃 봉오리가 올라와 있어.”

도영이는 새침한 표정입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동강할미꽃 축제’를 벌인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던 터라 은근히 끌립니다.

그래도 도영이는 괜히 한 번 툭 튕겨봅니다.

“난 별로 관심 없다.”

그러자 영철이가 짐짓 뻐기는 투로 말합니다.

“동강할미꽃은 이곳 동강에만 피는데도!”

다정하게 말했으면 오죽 좋았을까요.

못이기는 척 따라가려고 했던 도영이는 팩 토라져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깟 산골에 피는 꽃이 별것이야.”

무안해진 영철이는 얼굴이 벌개져서 마당에 서 있습니다.

분이 덜 풀린 도영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칩니다.

“관심 없대두!”

영철이는 기껏 생각하고 삼촌에게 부탁해서 카메라를 얻어왔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요.

다음날, 도영이는 읽고 있던 동화책을 영철이 쪽으로 슬그머니 밀어줍니다.

도회 학교에서 한참 인기 있던 책입니다.

어제 힘없이 돌아서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카메라를 멘 영철이의 모습이 그럴싸해 보였거든요.

도회에서도 영철이가 메고 있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아이는 보지 못했답니다.

“오늘도 사진 찍으러 갈거니?”

도영이가 먼저 말을 건네자 영철이는 신이 났습니다.

학교 공부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삼촌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삼촌이 애지중지하는 카메라였지만 영철이에게만은 빌려줍니다.

영철이의 사진 감각은 삼촌도 무시할 수 없거든요.

영철이가 찾아오자, 이번에는 도영이도 못이기는 척하고 따라나섭니다.

도영이는 오늘 처음으로 동강 길을 걷습니다.

아버지가 모는 트럭을 타고 올 때는 깜깜한 밤이었거든요.

도영이의 집은 학교와 겨우 5분 거리입니다.

게다가 집에만 있었으니 산을 에둘러 흐르는 동강 길을 걸어본 적이 없을 밖에요.

걸어가는 내내 볕이 따뜻합니다.

강물이 푸른 것을 보니 하늘도 봄볕을 따라 냇가로 나들이를 왔나 봅니다.

도영이와 영철이가 걷는 모습을 뭉게구름이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외길도 나오고 2차선 길도 나옵니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걷습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깎아지른 암벽이 타원형으로 둘러쳐진 곳입니다.

암벽 바로 아래 길이 있고 그 옆으로 강물이 흐릅니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경치에 도영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이것이야.” 영철이가 가리킨 곳에 솜털이 보슬거리는 자주색 봉오리가 바위틈을 비집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크고 화려한 꽃을 상상한 도영이에게 작고 여린 꽃이 눈에 찰 리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 경치에 감탄사를 흘리던 도영이 입에서 실망의 말이 튀어나옵니다.

“에게게…….”

주위를 휘둘러보던 영철이가 이번에는 절벽 위쪽을 가리킵니다.

“저기 봐.

저것은 벌써 봉오리를 열기 시작했어.”

영철이가 들뜬 목소리로 이곳저곳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도영이는 시큰둥합니다.

영철이가 사진을 찍는 동안, 내내 강물만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왔답니다.

영철이 말이 정말이었습니다.

외지차량이 동강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마을 사람들은 힘을 모아 동강할미꽃 축제를 벌인답니다.

하지만 마을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도영이네 집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점심을 차리기 위해 들어온 어머니가 아버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여보, 당신도 구경 좀 하세요.”

“……”

“동강할미꽃을 구경하겠다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벌컥 화를 냅니다.

“꽃을 구경하라는 거야, 사람을 구경하라는 거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합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더 이상 권하지 않습니다.

뜨는 둥 마는 둥 점심을 먹고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가 불쌍해 보입니다.

아버지도 미안했던지 마루 끝에 앉아 큼큼 목소리만 가다듬고 있었답니다.

영철이가 찾아 온 것은 어머니가 영철이 집에 도착할 즈음입니다.

손에는 숙제 할 것이 들려있습니다.

“빨리 끝내고 가보자.” 어머니가 나간 뒤로 아버지는 계속 넋을 놓고 앉아있습니다.

그 모습이 안 되어 보였을까요.

영철이가 숙제를 하다말고 아버지에게 사진을 들이밉니다.

“아저씨.

이거 보세요.

지난번에 도영이하고 같이 가서 찍은 거예요.

전 사진 작가가 꿈이거든요.

동강할미꽃을 멋지게 찍는 사진작가가 될 거에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버지가 영철에게서 건네받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와, 다 끝났다!” 영철이가 두 팔을 번쩍 듭니다.

도영은 조금 전에 마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는 아버지 표정이 쓸쓸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꾸 아버지가 신경이 쓰여서 집에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도영이는 영철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습니다.

봄빛이 밖으로 나오라고 자꾸만 손짓하고 있었거든요.

며칠 사이에 햇살이 따사로워 겉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집니다.

행사장이 가까워오자 앞서가던 영철이가 도영이를 뒤돌아보며 씩 웃습니다.

“거봐!”

영철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동강할미꽃이 피어있는 암벽으로 가기 전, 공터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천막을 치고, 음식상을 차립니다.

드럼통에 숯불을 피워 고구마를 굽고, 떡메를 쳐서 인절미도 만듭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상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한쪽에는 동강할미꽃 사진을 전시합니다.

영철이가 도영이의 손을 잡아끌더니 자기가 찍은 것이라며 눈 속에 핀 동강할미꽃 사진을 가리킵니다.

봄을 시샘한 꽃샘추위가 동강할미꽃 주위에 눈을 소복이 내려놓았을 때 찍은 사진이랍니다.

다른 사진에 비해 선명하진 않지만 도영이의 눈에는 멋져 보입니다.

하얀색, 분홍색, 자주색으로 동강할미꽃 색이 달라서일까요, 아니면 사진마다 찍은 사람이 달라서일까요.

비슷비슷할 것 같은데도 사진 속에 있는 꽃마다 피어오르는 모양새가 달라 보입니다.

사진을 보고 난 뒤에는 인절미와 두부를 먹었습니다.

그것들 모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마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행사 끝에는 외지 사람들에게 동강할미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을 청년단이 직접 배양해서 재배에 성공한 모종이랍니다.

정성을 다해서 가꾼 꽃을 나누어주는 청년들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도영이는 오늘의 행사가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축제를 한다고?”

“이곳 동강의 농산물을 도회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야.”

“왜?”

도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영철이는 배시시 웃습니다.

“좋은 농산물이라는 것을 알리는 거지.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그래?”

“이렇게 가다보면 주문에 맞추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고 했어.

그래야 살기 힘들어서 떠나는 사람도 줄어들고, 다시 찾아온 사람도 잘 살게 되는 거라고.”

이 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동강할미꽃이 있는 암벽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앞서 온 영철이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 몇몇이 외지사람들에게 광고지를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영철이 아버지를 보며 도영이는 예전의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그때는 아버지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었답니다.

도영이가 고개를 푹 떨굽니다.

그러자 영철이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 삼촌도 직장을 다니다가 일 년 전에 들어왔을 때는 너희 아버지처럼 힘들어했어.

희망을 잃지 마.

아까 너희 엄마가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 봤잖아.”

영철이의 말을 듣고 나니 쓸쓸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집니다.

이곳 동강에 온 이후 처음으로 도영이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집니다.

하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자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가족나들이 온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띕니다.

모처럼 마을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꽃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일 정도입니다.

일부러 동강할미꽃을 찍으러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카메라도 굉장한 것들입니다.

도영이 팔뚝만한 것도 있습니다.

작은 꽃 앞에서 그보다 더 진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지에 흙이 묻어 더럽혀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절벽에 사다리를 기대어놓고 올라가서 찍는 사람도 있습니다.

멋지게 찍으려니 시간이 한참씩 걸립니다.

하지만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꽃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어젯밤엔 잠도 설쳤어요.

오늘 동강할미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어서 말이죠.”

“멀리서 온 보람이 있네요.

정말 멋진 꽃이에요.”

“그럼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곳만의 꽃인걸요.”

연신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지, 지난주에는 잔뜩 오므리고 있던 꽃봉오리가 햇살처럼 방싯거립니다.

영철이도 사람들 틈에서 누구 못지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도영이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러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시하게만 느껴지던 꽃들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겠다고 기어코 돋아나오는 힘겨운 노고 같은 것 말이지요.

그래서인지 고개를 푹 숙인 할미꽃과는 달리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른답니다.

영철이가 다가와 도영이에게 카메라를 내밉니다.

도영이도 마다하지 않고 영철이가 알려주는 대로 사진을 찍어봅니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니 동강할미꽃이 더욱 신비합니다.

암벽 곳곳에 돋아나와 솜털 보송보송한 봉오리로 피어오르는 동강할미꽃 이파리 하나하나, 꽃 수술 하나하나가 다 섬세합니다.

서툴지만 도영이도 사진작가가 된 느낌입니다.

그동안 움츠렸던 도영이 마음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때, 누구인가 도영이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습니다.

언제 온 것일까요.

돌아보니 아버지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동강할미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고향의 꽃조차 내가 잊고 있었구나.

동강할미꽃은 바위틈에서도 해마다 고운 꽃을 피워내는데 한 번 닥친 어려움조차 피하려고만 했어.”

도영의 그렁그렁한 눈망울 속에 동강할미꽃이 들어와 앉습니다.

동강의 물빛을 닮은 하늘을 보고 자라서 더없이 곱게 핀 꽃이랍니다. 〈끝〉

김인숙<필명 : 이수 서울시 송파구> 


[신춘문예 동화]당선소감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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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건진 내 쓰임새는 동화쓰기”

동화란 내게 기쁜 만남이었다.

산골의 어린 시절, 혼자 있을 때면 동화책 속에서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소공녀, 소공자, 빨간 머리 앤,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도 만났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그 배경들이 가능하진 않았을 테지만, 내겐 읽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그저 책 읽는 것이 좋아서 국문과를 들어갔더니, 글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내내 절망만 하고 졸업했다.

어쩌면 그 절망이 내게 글을 쓰라고 했던 것 같다.

‘이제 동화를 써도 되겠구나’하는 희망이 생겼다.

‘세상의 존재는 다 쓰임새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동화를 쓰는 마음의 근거로 삼고 싶은 말씀이다.

장소도 없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같이 공부했던 ‘우듬지’ 친구들과 기쁨을 같이하고 싶다.

안데르센을 존경한다고 말했을 때, 진지하게 받아주고 열심히 책을 날라다주었던 정우씨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그동안 많은 가르침을 주신 유재용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가르침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들이 많았을 텐데도 어수룩하고 부족한 글에 눈길을 주신 강원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진정한 동화인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김인숙(필명:이수) △1963 전북 진안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우듬지’ 문학동인 
 

[신춘문예 당선작]동시-자전거와 장갑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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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
학교서 돌아가는 길

힘껏 페달을 밟는다
촤르륵 감기는 길

발끝에 힘을 주어 바퀴를 감을수록
길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집은 점. 점. 점 가까워진다

지금쯤 엄마는 무얼 하실까
털실로 장갑을 뜨고 계시겠지

엄마가 만들어준 장갑을 끼면
내일부터 자전거 탈 때는
손 시리지 않겠지

손끝에 힘을 주어 장갑을 만들수록
털실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장갑은 점. 점. 점 만들어지겠지

자전거도 덩달아 신이 나는지
집으로 가는 길을 힘껏 감는다

신지영 서울시 금천구


[신춘문예 동시]심사평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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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야 놀자”

동시단에 새해가 떴다. 희망적이다. 그 새로운 시인의 작품은 신지영의 ‘자전거와 장갑’이다. 심사위원 둘의 마음을 꼭 붙잡는 당선작을 고르는데 이견이 없이 당선의 영광을 올렸다.

시를 풀어가는 솜씨가 여러 해 동안 습작의 노력이 엿보여 당선으로 올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바퀴를 감을수록/ 길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집은 점. 점. 점 가까워진다.” 엄마가 “장갑을 만들수록/ 털실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장갑은 점. 점. 점 만들어져” “자전거도 덩달아 신이 나” “집으로 가는 길을 힘껏 감는다”는 장면에서 동심도 덩달아 푸르게 살아 오르는 흥분된 감정과 설렘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와 엄마와 자전거 세 박자가 척척 호흡을 맞추어 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여기 새로운 시와 시인의 작품은 기존의 시 경향을 복귀 불능 상태로 추문화(醜聞化)시키기에 충분하다.

동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인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표출하기 바란다.

당선자 외에 참 아까운 시인의 작품도 많았다.

김민하의 ‘털실의 마음’도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으나 매끄럽지 못했다.

하지혜의 ‘숟가락 젓가락’도 논의의 대상이었으나 소품이었으며, 최일걸의 ‘고무줄놀이’는 산만했다.

지금 동시 문단에서는 새로운 동시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당선에 이르지 못한 많은 분도 꿈을 죽이지 말고 꼭 결실을 맺기 바란다.

그래야 동시의 본령(本領)이 더욱 높아지고 울울(鬱鬱)해질 것이다.

당선자는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이창건·민현숙, 예심:차재연(아동문학가)

[신춘문예 동시]당선소감
     
 (  2008-1-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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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나에게 친구입니다. 손가락에 꼽히게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매일같이놀고싶습니다. 매일 놀아 달라고 귀찮게 조르면 싫어 할 만도 한데 이 친구는 한번도 싫다고 한적이 없습니다.

부를 때 마다 놀아줍니다. 어떨 땐 신나게 어떨 땐 편하게 어떨 땐 힘차게 불만 한번 안하고 나와 놀아줍니다.

이런좋은 친구가 어디 있을까요?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을까요? 꾸준히 고민할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자연이나 이치를 보는 시선에 감동할 때가 자주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도 얻기 힘든 동심의 참신함, 순박함이 넘쳐나거든요. 이렇게 아이들에게 감동받기 바쁜 내가 아이들이 감동받는 동시를 쓸 수 있을까요? 꾸준히 노력할 문제입니다. 늘 부족한 자 손을 보살펴 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감사드리고 힘든 세월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 마음 넓은 동생 소영이, 언니네 가족, 금곡 이모부 내외, 최선의 배려를 해준 대현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힘들 때나 어려울 때 읽으면 누구나 마음편하게 격려를 얻을 수 있는 동시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지영 △1974 서울출생 △반포고 졸,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수학 △‘아동문학평론(2007 가을호)’신인문학상 당선


2008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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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08 경향 신춘문예]시 당선작- ‘페루’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40:02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2008 경향 신춘문예]시 심사평- 뛰고 달리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쾌감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39:54
 
 
심사위원 황인숙·최승호
모두 열두 분의 시가 본심에 올랐다. 그 가운데 김란 씨의 ‘자벌레’ 외 4편과 이제니 씨의 ‘검버섯’ 외 5편이 마지막으로 논의됐다.

김란 씨는 시를 안정감 있게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문체는 단정하고 간결하다. 쓸 데 없는 수사가 없다. 그런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약하다. 그래서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저 무난히 스쳐간다. “생식기도 성기도 아닌/ 비뇨기만 남았다던”(‘골똘한 화장’에서)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활달함이랄지 생기랄지가 모자라 보인다. 관념어의 잦은 사용과 리듬감 없이 늘어진 문장은 생동감의 걸림돌이다.

당선작으로 이제니 씨의 ‘페루’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거기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에서)

그의 시들은 대개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다. 그런데도 그 시들은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 생동하는 말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 이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더 힘차길 기대한다. 


[2008 경향 신춘문예]시 당선소감-이제니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39:58
 
 
 
- 보들레르 무덤에서 否定의 산책자를 얘기하다 -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회색빛 거리에서 완전한 이방인으로 사라지던 순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묘석 위엔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곳곳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승차권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불멸은 저주 받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시집은 내가 돈을 주고 산 최초의 책이자 강물 위에 던져버린 첫번째 책이라고 말하자 보들레르는 내가 자신의 시집을 산 일보다 버린 일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산책 혹은 배회를 일삼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未知와 否定의 정신을 지닌 아름다운 산책자들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다. 해가 지고 있었고 이제 정말 작별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답인 동시에 질문인 어떤 말을 했고 나 또한 질문인 동시에 대답인 어떤 말을 했고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음은 존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내게 도착한 시인이! 라는 이름의 가시 면류관 앞에서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미래의 글쓰기에 대한 단언은 늘 그렇듯 부질없는 짓이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현재의 순간 순간에 머무르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시공간 속을 산책하는 일은 오랜 버릇대로 지속될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살며 사랑하며 죽어가는 사람과 사물들을 나만의 낯선 눈으로 포착할 것이다.

어머니,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아버지, 저의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 타자기를 물려 받은 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화가이자 내 유일한 독자인 쌍둥이 언니 에니야, 언제나 사려 깊고도 날카롭게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손 잡고 함께 걸어가자. 내 동생 웅아 진아,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언어의 장엄함과 황폐함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어린 시절의 국어 선생님인 진대곤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대 그대들에게 사랑을 사랑을. 


[2008 경향 신춘문예]소설 심사평- 서사 없는 독백… 끝내 당선작 못내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40:29
 
 
심사위원 임철우·윤대녕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9편이었다.

9편의 작품을 여러 번에 걸쳐 정독하는 동안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단 이야기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 보이지 않았기에, 내심 우려와 함께 조금씩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소재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소설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서사의 절박함은 그만두고라도 거의 모든 작품이 인터넷 블로그 형식의 독백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어떻게든 당선작을 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선자들은 면밀히 작품을 재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나는 물의 흔적을 사랑한다’ ‘불쾌한 쾌락’ ‘달팽이껍데기’ 등 3편이었다. ‘달팽이껍데기’는 상처에 집착하는 두 인물을 등장시켜 의식이 분열돼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재를 다룸에 있어 요구되는 문장의 밀도와 서사의 연속성이 떨어져 시놉시스 같다는 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시간 논의 끝에 당선작 대신 가작을 내자는 의견이 오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응모자들의 의욕을 부추기자는 뜻이었다. 심사를 마친 선자들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전례를 따져 ‘당선작 없음’이란 결과도 신인 등용문 제도에 포함된 하나의 방식이자 표현일 수 있다는 데 애써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2008 경향 신춘문예]평론 당선작- 길위의 문학과 소설의 의무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40:18
 
- 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 -

1. 세상의 길

소설이 길의 문학으로 이야기되기 훨씬 이전에 오디세우스는 험난한 바닷길의 시련과 역경을 뚫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험의 여정을 통해 항해의 길이 곧 인생의 길이었음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 소설사는 염상섭이 ‘만세전’에 보았던 길, 이효석의 장돌뱅이가 걷던 길을 거쳐 ‘신작로’로 상징되는 식민지 시대를 지나 김승옥의 ‘무진기행’ 길,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로 이어지는 골격을 보여준다. 이들이 걸어온 길에서 시련극복과 근원적 장소로의 회귀, 성장 등의 의미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윤성희의 소설들은 길의 문학사가 지배해 온 이러한 의미의 관습을 위반하고 있다. 그의 소설들에서 길은, 떠나야만 하는 갈등 상황이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지 않으며,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에서는 해결, 타협 혹은 조화를 꿈꾸게 해야 하는 어떠한 강제적인 요소도 동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표제를 ‘길’로 삼고 있는 텍스트에서 잘 드러난다.

‘길’에서, 출근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버스 노선번호를 착각하여 다른 길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된다. 그러나 시간에 맞춰 출근을 못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서둘러 내리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걱정할 직원들은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회사 동료들과 문제가 있다거나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만큼 내적 갈등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보여주는 느긋함은 느닷없고 생소하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윤성희 소설에서 길잃음은 길잃음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연한 기회에 예상치 않았던 길로 들어서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비록 잘못 들어선 길이라 해도 그것은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하는 길(‘봉자네 분식집’, ‘길’)이 되며, 모든 길의 끝은 어디로든 열려 있게 된다.

윤성희의 소설들 속에서 가고 오는 길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것은 관습적으로 존재하는 시작과 끝, 시련과 극복 등의 인과론이 근거 없이 강요된 질서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그 남자의 책 198쪽’에서의 그녀도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소설의 이야기는 끝나버리며, ‘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생사의 갈림길은 내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길이 되기도 한다. 보물지도를 묻는 지점이 길의 시작과 끝을 모두 상징할 수 있는 유턴 지점으로 설정되는 것은 바로 이런 길의 유동성을 통해 삶의 숨길을 열어보기 위해서이다. 길의 소설사가 늘 길의 종착점으로 제시하고 싶었던 근원적 장소로서의 고향이 ‘나도 모르게 들르게 되는’(‘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지나가는 길의 한 갈래로 이야기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윤성희 소설이 만들고 있는 이러한 길의 의미는 소설 ‘길’의 마지막 장면에서 집약되고 있다. 어디에 있건 중앙광장으로 연결될 수 있고, 중앙광장은 ‘이제 막 출발을 기다리는 우주선’처럼 우리를 다른 세계로 연결해 줄 것이므로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이 대형 쇼핑몰을 형상화하면서 이 소설이 보여주고 싶었던 ‘길’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의 쌍둥이들처럼 ‘길을 걷는 우리만의 규칙과 질서’를 만들면서 우리만의 재미와 삶의 비밀, 즉 우리의 길을 만들어 나가면 된다.

2. 길 위의 사람들

길 잃을 염려 없는 대형 쇼핑몰을 닮은 ‘거기, 당신?’,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365일 행복한’ 쇼핑몰에서처럼 행복할까. 그러나 마땅히 행복해야 할 사람들은 텍스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텍스트 속 인물들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존재감과 특수성을 지니지 않는다. 사람들 속에서 늘 부딪치거나 밟히고 나서야 그 존재감을 겨우 인정받는 여자는 자신의 고유명사도 가지지 못한 채 W로 지칭되는가 하면(‘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이름 대신 ‘저기요’로 불리기도 한다(‘그남자의 책 198쪽’). 제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큰 일이 나지 않는 상황(‘길’)은,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가시적인 갈등은 무마시키겠지만 나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만다는 점에서 훨씬 더 문제적이다.

등장인물들의 비존재감은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관계 설정이 애초부터 불분명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은, 실상은 그 구성과 유지를 위해 얼마나 큰 수고와 희생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윤성희의 소설들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늘 가족 중 누군가가 죽거나 떠나고, 누군가는 실종되거나 버림받으며, 또 누군가는 아프다. 그러다보니 그 구성원들은 서로 제대로 이름을 부르거나 불리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확인받는 과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가족 밖의 관계도 제대로 만들어가지 못한다. 애인은 늘 떠나는 존재이고, 유괴로 맺어지는 유사 가족 관계는 비상식적이며(‘만년소년’), 어쩌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우연 속에서나 가능하다. 이러한 설정들이 실상은 우리 현실 속에서 얼마나 비일비재한 사건인가를 생각해 보면, 삶을 구성하는 요소 혹은 질서가 얼마쯤은 강제적 상상에 의해 지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우리는 강제된 혹은 강요된 그 상상에 의해, 그리고 그 상상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자식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한 여배우가 ‘무너진 가정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는 우울증 주부의 역’으로 유명해지면서 존재감을 확인받게 되는 모티프(‘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를 통해 아이러닉한 현실 통찰로 이어진다. 그 연장선상에서 ‘길’의 인간관계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다. 우연히 맺어진 다섯 이모와 나의 관계처럼 ‘허기진 표정’과 ‘추운’ 모습으로 함께 살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흩어지는 이들의 관계는 비단 문제적인 특정 집단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길 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 곳에도 끼울 데가 없는 나사(‘어린이 암상왕’)’에 비유하거나,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봉자네 분식집’)’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거기, 당신?’)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조는 심각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관계의 필연성과 영속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만, 길 위의 사람들은 이미 그러한 관계가 환상이었다는 것, 혹은 그 모든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소설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속하는 것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말로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직원들은 모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머리모양을 했다. 이 쇼핑몰에서 가장 예쁜 것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들이 아니라, 그걸 파는 직원들이었다. 365개의 상점에 두 세명씩 직원이 있다고 가정을 하면 거의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똑같이 웃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런 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천 명의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일을 하다니 참 아름다운 일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길’(p.142.)

익명의 비존재감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야기하는 이런 역설은 쇼핑을 마친 후 ‘혼자 쇼핑 온 사람들을 위한 밥집’에서 거울로 된 벽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밥을 먹이는 장난을 치는 장면 만큼이나 섬뜩하다. 도시 속의 유령 같은 존재로 산책자의 이미지를 탄생시킨 보들레르는, 산책자이면서 동시에 산책자의 관찰 대상이기도 한 도시인을 ‘분명한 개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한 유형의 정본 이상은 아닌’ 것으로 설명했었다. 보들레르의 이러한 통찰은 ‘아주 다양한 모습이지만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제시되는 개인은 극히 기발한 특이성들을 개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유형의 마법의 원을 깨뜨릴 수 없는 현대인의 고뇌를 증언해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윤성희의 소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보들레르가 그러한 인간의 모습들이 ‘지옥같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다름 아닌 ‘언제나 똑같은 것’의 환영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벤야민이 간파했듯이, 윤성희의 단편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길 위의 사람들은 ‘황야를 떠도는 이리’와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며 물신(物神)적 특성의 축소판 같은 세계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사람들, 혹은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사람을 보여준다. 기술(기계)세계에 맞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려 했던 근대 초기의 사적 개인들은 내면으로의 침잠과 사적 공간을 통해 자신의 사용가치(본질)를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교환가치로서의 세계가 (제2의)자연이 되어버린 곳에서는 그와 공존하는 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제 사적인 공간에서 고민하던 개인들은 아케이드의 진열 상품처럼 길 위로 나와 거기에서부터 환상의 공간에 이르는 길이 열리기를 꿈꾸게 된다. 이 길은 고대적 의미의 완전성과 총체성의 의미를 상실한 세계에서 새로운 환상에 이르는 길이 된다.

광장에 서면 모든 것이 부풀려졌다. 조그만 소리로 웃어도 광장은 이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어머니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이곳에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가로등이 상점들의 유리창에 여러 겹으로 반사되면서, 광장은 이제 막 출발을 기다리는 우주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 우주선 한가운데 있었다. 너도 내 목을 쳐다보고 있으면,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니? 나는 한 손으로 여자의 목을 만져 보았다. 정말로 두 손으로 여자의 목을 꽉 움켜잡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빗방울이 여자의 몸을 지웠다. 나는 점점 투명해지는 여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젠 집에 돌아가야지 내가 타고 온 버스 번호가 기억나질 않았다.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광장 바닥에 새겨진 문구처럼 이곳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길’(pp.154~155)

행복함의 끝에 맞물려 있는 죽음에의 충동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상실감에서 오는 우울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나는 ‘이곳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이 충동이 새로운 세계,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에너지가 될 것임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서

세상의 모든 길은 열려 있다는 메시지로 소설들이 지탱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이동과 배회가 전이시키는 내적인 삶의 공동화(空洞化)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별’이 갈 길을 일러주는 마법의 세계가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기억하는 일이 윤성희의 소설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공동화는 어떻게 새로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가. 서술방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보들레르는 아우라의 상실에서 우울이 시작된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손을 거친 것은 모두 빛을 잃’(‘길’)는다는 기억을 무감각하게 들려줄 수 있는 ‘나’에게서는 그러한 상실감을 초래하는 마법적 아우라가 깨어진 지 이미 오래다. 윤성희 소설에서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에게서 재구성되는 유년의 기억은 빛을 내는 시절로 과장 서술되지 않는다.

‘나’의 유년(‘길’)이, 대문에 붉은 깃발을 달아(점집) 둔 집주인(점쟁이)이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던 마법의 세계에 가깝기는 하다. 이 세계 속에서 어머니는 남자 구두를 현관에 놓아두는 것으로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꿈꿀 수 있다. 나의 미래는 붉은 깃발 아래 사는 시인(점쟁이)의 말 한마디에 의해 육상선수에서 음악가, 선생님, 법관이 될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나 이 마법의 세계에서도 가족들은 추워보이는 모습과 허기진 표정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떠나는 자들일 뿐이다.

과거형으로 말해지는 가족이었던 사람들과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피난처로서의 아우라를 상실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나를 신화적인 어머니가 있는 곳까지 이끌지 못한다. 각각의 기억과 물건들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그 기억과 물건을 추억, 감정, 약속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이미 그것은 그냥 물건(기억)이 아니라 상징이며 인생의 의미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기억과 물건들은 주관성을 통해 그 가치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억에 접근하는 기존의 방식이며,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에서 중고품 전문점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전문점에서는 물건마다 사연이 적혀 있는 꼬리표를 붙여 두고 내용에 따라 ‘기쁨의 세상, 믿거나 말거나 세상, 슬픔의 세상, 한숨의 세상’이라는 테마로 구분하여 물건을 배치한다. 그런데 이 매장 안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건마다 붙어 있는 기억이, 나와 세계 사이에서 인생의 의미를 매개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과대평가되고 가치가 확장되어 넓지 않은 매장의 통로를 막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성희 소설들은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기억과 의미 확장을 최소화하는 문체를 통해, 과대평가와 가치 확장을 제어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저만치 놓아두고 있는 까닭이다. 꼬리표를 달고 있는 중고 물건보다 쇼핑몰에 구비된 물건들이 더 매혹적이듯, 저만치 있는 기억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만큼 더 매혹적인 힘을 발휘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거부하면서 자기존재 가치를 확인하고(‘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손을 대는 것마다 빛을 읽게 만들며(‘길’), 자기 사랑을 찾아 집을 나가는(‘어린이 암산왕’) 존재들일 수 있다. 가족은, 행복을 보장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부담과 짐을 지우는 관계(‘고독의 의무’,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일 수도 있다. 우리의 유년기는 누군가에게 도둑맞았던 시절일지도 모르며(‘만년소년’), 혹은 단편적인 한 장면, 잘못 기억된 한 장면으로 앞뒤를 재구성하게 되는(‘봉자네 분식집’) 옛날 본 영화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윤성희 소설에서 기억의 모티프들이 건조하고 냉혹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기억들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유년기로 표상되는 과거의 기억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자연과 가장 닮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자연 그대로를 내면화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는 어머니의 자궁조차도 더 이상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 소설은 그것을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여덟 달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거기, 당신?’)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고향이,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한 번은…나도 모르게’ 들를 수 있는 곳(‘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으로 이야기되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 당신?’에서 찾아야 하는 의미는 이런 것들이다.

4. 시찌프스의 웃음

어머니와 고향에도 부풀려진 환상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들이 비극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화자가 유지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이 화자는 우리의 삶이 의미를 위해 치르는 대가가 얼마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 문제 의식을 소설의 중심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그것의 무게는 길의 문학사가 만들어 온 성장과 회귀 그리고 행복의 지평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시찌프스적인 이 밀어올리기의 반복 행위에 유머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고통스러운 형벌이 아니라 단순하고 유치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 유머는, 목적과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적의와 경멸 같은 것도 통제하는 화자의 태도로 가능하다. 즉,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은 쌍둥이 자매가 오갈 데 없는 마을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는데, 연로해지는 할머니의 음식이 맛이 없어지자 밥 대신 우유를 먹었고, 하루에 1리터씩 마셨더니 키가 쑥쑥 자랐다(‘유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만년소년’)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윤성희의 소설을 지배하는 삶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

맛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할머니와 그 죽음을 마시고 키를 키우는 것처럼 되어가는 이 고통스러운 삶의 순간이 어떻게 유머로 전환될 수 있는가. 화자는 인간사의 하찮고 절망스러움을 바라보는 시선에 감상적인 태도를 개입시키지 않는다. 연민의 대상을 보여주지만 그들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연민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자주 우는 동생을 위해 코미디언을 흉내내기 시작했다는 나의 고백은(‘고독의 의무’) 가족들 사이를 잠식해 가는 불안과 침통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동생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는 언제나 오락부장을 했다’는 이야기로 우리의 주의를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괴로운 영향에 맞서는 강인함으로서의 이러한 유머를 성숙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윤성희의 소설이 유년기(과거의 기억)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향수나 동경의 낭만적 분위기와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성숙과 유머에 연루된 화자의 서술태도에 기인한다. 화자는 일인칭 ‘나’로 지칭되는 경우에도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는다. 과장되거나 과대평가되지 않은 화자 ‘나’의 이야기는 아케이드에 놓여 있는 물건처럼 개인적 사연과 감정이 억제되어 있다. 화자는 ‘나는 이런 일들로 괴로움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커(혹은 괜찮아)’라는 태도로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현재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어른만이 어린 시절의 일들을 유머러스하게 처리할 수 있고,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 시절에 느끼는 괴로운 영향들에 대해 미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소설이 고통스럽고 참담한 기억에 유머를 작동시킨 것은 어른이 된 화자를 강조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는 왜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소설의 발생 시점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화자는 행복과 완성을 동경해 온 길의 문학사(소설사)적 체험을 돌아보는 어른의 입장에서 자기 혁신을 해야 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과거의 소설사가 길의 체험을 통해 소설 내부의 인물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과 달리, 돌아보는 위치에 있는 화자는 스토리 속에 개입하지 않는다. 화자의 성숙함과 유머는 더 이상 스토리 내부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밖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스토리 속 인물의 상황이 파괴적일수록, 그리고 더 참담하고 비참할수록 화자의 통제력과 성숙, 유머는 더욱 돋보이게 된다.

5. 길 위의 문학, 소설의 의무

스토리 내부를 바라보는 화자에 우위를 두는 작가의 선택이 현실을 수용하는 의식의 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현실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이었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중요하다. 새로운 세계에 대응하는 새로운 소설 양식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소설은, 유머러스한 태도를 소설 전개 방식에 도입함으로써 갈등 상황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을 위한 조화와 타협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은 삶의 고통과 고독은 인간의 의무이므로 충분히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삶을 거역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자기 성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윤성희의 소설이 기존의 소설사가 만들어 온 행복의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자, 윤성희 소설만의 차별화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효과적으로 배치되고 있는 쌍둥이 모티프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즉 서로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서로들로 인해 삶의 짐을 실감하게 되는 쌍생아, 둘 중 하나가 사라져도(죽음) 남은 한 쪽이 평생 나머지 한 쪽을 업고 가야 하는 숙명은 비단 쌍둥이들에게만 지워진 삶의 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이성을 통해 자기를 타자화시킬 수 있었던 때부터 또다른 나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인간-존재들은 언제나 정신적 쌍생아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보여주는 성숙한 유머는 바로 이러한 삶에 대응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데카르트 이후 헤겔로 대표되는 이성주의 시대는 정신의 무한증식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의 자기완성을 지향해 왔다. 이성주의 시대를 지지해온, 언제나 미완인 정신들은 그 땅 위에서 자라난 몸들로 이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이야기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에서, 한없이 깊어지고 분열되는 내면에의 집착을 대신해, 윤성희의 소설은 관습화된 길의 의미를 성숙하게 위반하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식은 소설 내부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소설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서사문학이 그 존재방식을 통해 세계를 담아낸다고 할 때 윤성희의 소설은 정신적 충만감으로서의 행복의 환상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그동안 꿈을 위해 치른 대가가 얼마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성숙한 웃음으로 역설하고 있다.

길의 문학사가 유포해 왔던 화해와 타협, 조화와 안정 등의 종합으로서의 행복의 이미지가 윤성희의 소설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의 무의미나 비극적 세계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윤성희 소설의 가치는 또 다른 행복의 길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 상실 그 자체가 현실임을 일깨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소설은 행복의 추구에 익숙해진 소설문법을 낯설게 만든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현실을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면서, 우리 시대에서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세계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2008 경향 신춘문예]평론 심사평- 한국소설 변동 포착한 잠재력 돋보여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40:22
 
 
심사위원 권오룡·황종연

평론부문에 응모된 작품은 총 31편. 유례없이 많은 편수다. 그런데 아쉽게도 비평의 천재를 발견하는 기쁨은 얻지 못했다. 평론이라는 장르, 비평이라는 행위를 둘러싼 기존의 관행을 대체로 답습하고 있는 글들이었다. 대상 작가와 작품의 어떤 측면에 대해 해설하거나 논평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신종 철학 어휘를 빌리고 있으나 실상은 낡은 관념의 변장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하위주체의 자르거나 잘린 혀’는 부당하게 홀대된 김원일의 신작에 대한 착안이라는 면에서 눈길을 끌었으나 이론 학습이 부족하고 작품 해석이 평면적이다. ‘인간의 길, 자본에 맞서는 세 가지 방식’은 자기 나름의 주장을 가지고 있지만 들뢰즈의 어휘를 포함한 추상적 어휘들과 대상 작품의 언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주의가 소홀한 데다 논조가 거칠어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야기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한유주 소설에 대한 공감과 산뜻한 문체가 돋보였으나 그 소설 메시지에 대한 유순한 주해 이상이 되지 못했다.

‘길 위의 문학과 소설의 의무’는 윤성희 소설에 대한 논평으로서는 내용이 다소 빈약한 듯한 반면, 그 소설의 위치를 현대의 경험과 소설의 맥락 속에 명확하게 정해주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한국소설 내부의 변동에 대해 예민하고 아울러 그것을 조리 있게 서술할 언어를 갖춘 비평가의 잠재력이 느껴져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을 바란다. 


[2008 경향 신춘문예]평론 당선소감- 이은주
입력: 2007년 12월 31일 16:40:43
 
 
- 아버지, 이제야 두번 말문이 트입니다 -

말이 늦어 온 가족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조카가 이제 말문이 열려 “꼬모(고모), 꼬모” 합니다. 아버지 떠나시던 그 해에 우리에게 왔으니 3년 만에 입을 연 셈이지요. 그 꼬맹이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그래서 가슴이 울렁일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걸음마를 시작하고 처음 아빠 소리를 하고 처음 노래 부르는 저를 이렇게, 이렇게 지켜보셨겠지요. 저도, 아버지에게 가슴 벅찬 그런 딸이었겠지요.

그 입 무거운 녀석이 요즘 전화를 해서 “꼬모가 좋아요”,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마치 뜻을 아는 것처럼 흉내냅니다. 저는 할 말을 잃고 말지요. 그리고 한참 동안 가슴 한 쪽이 뻐근해집니다. 그 말, 서른이 훨씬 넘도록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그런 말….

참 바보 같은 제가 이제 새로운 말하기,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마음 속에 눌러 두었던 말, 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주신 황종연 선생님, 권오룡 선생님 고맙습니다. 늘 관심과 격려로 용기를 주시는 김현숙 선생님, 김현자 선생님, 정우숙 선생님, 김미현 선생님, 엄창섭 선생님, 이충우 선생님, 황루시 선생님, 박성종 선생님, 박헌호 선생님, 오문석 선생님, 그리고 이동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이은주 ▲1971년 강릉 출생 ▲이화여대 국문학 박사(논문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양식 연구) ▲현재 이화여대 강사 



[2008 경향 신춘문예]대중문화평론 당선작-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회귀하라
입력: 2008년 01월 01일 17:22:37
 
- ‘웰컴 투 동막골’(2005) 새롭게 읽기 -
 
 
1. 산주검의 환몽

푸르디푸르게 펼쳐져 있는 풀밭을 배경으로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일(강혜정)이 티 없이 맑게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부감(俯瞰)되는 가운데, 돌연 급강하해오는 비행기가 나타난다. 추락의 위기에 직면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는 조종사 닐 스미스(스티브 태슐러)의 시야에 문득 조종석 정면을 날고 있는 나비 한 마리가 들어온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시퀀스에서 유독 슬로 모션으로 처리된 ‘웰컴 투 동막골’의 이 인상 깊은 도입부는 여타의 외부인들, 리수화(정재영), 장영희(임하룡), 서택기(류덕환) 등의 낙오한 인민군, 탈영한 국군 장교 표현철(신하균)과 위생병 문상상(서재경) 등과 마찬가지로 스미스 역시 동막골이라는 심산유곡의 무릉도원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나비의 영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이는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즉 내가 꿈속의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현실이라는 꿈속의 내가 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물아일체의 시원(始原)에 그들 모두가 진입했음을 알리는 알레고리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처럼 막 살아라”라고 하는 동(童)막골이라는 지명 및 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일의 존재는 다분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무릉도원의 환몽(幻夢) 속으로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동막골로 들어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리수화 일행은 국군의 일방적인 학살 및 추적을 피해 깎아지른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도주하다 동료 하나가 실족하여 떨어져 죽는 사고를 겪는다. 또한 탈영한 국군 장교 표현철과 위생병 문상상의 조우 역시 기묘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본대로부터 이탈하여 도주했던 문상상이 처음으로 주저앉은 장소 곁에는 자기의 목울대에 총부리를 겨누고 자살을 기도하는 표현철이 있었다. 비록 리수화 일행이 겪었던 고난에 비할 바 아니지만, 두 사람 또한 동막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위기(계기)를 경유해야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스미스 역시 비행기 추락이라는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리수화와 표현철, 스미스, 누구를 막론하고 외지인이 동막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막골 주민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종국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 또한 동막골을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동막골은 이처럼 죽음을 감수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그리고 모두에게 반드시 죽음을 선사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그들 모두는 동막골로 들어왔던 그 시점에 이미 죽었던 것은 아닐까. 앞서 그들이 진입했다고 하는 무릉도원의 세계, 그리고 상상계란 주체(subject)로서는 결코 들어설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어떤 이유로 죽음을 유예받았을 뿐이다. 동막골이라는 유토피아란 말하자면 실제 죽음이 유예된 산주검(the living dead)이 꾸고 있는 환몽일 터이다. 한 폭의 동양화 혹은 원색의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동막골의 지극히 아름다운 풍경은 그러나 주체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외려 서늘한 것이다. 리수화 일행이 절벽에 매달려 도주하는 신은 특히 시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동료가 실족하는 것은 “이 짝으로 가면 살기는 사는 거외까?”라는 장영희의 다급한 질문에 리수화가 “걱정 말라. 난 어떤 순간에도 동지들을…”이라며 장담하는 순간이다. 추락하는 그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카메라는 먼 산이 운무에 휩싸인 아름다운 모습을 원경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쇼트에서 그는 돌바닥에 떨어져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것은 땅에 떨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음향효과로 처리되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신의 경우, 선경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이란, 도무지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선경(仙境)을 연상시키도록 연출된 미장센 속에 매장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개인의 죽음과 선경의 아름다움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시퀀스 자체의 형식이 시사하고 있는 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데카르트의 ‘신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동막골은 유토피아의 판타지가 구현된 공간이다. 한국전쟁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환란 와중에도 유독 동막골만은 전쟁의 포화로부터 격리되어 평온하고 풍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낙원의 이미지는 표현철과 문상상이 마을로 처음 들어오는 시퀀스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벙그러니 웃고 있는 하회탈 모양의 등이 배열된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평화롭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과 나무 밑에서 한담을 나누는 촌로, 바구니를 들고 있는 아낙네부터 그네를 뛰고 있는 처녀애들의 모습 등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것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적인 고향의 정경, 그리고 한민족의 훼손되지 않은 시원적 장소의 이미지로 연출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의 중추에 ‘먹을 것’이라는 생존의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생존에 필요한 구체적인 물질을 중시하는 판타지란 상당히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막골의 주민들은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환영인사를 그들 나름의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뭐를 좀 먹었어요?”라는 말이다.

이것은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후의에 해당한다. 리수화 일행과 표현철 일행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그 뭐이나, 그, 벌통 옆에 감자밭 있잖아요. 새로 심군 데. 그 밭 초입부터 멧돼지가 길을 쫘악 내버렸으요”라는 전언과 이로 인해 한 계절을 굶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고착되어 있다. 총과 수류탄을 한갓 ‘작대기’와 ‘쇳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인민군과 국군 일행의 대립은 조금 부아가 많이 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촌장의 어머니가 리수화의 호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변소로 향하는 이어지는 시퀀스는 대단히 시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먹고 배설하는 일 앞에 그들의 대립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된다.

후에 리수화 및 표현철 일행이 마을에 남게 되는 계기도 따지고 보면 수류탄으로 폭발시킨 그들의 ‘먹을 것’, 즉 곳간의 양식을 벌충하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거, 기리니까니, 고함 한번 디르디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거,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와 같은 리수화의 계면쩍은 질문에 대해 “뭐를 마이 멕여야지, 뭐.”라고 너무도 간단히 대답해 버리는 촌장의 말은 이들에게 먹는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컨대 동막골 주민들은 먹을 것을 먹고 배설할 것을 배설하는 신체로 한정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의 재치 넘치는 유머는 대체로 리수화나 표현철 일행에 대한 동막골 주민이라는 신체의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까 생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만이 남아 있는 소위 자연 그 자체로 남아 있는 원초적인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물아일체의 상태를 형언했던 형식은 알레고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리얼리즘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한편 밤낮을 잊고 격렬하게 서로를 적대하던 리수화 일행 대 표현철, 문상상 간 대립구도가 잠정적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쏟아지는 잠의 유혹에 굴복하면서부터이다. 또한 잠에서 깨어난 그들 모두의 대립을 중재하는 것도 그들 앞에 놓인 ‘먹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수화, 장영희, 서택기와 표현철, 문상상, 그리고 닐 스미스를 포함한 모두가 갈등관계를 청산하게 된 계기는 마을의 식량을 축내고 동구와 스미스, 여일을 습격하는 멧돼지를 합심하여 사냥하고 또한 나누어 먹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전혀 인간과 근본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이자, 어떤 동일성도 발견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적 의미의 ‘타자’에 부합하는 존재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멧돼지는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宮岐駿)의 ‘원령공주(もののけ姬)’(1997)에서 멧돼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분노한 재앙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아시타카가 재앙신을 죽이고 저주를 받아 마을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는 것과 달리, 표현철 일행과 리수화 일행, 그리고 스미스는 멧돼지를 죽이고 나서 비로소 동막골에 함께 머물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멧돼지를 합심하여 처치하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는 과정에 참여하는 이는 모두 외지인이다. 그것은 서로의 장벽을 허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외부에서 그야말로 시의적절하게 출현한 멧돼지, 즉 타자라는 희생양이 오직 그들에게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 먹고 또 그 다음날 리수화와 표현철이 서로 마주 보며 배설하면서 암묵적인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존재하는 동막골 주민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말하자면 그러한 제의에 참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외지인들이 ‘뭐를 좀 먹’는 동막골 주민, 즉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결국 퇴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동막골의 이름이 의미하듯이 이것은 아이들처럼 막 사는 것이다. 먹고 배설하는 것으로 족한 존재, 즉 유아로의 퇴행. 이것이 동막골의 지상명령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 마을에 평화롭게 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퇴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계에서 주객의 분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민족의 시원이자 순수라고 명명될 수 있다면 그러한 명명은 역설적 의미에서 외려 정확한 것이다. 피아의 분별이 없는 물아일체의 단계, 이질성의 존재 자체가 봉쇄된다는 점에서 그처럼 순수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러한 의미에서 동막골의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순수의 단계에서 자족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시민인 동시에 자기 마을을 세계의 전부로 알고 있는 동굴의 수인과도 같은 존재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찍이 일본의 비평가 마에다 아이는 ‘감옥의 유토피아’라는 글의 서두에서 유토피아와 감옥이 역사적으로 서로 유비의 관계를 가지고 형성된 것임을 논증한 바 있지만, 그러한 의미에서 동막골은 민족의 시원, 그 유토피아적 형상의 미니어처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먹고 배설하는 신체를 수감하고 있는 감옥이며 또한 플라톤의 동굴과도 같은 장소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 자신의 말처럼 주민들은 동막골 바깥이나 산 아래에는 거의 나서려 들지 않는다. 이러한 동굴의 수인으로서의 무지는 그러나 피아의 분별이 없는, 단지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서의 순진무구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동막골은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함께 먹고 배설하는 무구한 신체로 남아 자기의 세계에 고립된 채, 스스로의 환상을 만끽할 것을 모든 이에게 촉구하는 장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막골 주민의 형상은 특히 데카르트가 정신과 별개의 기계로서 간주했던 ‘신체’의 그것과 흡사하다.


 
3. 부재하는 언어

리수화 일행이 여일과 최초로 조우했던 장면을 떠올려 보자. 피곤에 지쳐 바위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던 일행 곁으로 돌연 하얀 그림자가 “휙 하고 지나간”다. 인기척을 느낀 그들이 깨어나 주위를 경계하는 가운데 리수화가 돌아서서 총을 겨누는 전경으로부터 문득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여일이다. 그리고 머리에 꽃을 꽂은 그녀가 그들에게 던지는 첫 말은 그 유명한 “뱀이 나와”이다. 이와 같은 짤막한 시퀀스는, 위험을 감지한 곳이 아니라 전혀 뜻밖의 장소로부터 위험이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호러무비의 클리셰(cliche)에 대한 패러디 혹은 일종의 메타언어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호러무비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리수화 일행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묘한 긴장감이 어려 있다.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 쇼트에서 뱀이, 아니 뱀 같은 것이 떨어져 순간적으로 장영희의 어깨를 스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불안을 자극하여 리수화 일행으로 하여금 스스로 모든 탄환을 소진하도록 하는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호러무비에서 빌려온 이와 같은 일련의 장면이 유머러스하다는 것은 뭔가 기묘하지 않은가. 물론 강혜정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돋보이는 부분이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유머는 근본적으로 리수화 일행과 여일 사이의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 혹은 그로 인해 어긋나고 있는 의사소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여일이 “이래 이래 손을 빨리 막 휘저으믄, 다리도 빨라지미. 다리가 빨라지믄, 팔은 더 빨라지미. 저, 따이 뒤로 막 지나가미. 난, 참, 빨라.”라는 말로 ‘자기가 빨리 달린다’라는 의미를 표현할 때, 리수화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상식과 예상을 벗어나는 이러한 재치어린 문답에서 바로 유머가 발생한다고 할 때, 이러한 상황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장영희의 “꽃 꽂았습네다.”라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달리다’나 ‘미치다’와 같은 개념어들이 감각적 재현에 근거한 즉물적인 언어로 전혀 ‘낯설게 되어(defamiliarize)’ 있다는 것이다. 이는 “뭐를 좀 먹었어요?”와 같이 욕구를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데 적합하며 또 소용되는 것으로 동막골의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이념적 언어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러므로 동막골 주민들이 혈연을 공유하는(공유한다고 믿어지는) 한 민족이 양편으로 나뉘어 상쟁하고 있다고 하는 한국전쟁이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이질적인 두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통불능 혹은 미묘한 불협화음, 이것이 바로 ‘웰컴 투 동막골’ 전반부의 유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팝콘의 강설(降雪), 멧돼지 사냥 등과 같은 인상적인 에피소드에서는 심지어 언어가 완전히 소거되어 있다. 애니메이션과 같은 효과를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된 판타지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이 두 장면이야말로 알다시피 외지인들이 화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고수하는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데 말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 이념을 앞세우는 언어는 필경 분쟁을 조장하게 마련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화해란 영화의 여러 스태프가 대단히 공들여 세련한 미장센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은 결국 수면과 사냥(멧돼지 고기를 나누어 먹게 되는)이라는 욕구의 만족을 위한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의 백미에 해당하는, 이 두 차례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적 시퀀스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간직한 인간 간의 화해를 이른바 ‘미적 조화’와 유비의 관계에 놓고 있다.

재삼 강조하지만 여기에서 언어란 불필요하며 또한 부재하다. 노자(老子)의 표현대로라면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인 것이다. 언어로 환원 불가능한 道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아포리즘에 비추어 볼 때, ‘웰컴 투 동막골’의 화해의 판타지 또한 말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천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그것은 동막골 주민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유기적 일체로서의 민족/민중의 순수성이 회복 가능하다는 믿음이며, 그것이 오로지 미적인 방식으로만 표상될 수 있다는 신념이다. 특히 민족/민중이라는 선험적 범주 하에 모든 개별자들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평화롭게 합일되는 경지를 지향하는 데 있어서 언어를 배제하고 ‘미(美)’라는 통합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개념에 따라 판정되어서는 안되고, 개념 일반의 능력(오성)과 합치하기 위한 구상력의 합목적적 조화에 따라 판정되지 않으면 안되므로, 누구에게나 만족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할 미적 예술에 있어서 그러한 미감적인, 그러나 무조건적인 합목적성의 주관적 규칙이 될 수 있는 것은, 규칙이나 준칙이 아니라 주관 속에 있는 한갓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규칙이나 개념 하에서 포착될 수는 없는 것이요, 다시 말하면 주관의 모든 능력의 초감성적 기체(어떠한 오성개념도 도달하지 못하는)이다. 따라서 이것과의 관련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인식능력을 조화시키는 것이 곧 우리의 자연적 본성의 가상적인 것에 의하여 과해진 최종의 목적인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주관적 원리도 지정할 수 없는 이러한 미감적 합목적성의 근저에 하나의 주관적인 그러나 보편타당한 선천적 원리가 있는 것도 이렇게 해서만 가능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칸트에게 있어서 미란 개념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고 보편적인 규칙도 없으며 따라서 논의될 수 없는 것이다. 비개념, 무규정, 감각에 기초한 미에 대한 의미 부여와 관련하여 테리 이글턴 같은 비평가는 ‘미적인 것의 이데올로기’에서 “칸트의 입장에서 보면 미적 판단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의견의 일치에 도달하고, 어떤 현상이 숭고하다 또는 아름답다는 데 동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민한 공감각에 의해 느낌이 연결되어 있는 주체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진귀한 형태의 상호주관성을 행사하게” 될 뿐만 아니라 ‘미적인 것(the aesthetic)’이 우리를 정서적, 직관적 차원에서 법의 모든 권위와 결합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대 일반을 비판하고 있으면서 주체 간 감각에 기초한 상호주관성의 결합에 의한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는데, 사실 국민국가야말로 그것의 가장 실제적인 형태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낭만적 열정에 기초한 내셔널리즘의 발흥과 고양이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근대국가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요컨대 미적 조화란 국민국가의 결집을 도모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식에 해당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인종과 세대, 성별, 계급적 이해관계 등을 모두 초월하는 정서적 연대감에 근거한 국민의 아이덴티티를 생성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결집을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웰컴 투 동막골’의 화해의 판타지로 돌아가 보자. 요컨대 이 장면들은 그러한 미적 조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들이 특히 이 장면들을,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 전체를 비현실의 판타지로 연출해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실사영화임에도 애니메이션적인, 대단히 아름답고 색채가 풍부한 환상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동막골의 평온한 일상 및 각종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곳의 수호를 위한 기투에 이르기까지의 내러티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회복해야 할 민족의 가치를 재삼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그 화합은 다분히 인위적인 미적 조형의 의장을 통해서 한층 강조되고 있다. 요컨대 민족의 화합이란 본래 ‘웰컴 투 동막골’의 조경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미적 형식에서 근본적으로 ‘차이의 체계(system of differences)’인 언어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가 말한 오성으로서의 주관성을 선천적인(a priori) 능력, 즉 언어적인 능력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변별적인 자질을 지닌 기표 간 차이와 대립을 통해 형성된 랑그라는 보편적 체계에 준거한 규칙을 공유하게 되면서 개인 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진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에 나타나 있는 화해의 과정이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은 이미 앞서 누차 언급한 바 있다. 비평가 안시환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그것은 전적으로 동막골이라는 공간이 마련해 놓은 우연 혹은 상황에 의한 것이며 언제나 미적 조화의 상태로 유비되면서 관객에게 ‘그럴 듯한 것(verisimilitude)’으로 받아들여진다. 도리어 차이의 체계로서 언어를 초월하며, 추상적인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도(道)’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계 미국인 문학연구자인 짱 롱시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변별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도’와 로고스가 기실 의미와 표현 간 해소 불가능한 위계를 전제한 상태에서 의미의 우위를 내세우는 전통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유사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의 화해의 판타지에서 언어가 소거되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위계에 입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도’가 말이 아니라 미를 통해서만 감각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막골을 그러한 공간으로 만들어낸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이를테면 수류탄이 터져 곳간의 모든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 눈처럼 내리는 더없이 아름다운 동화적인 시퀀스는 사실 인민군 대 국군의 극한적인 대립이 소위 먹을 것이 내리는 축복으로 전이된 예기치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팝콘의 강설 아래 인민군과 국군 양측이 모두 잠에 빠져들면서 대립은 사실상 종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종결은 판타지에 입각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전적으로 어떤 초월적인 권능에 의지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 민족의 엑소더스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굶주리던 유대 민족에게 만나를 내리는 것은 신의 권능을 알리고 그들을 무사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신을 거역하고 모세의 영도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이러한 기적을 통해 마침내 야훼에게 귀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팝콘이 내리는 기적이란 다름 아닌 외지인들에게 동족 간의 상잔을 중단하고 동막골이라는 민족의 가나안에 정주하도록 하는 어떤 지상명령이 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동막골은 신체의 본능과 신의 권능만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천국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마련한 이와 같은 조화의 질서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곧 분쟁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 그저 먹을 것에 충실한 입이라는 기관의 본능을 수락하고 그것을 부여한 신의 권능에 순응하면 되는 것이다. 팝콘의 강설, 멧돼지 사냥의 시퀀스는 바로 외지인들이 그러한 원리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배설하는 욕구만이 남아 있는, 심지어 커뮤니케이션의 언어조차도 망각해 버린 이들을 가리켜 과연 온전히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1968)으로부터 최근의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 시리즈로 이어지는 계보의 영화에 등장하는 산주검들은 대개 이미 죽어버린 상태에서 단지 식욕만이 남아 작동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개체라고 할 수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은 이들 영화와 젼혀 다른 스타일을 취하고 있지만,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적 질서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욕구만 보존된 채 작동하고 있는 신체를 주요하게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만은 기묘한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슬로베니아의 비평가 미란 보조비치는 유충에서 나비로 변태하는 과정에서 소생과 부활의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는 유서 깊은 서구의 철학적 전통을 지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웰컴 투 동막골’에서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는 나비의 이미지는 이러한 통찰과 관련하여 특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조비치에게 있어서 산주검이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간주하고 있는 것처럼 “외적 원인에 의해 지배되어 자기-파괴적으로 행위하지만 결코 자살 행위 자체를 저지르지는 않는” 존재를 가리킨다. 물론 나비로의 소생을 전제하는 유충과 라이프니츠가 요구했던 것처럼 죽은 뒤에도 살아남을 피조물, 산주검의 형상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례 논증한 것처럼 동막골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모두 외적 원인(동막골이 마련하는 우연과 상황)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면서도 죽지 않은 상태(욕구는 남아 있는)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보조비치가 정의한 산주검의 형상과 흡사하다. 다만 엔딩 신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진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들은 나비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검을 덮은 하얀 눈 무덤 위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것은 야훼와 같은 초월적 존재이다. 이미 죽었으면서도 죽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하는 존재 또한 그러한 신이다. 말하자면 동막골이라는 공간을 보존하고 또 초월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그들은 죽지 못하는 것이다. 상황과 우연이라는 초월적이며 또한 필연적인 자장이 동막골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따라서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훼는 본래 유대 민족의 유일신이다. 유대 민족에게 내려진 신의 은총은 곧 가나안 땅에 선주하고 있던 이민족에게는 곧 재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듯이, 동막골은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해 배타적인 공간이다. 예컨대 표현철 일행과 리수화 일행을 환영했던 나비라는 존재는 스미스의 추락하는 비행기의 프로펠러에 휘말려 들어가 찢겨지거나 공수되는 연합군을 습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혈연적으로 이종인 스미스가 결코 동막골 주민이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의 언어가 유일하게 요구되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실제로 스미스가 동막골의 주민들과 친해졌던 것은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주는 호명의 과정을 겪으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스미스와의 소통은 종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작 그의 커다란 체구에 맞는 옷은 떠나기 직전에 만들어지며, 스미스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은 리수화와 표현철을 포함한 외지인들이 동막골을 떠나게 되는 이유로 작용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는 다섯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다. 폭격을 근본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그러니까 동막골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폭격이라는 전쟁과 학살의 원인이 어디까지나 스미스와 같은 타자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막골의 주민이나 표현철, 리수화 일행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위치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동막골을 수호할 자격을 지닌 것은 오직 혈연적으로 동질적인 리수화, 표현철 일행인 것이다. 미국인인 스미스는 한민족의 시원적 장소 동막골을 수호할 자격에 생래적으로 미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웰컴 투 동막골’의 내러티브는 사실 야훼와 같은 초월적 존재로 은유되는 국민국가의 배타성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4. 공통감각으로서의 내셔널리즘

이러한 분석이 물론 ‘웰컴 투 동막골’의 연출 의도와 부합하지 않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00년대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투자-배급 시스템 속에서 관객 동원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이 영화는 세련된 스타일에 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분히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한국인 일반의 감수성에 부합하는 형태라는 것도 분명하다. 예컨대 감독 박광현은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기존에 한국에서 전쟁영화를 다룬 방식들이 지나치게 폭력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서, 물론 전쟁이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꼭 그 방법만 있느냐, 거기에는 다분히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전쟁을 해서 비참해지는 상황도 있지만 전쟁을 하지 않으면 참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우리가 늘 다루는 한국전쟁을 좀 다르게 풀어나가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지만 가장 행복한 어떤 공간, 아이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소중한 곳도 전쟁은 그들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중요한 경고를 하고 싶었어요. 그것을 제가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구요.”

간단히 말하면 소박한 민중주의이다. 그리고 일반 관객에게 전쟁에 희생된 민중의 형상에 대한 아이덴티티의 동일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과 동일한 논리적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반딧불의 묘’는 사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표준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일반적인 한국인 관객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거나 옹호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반딧불의 묘’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천진난만한 남매, 세이타와 세츠코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비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애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1980년대 후반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수작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강요하는 절박한 상황에 따라 그들 남매를 외면하고 있는 어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반딧불의 묘’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전쟁과 무관하며 또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희생자로서의 개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생존에 직면한 이상, 전쟁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계는,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은 이러한 희생자들에 대해 냉혹하기 그지없다. 특히 그것이 이 두 영화를 비극으로 만들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 연출되고 있는 세계와 자연은 그저 무심하게 ‘웰컴 투 동막골’의 주인공들을 산주검으로 만들고 ‘반딧불의 묘’의 인물들의 머리 위에 폭탄을 투하한다. 이들 영화의 문맥에서 그러한 상황을 조장, 강요하는 존재가 머리 위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폭격기의 위협적인 굉음과 공습으로 동일하게 표상되고 있는 것은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미국을 가리키며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심지어 아우슈비츠의 학살에 대해 자신이 오로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관료로서 행동했다는 아이히만의 자기변호 또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또한 다만 소여로서의 역사 및 사회에 저항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반딧불의 묘’에서 제시되고 있는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개인의 상이라든가 특히 세이타의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일반적인 한국인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일본의 전쟁 책임, 그리고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기억이 소거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탈각되어 있으며 또한 일본 국민을 희생자로 만든 책임을 미국이라는 외부에 전가하고 있다는 감각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종류의 질문을 ‘웰컴 투 동막골’의 배경이 되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던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은 과연 북한의 남침이나 미국의 남침 유도에 의해 빚어진 사건이었는가.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모두가 과연 미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었던가.

‘웰컴 투 동막골’과 ‘반딧불의 묘’에서 표현되고 있는 희생자 의식이 위험한 것은 내셔널리즘을 정당화하거나 과도하게 표출해서가 아니라 내셔널리티의 외연을 막연하게 확장하면서 거기에 귀속된다고 하는 기준을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성에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준에 입각했을 때 혈연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만 의식한다면 누구나 스스로를 그 집단의 성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집단 내부에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성원으로서 관대해질 것을 요구한다. 박광현과 다카하타가 공감했던 것처럼 ‘웰컴 투 동막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미의식과 민중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반딧불의 묘’에 대해 일반적인 한국인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외부, 즉 과거의 식민 지배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국적으로나 언어/문화적으로나 ‘반딧불의 묘’가 상정하는 피해자의 외부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표현이라고 해도 그것이 내외 중 어느 쪽을 대상으로 삼고 있느냐에 따라 공감의 여지가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칸트가 말했던 공통감각(common-sense)의 속성이며 전형적인 미적 판단에 해당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내셔널리즘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공통감각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상, 차이의 사이에 입각한 초월적(transcendent) 시좌(視座), ‘비판’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개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언어는 망각한 상태에서 단지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남아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웰컴 투 동막골’의 지상명령이다. 이에 입각하여 내셔널리즘은 그러한 신체를 미적인 유기체로 조직한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이러한 명령은 포스트모던 이후, 개인에 대한 후기자본주의의 요구와도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치 자연스러운 욕구처럼 보이는, 그러나 기실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되어 결코 해갈되지 않을 욕망에 충실하고 또 그에 따라 소비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에 대해 데카르트적 의미의 신체로 남아 있으라는 것은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 공동의 요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셔널리즘적 선동과 후기자본주의의 환경 사이, 그 보로메오의 고리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생산 구조에 대한 기묘한 유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웰컴 투 동막골’은 한편으로 영화라는 장르의 발흥과 유통을 허락했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환기시키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 민족과 민중이 상상의 공동체로서 공백의 기표가 되고 순진무구한 아동이 보호와 훈육의 대상이 된다는 믿음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 오늘날, ‘웰컴 투 동막골’은 이러한 진실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 경향 신춘문예]대중문화평론 심사평
입력: 2008년 01월 01일 17:03:04
 
- 탄탄한 문체·명료한 관점, 이론 도입 적절 -


심사중인 서현석(왼쪽)·이동연(오른쪽) 
대중문화는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다. 다각적이고 다원적이다. 매체는 변화하고 소통의 방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아쉽게도 30편이 넘는 원고들에서 이러한 대중문화의 에너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평면적인 텍스트 분석보다는 의미의 폭을 텍스트 밖으로 넓히는 열린 관점이나 창의적인 확장을 높게 평가했고, 매체간의 상호작용이나 다양한 지각 체험, 영역과 장르 간의 경계와 접점에 민감한 글을 눈여겨보았다. 한 편의 영화를 치밀하게 분석한 글을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된 것은 그만큼 대중문화의 역동성을 읽어내고 확장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많은 대중매체들 중에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각별했다. 응모작 대다수가 영화감독을 예찬하거나 영화를 통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았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을 구축하고 있는 영화 연구에서 보편화된 이론적 개념들이 자주 등장하였고, 그만큼 학술적 기반이 탄탄한 분야로서 영화평론의 강세가 질적으로도 나타났다.

영화를 다룬 많은 응모작들 중에서도 ‘동막골’을 분석한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회귀하라’에 높은 점수를 준 이유 역시 평론의 고전적이고 형식적인 기반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즉, 안정감 있는 문체를 통해 하나의 명료한 관점을 탄탄하게 구성하였고 세밀한 관찰과 이론의 도입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개념적 도구들과 이론적 틀이 적절하게 등장하면서도 글을 장악하는 대신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해석을 풍부하게 하였고, 대중문화 속에 담긴 다층적 상징들의 교접을 일깨워주었다. 평을 통해 영화 속의 작고 사소한 기표는 거시적인 의미의 층을 소통하는 견고한 기반으로 살아났다.

‘밀양’이나 ‘기담’, ‘디워’ 등 더 최근에 주목을 받았던 영화들도 많은 예리한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 ‘달팽이들을 위한 안락한 멜로 혹은 유령의 정치학’과 ‘한줌의 햇볕이 지닌 찰나적 유희에 대하여’ 등은 보편적으로 반복되는 모티브와 주제를 통해 영화 텍스트 내부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의미체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였다.

‘나비 공화국’은 주제의 설정에서는 가장 창의적인 글이었다. ‘나비’라는 작은 모티브를 통하여 ‘나비소녀’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부터 ‘기담’과 ‘별빛 속으로’에 이르기까지 역사의식의 굴곡을 관통한 것만으로도 풍부한 사유의 통로를 뚫었다. 역사소설과 대중음악까지 분석의 대상을 확장하여 대중의 정서와 역사에 대한 성찰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좁은 지면에서 희생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면밀하고 치열한 텍스트의 분석을 심화하고 이를 통해 더 다양한 접점들을 제시한다면, 더 활력 넘치면서 학술적 가치도 높은 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2008 경향 신춘문예]대중문화평론 수상소감- 조형래
입력: 2008년 01월 01일 17:03:00
 
- 할리우드 키드에게 비평은 자학의 쾌락 -


 
고전적 의미에서 비평이란 불편부당함이라는 입지(立地)를 전제한 행위이다. 물론 그것은 개인에게 결코 허락될 수 없는 조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을 초월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지향이 비평이라는 글쓰기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환시(幻視)해 주는 다종다양한 이미지의 교향악에 매혹되어 기꺼이 할리우드 키드가 되기를 자처했던 한 개인에게 비평에 관한 이러한 자의식은 언제나 자학의 쾌락 같은 것을 선사해왔다. 내가 더없이 중독되어 있는 대상을, 그것에 매혹되어 있는 나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성찰하는 것. 비평은 항상 스스로를 그와 같은 역설과 긴장의 한복판으로 내몰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포함한 여러 텍스트는 그와 같은 착잡한 성찰의 회로 속에서 그 자신의 의미를 풍성하게 증식해 갔다. 그것을 주재하고 또 응시하는 일은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었다.

이러한 자기만의 유희에 빛을 비추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서영채 선생님의 지도 및 박우성 형의 요청이 없었더라면 이 글은 아직도 몇 장의 메모로 서랍 속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지상 최고의 소설가인 그녀의 강권이 없었더라면 이 영광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었을 터이다. 이 모든 분들과 이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

기억해야 할 사람은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내 교양과 학문의 전부를 형성한 곳인 동국대 국문과, 문창과의 여러 선생님들께 마땅히 감사를 올려야 한다. 특히 학문 연구 및 비평에 대한 꿈을 품게 하고 그 길을 열어 보여주신 황종연 선생님께 엎드려 절하고 싶다. 덧붙여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와 문화학술원의 여러 선배 및 동료들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내게 그들 모두는 언제나 연구자로서의 귀감이었다. 비평이라는 가시밭길을 앞서가며 부족한 후배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준 허병식, 복도훈 양형께도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믿고 지켜봐주시는 아버님, 어머님께 감사드린다. 부모님의 신뢰와 애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이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욱 분발하고 정진하겠다는 말로 인사를 갈음하고 싶다.

-1977년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2008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합니다. 응모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단편소설 당선작=‘우유’
전윤희(고양시 일산동구 마두1동)

◆시 당선작=‘너와집’
박미산(본명:박명옥, 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문학평론 당선작=‘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
조효원(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심사위원
▲단편소설=본심:김윤식 오정희, 예심:권지예 정길연 박철화
▲시=본심:유종호 신경림, 예심:이진명 김영남
▲문학평론=김주연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 전윤희 '우유'
그림=화가 박정민
조간신문과 함께 우유를 들고 들어오던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해. 우유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어.”

신문을 건네주고 아내는 식탁 위에 우유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워낙에 극성인 아내인지라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신문을 펼쳐 들었다. 아악! 갑자기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컵에 담긴 우유에 허연 덩어리와 노리끼리한 액체가 엉켜 있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누구 죽일 일 있어? 애가 먹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내는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건우가 마실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내의 성난 팔꿈치에 차이기 전에 얼른 수상한 물체를 개수대에 쏟아 붓고 찬물을 세게 틀었다. 물컹거리는 덩어리는 몽글몽글한 작은 입자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분해되지도, 뽕뽕 뚫린 구멍 속으로 빠져 나가지도 않았다. 다시 물살을 세게 틀었으나 놈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지는 못했다.

역한 냄새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비가 오려는 듯 대기 중에 습기가 가득했다. 날씨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가는 한순간 개어 버렸고, 햇살이 따갑다가도 소나기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비가 오다 개다를 다섯 차례 반복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한쪽에선 거세게 비가 내렸고 다른 쪽에선 습기 찬 바람만 불고 말았다. 날씨의 변덕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날씨가 미쳐 버렸다고 말했다.

아내는 당장 대리점에 전화를 걸겠다며 고지서를 찾았다. 삼십 분 넘게 헤매다가 겨우 찾아낸 것은 지난달치 미납 고지서였다. 액수가 꽤 된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그 전달의 액수와 합한 금액이었다. 도합 세 달이 밀렸던 것이다.

“아니, 왜 우유 값을 이렇게 밀렸어! 제때 내지 않고…….”

우유 값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불평을 한다는 것이 좀 마뜩찮아서 나는 한마디 했다. 그러자 아내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때맞춰 은행 가기가 그렇게 쉽니? 잊어버릴 수도 있고 바빠서 시간을 못 낼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이런 거지 같은 날씨에 오로지 우유 값 내자고 나가고 싶겠어?”

아내는 씩씩거리며 고지서에 나와 있는 번호를 따라 전화버튼을 눌렀다. 꽤 오랫동안 신호가 갔으나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는 눈치였다. 메시지를 남겨 놓으라는 자동응답기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내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돈 좀 늦게 냈다고 상한 우유를 넣는단 말이지? 당장 끊어버릴 줄 알아.”

그렇다고 일부러 상한 우유를 넣었겠냐고, 날씨가 이렇듯 더우니 우유가 상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아내는 양심에 찔려서 지레 흥분하고 있었다.
 
그림=화가 박정민

바캉스 짐을 꾸리면서도 아내는 생각날 때마다 대리점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후에는 이내 녹음된 테이프가 돌아갔다. 아내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출발 직전까지 아내의 전화는 계속되었고 수화기 건너편에선 침묵이 계속되었다. 현관문을 잠그기 전에 아내는 가스 밸브는 잠갔는지 창문은 모두 닫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고지서에 적힌 우유 대리점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우유를 넣지 말라고 메시지를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싫어. 직접 말할 거야.”

고집을 피우던 아내는 궁여지책으로 4절지 도화지에 ‘당분간 우유를 넣지 마시오’라고 써서 문 앞에 붙여놓았다. 글씨부터 쓰고 붙였으면 좋았을 것을. 문에 붙여진 종이에 쓰인 글씨는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아내는 마지막에 느낌표를 세 개나 찍음으로써 그 단호함을 표현했다.

차를 타고 동해로 가는 길에서도 날씨의 광기는 계속되었다. 와이퍼가 미처 쓸어내기도 전에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앞차가 켜놓은 비상등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 움직일 만큼 거세게 비가 쏟아지다가도, 터널 하나만 지나면 햇살이 반짝거렸다.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내는 중간중간 잠꼬대처럼 말했다.

“미쳤어. 미쳤어. 다들 정말 돌았나봐.”

흐린 여름날의 바닷물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해수욕장은 한적했고 그나마도 모래성이나 쌓고 있을 뿐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는 신이 나서 튜브를 몸에 걸고 바다를 향해 달려갔으나 발을 담가 보더니 곧 돌아섰다. 몇 번의 물웅덩이를 지나며 일곱 시간 가까이 곡예 운전을 한 결과치고는 빈약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바닷가에서도 아내는 연신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에게서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여기 화영아파트 304혼데요, 앞으로 우유 넣지 말아 주세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우유 넣지 마세요. 우유 값 계산해서 고지서 보내세요. 참, 어제 우유는 상해서 버렸으니 제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아내는 결국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에 승복했다. 그러나 결코 패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우유를 끊겠다는 의사를 단호한 음성으로 남겼다. 사실 그보다 확실한 처벌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는 더 이상 휴대폰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면 길거리에서 우유를 서너 개씩 나눠 주며 호객행위를 하는 새로운 대리점과 계약을 맺으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냄비세트나 요구르트 제조기 같은 꽤 괜찮은 사은품도 줄 것이다. 아내는 벌써 머릿속으로 뭐가 필요한지 주방의 수납장을 훑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우리는 해수욕을 포기하고 콘도 앞에 마련된 물썰매를 탔다. 썰매를 들고 언덕을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아서 나는 곧 지쳤지만 아이와 아내는 매우 즐거워했다. 아내는 우유 같은 건 벌써 잊은 얼굴이었다.

바캉스에서 돌아온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푼 우유팩 네 개가 문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집을 비운 지 정확히 4일째였다. 건우가 걔 중 가장 덜 부푼 것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이건 날씬하다.”

“너 당장 내려놓지 못해!”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에 나는 아이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았다.

“가져다 버릴까?”

“버리긴 어디다 버려? 거기다 그대로 놔둬. 지들이 가져가게. 증거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나는 들고 있던 우유를 다른 세 개의 터질 것 같은 우유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바야흐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전화도 받지 않는 우유대리점과 아내 사이의. 나는 그들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에서 불꽃이 파다닥 튀는 것을 목도했다.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화기부터 들었다. 신호가 열 번쯤 가고 난 후에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뭐예요?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아내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나는 건우를 데리고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폭염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좀처럼 잠도 자지 못했고 식욕이 없어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았지만 창밖의 날씨도, 방안의 공기도 후텁지근하긴 마찬가지였다. 선풍기를 틀어도 더운 바람만 불어왔고 에어컨도 가동되는 동안에만 시원할 뿐, 전원을 끄는 순간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나마도 전기 값을 염려하는 아내의 눈치가 보여 맘대로 틀 수도 없었다. 도대체 더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집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TV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TV에서는 연일 사건 사고가 쏟아졌다.

“자식들, 덥지도 않나? 사고를 치려면 좀 선선해진 다음에나 치지.”

7년간 동거했던 여자를 변심했다는 이유로 토막살해를 한 남자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의 기사를 들으며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아내가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저랬지? 그녀를 힐끔거리다가 나는 아내가 변하는 것도, 우유대리점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도 모두 죽 끓듯이 변하는 날씨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림=화가 박정민

우유 배달부가 찾아왔다. 하필이면 아침 뉴스에서 패륜아가 복면을 쓰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사건 현장을 재연하는 광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벨이 울리자 건우가 쪼르륵 달려갔다. 건우는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부터 열었다.

“엄마 계시니?”

현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누구시죠?”

“우유 바꿔 드리러 왔습니다.”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마른 체구에 키만 비죽하니 컸다. 양미간이 좁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그런지 인상도 내성적이고 소심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1000㎖짜리 우유가 다섯 개 들려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려는 찰나에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가 내 손을 가로막았다. 아내의 품에는 네 개의 터질 것 같은 우유가 들려 있었다. 아내는 그 애물단지들을 그의 발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필요 없어요. 우린 다른 회사 우유를 먹기로 했어요. 고지서는 가져왔나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내와 나를 그리고 건우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우리 가족을 스쳐갈 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인상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공포를 느꼈다.

“주인 아저씨가 안 계셔서 메시지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주인이 아니면 댁은 누구죠?”

“우유 배달하는 알바생이에요.”

“주인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을 보내? 다 필요 없으니까 고지서나 보내라고 해요.”

아내가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유 배달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그가 건우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다.

그날 오후 아내는 새로운 대리점과 1년 계약을 맺었다. 아내의 손에는 플라스틱 어린이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내가 책상과 의자를 물걸레로 닦아주자마자 건우는 자리를 잡고는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아내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좀 참지,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나는 왠지 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TV를 켰다. 9시 뉴스에서는 변심한 동거녀를 죽인 남자와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죽인 폐륜아의 기사가 또 나왔다. 이번에는 폐륜아의 누나가 나와서 그 애가 얼마나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였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열했다. 온몸에 다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제야 왜 우유배달 아르바이트생을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유 배달부가 입고 있는 노란색 바탕에 해골무늬가 그려진 티셔츠와 똑같은 티셔츠를 그 폐륜아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짧은 머리스타일과 체구도 비슷했다.

“이봐, 저 사람 그 아르바이트생하고 느낌이 비슷하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왜 옷도 같은 거잖아, 해골무늬가 있는 노란색 티셔츠.”

“그랬나? 생각 않나.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아내는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드라마 볼 시간이라며 채널을 돌려버렸다. 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게 드라마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 문밖의 주머니에는 새로운 상표의 우유가 들어 있었다. 만족스런 얼굴로 우유를 꺼내던 아내는 이전의 대리점에서 보낸 고지서를 발견했다. 그것 또한 아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아내는 달력을 넘겨가며 날짜를 셌다. 혹시 잘못 셌을까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그어가며 다시 셌다. 그러고는 전자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갔다.

“이 사람들이 상한 우유까지 모두 계산에 넣었어. 나를 아주 우습게 봤나본데 누가 돈을 낼 줄 알고?”

아내는 대리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쪽에선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남기라는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내도 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정신이 아니었던 게다.

“이봐요, 계산이 틀리잖아요. 상한 우유 값까지 내란 말인가요? 제대로 된 고지서를 가져올 때까지 우유 값을 내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요.”


아내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자동응답기를 틀어놓고는 상대방의 흥분된 목소리에 신이 나서 킥킥거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전화를 안 받겠다 이거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아?”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는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상대는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지고는 못 배기는 아내의 성격에 속이 얼마나 끓을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 건우는 무사할까. 나는 애틋한 마음으로 건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그러나 퇴근 후 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표정은 꽤 밝았다.

“잘 해결됐나 보지?”

“방법을 찾아냈지. 내가 누구야.”

“새로 고지서가 온 게 아니고?”

“곧 올 수밖에 없겠지. 내일까지 새 고지서를 보내지 않으면 돈을 단 한푼도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단지 내 인터넷 사이트에 고발해버릴 거라고 협박했지.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우리 단지 가구수가 몇인데 지들이 버틸 수 있겠어?”

아내는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으나 나는 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당연하지, 그런 놈들은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해.”

다음날, 우유 주머니에는 1000㎖짜리 우유가 두 통 들어 있었다. 새로운 대리점으로부터 하나, 먼저 번 대리점으로부터 하나. 아내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새로운 대리점의 우유만 가지고 들어왔다. 출근길에 문 밖에 놓여 있던 우유는 퇴근길에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단지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었다는 것이 달랐다.

“고지서에 있는 금액을 다 내지 않으면 우유를 끊을 수 없다는 거야. 말이 돼?”

그러나 그들은 아내의 협박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우유가 배달되었다. 아내는 집 안으로 우유를 들여놓지 않았다. 우유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져서는 당당하게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해골무늬 노란티셔츠의 청년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몇 번 마주쳤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잦았다. 그를 처음 마주친 것은 24시간 편의점에서였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꺼내다가, 컵라면이 쌓여 있는 진열대를 그가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술에 좀 취해 있었다. 그를 보자 팔뚝에 소름이 돋으면서 술이 확 깼다. 그다음 그를 본 것은 지하철에서였다. 출근 길 지하철 안은 꽤 복잡했으나 나는 그가 입은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를 금세 식별했다. 그는 야구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자 밑으로 그의 소심한 눈이 번뜩이며 내 동향을 좇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불안했다. 건우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 오는 길에도 멀찍이서 노란색 티셔츠가 지나가는 것을 언뜻 보았다. 나도 모르게 건우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불안에 떠는 사이, 아내는 분주히 움직였다. 아내는 아파트 주민용 인터넷 사이트에 ‘당신의 아이가 먹는 우유 이래도 됩니까?’라는 제목으로 사연을 올렸다. 처음 상한 우유가 들어온 것부터 바캉스 기간 내내 상한 우유가 쌓여간 것이며, 이제 아예 상한 우유 값까지 내라고 협박을 하는 얘기를 구구절절이 남겼다. 그리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의 사진을 찍어서 첨부했다. 단지 우유 값을 연체한 얘기만 건너뛰었다.

안타깝게도 아파트 주민용 사이트의 방문자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 홈페이지에 열중하느라 그런 사이트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인터넷을 들락거리던 아내는 전화통을 붙들기 시작했다.

“민주 엄마,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 우리 아파트 사이트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 자기, 신문은 보고 사냐?”

“승준 엄마? 아파트 사이트에 내가 글 올려놨으니까 지금 당장 들어가 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좀 알려. 이건 정말 생명이 달린 중요한 얘기야.”

“반장님, 사실 이런 일은 반장님이 앞장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세상 무서워서 애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사람들은 우리 단지에 발을 못 들여놓게 해야죠.”

통화의 효과는 생각보다 빨리, 강하게 나타났다. 아내가 아는 사람들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들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여자들은 모두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그런 악덕 업체는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을 뭘로 본 것이냐. 평수가 큰 건너편 동아 아파트였다면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으로 저지른 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나도 그 우유 먹였는데 당장 끊겠다……. 소문은 들었으나 컴맹이라 인터넷에 댓글을 달 수 없는 사람들은 아내를 찾아와 함께 울분을 터뜨렸다.

언제까지나 탄탄할 것 같던 동맹은 삼일이 못 가서 깨어졌다. 새로운 댓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이전에 있던 댓글마저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을 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혼돈의 빛이 역력했다. 단지에서 만난 이웃들은 아내를 슬슬 피하기까지 했다. 아내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것은 집집마다 배달된 산세베리아 화분이었다. 집 안 공기를 청정하게 해준다잖아, 라고 윗집 사는 민주 엄마는 얼버무렸지만, 눈치 빠른 아내가 산세베리아의 출처를 모를 리 없었다.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그러게, 왜 우유 값을 제때 안 내, 라며 아내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대리점은 잃을 뻔했던 고객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없던 고객도 따냈던 것이다. 인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던 아내는 마침내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소비자고발센터는 괜히 있는 줄 아나보지!”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의 냉면집에서 나는 또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의 남자를 보았다. 박 대리와 함께 냉면을 먹는 동안 계속해서 그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요, 과장님, 브루스 리, 이소룡도 말입니다. 한참 정상가도를 달리던 그가 왜 서른두 살에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죽느냔 말입니다. 의사가 밝힌 사망 원인은 그가 두통약으로 먹은 에콰제식의 성분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른 의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잖아요. 홍콩을 비롯해 전 세계 무예계에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지요. 게다가 이소룡이 죽기 몇 달 전부터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도 돌았다니, 음모론이 나돌 만하지요.”

“음모? 그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는 건가?”

나는 박 대리가 말한 ‘음모’란 단어에 솔깃했다. 그러고 보니 박 대리는 오늘 따라 음모에 대해 유독 관심을 보였다. 주문을 하기 전부터 냉면을 먹으면서도 쉬지 않고 메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위로 떠도는 갖가지 음모들을 침을 튀기며 늘어놓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1970년대에 트라이어드 같은 중국 범죄조직의 범행이라는 것이죠. 그치들은 홍콩의 영화배우들에게서 보호 명목으로 돈을 뜯어냈는데 이소룡은 이런 요구를 과감히 거절한 것이죠. 그 때문에 괘씸죄로 찍혀 독살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박 대리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를 슬쩍 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는 핏물처럼 빨갛게 범벅이 된 비빔냉면을 먹고 있었다. 유령처럼 예기치 않은 장소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가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 그가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그날 따라 냉면집의 에어컨은 너무 세게 가동되었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물냉면의 국물을 한 모금 마시자 이가 딱딱 부딪혔다.

아르바이트생인 그 청년은 아내로 인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을지도 몰랐다. 손해액을 변상하라거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급여를 줄 수 없다고 협박을 당했을지도……. 그 뻔뻔한 대리점 주인은 그딴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상한 우유의 값까지 계산해서 보낸 사람이 아닌가. 그 순간 왜 갑자기 폐륜아의 누나가 한 말이 떠올랐을까. 그녀는 그 애가 얼마나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였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열했다. 홧김에 그 소심하고 평범해 보이던 아르바이트생이 범죄를 저지르면 어쩌나…….

이쯤 되자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와 마주칠 것만 같았고 화장실을 갈 때도 왠지 불안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그가 잠복해 있다가 내 눈 앞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상상되기까지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에 그가 들어오지 않으면 안심하다가도, 어디선가 몰래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해코지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불안해졌다.

그가 건우나 아내의 근처를 얼씬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가 건우의 얼굴을 본 것이 꺼림칙했던 기억이 났다. 부모의 직감이었을까?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건우가 올 시간이 다 됐는데. 나도 모르게 거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옆자리의 박 대리가 나를 힐긋 보았다.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부재중이니 다음에 다시 걸어 달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처가에 전화를 걸었다. 처가에도 처형의 집에도 아내는 없었다. 아내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심장이 점점 빨리 뛰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팩처럼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외출을 신청했다. 회사를 나오면서도 누군가 나를 미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맘 같아서는 건우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혹 미행이라도 당한다면 더 위험해질 것 같아 집으로 갔다.

문 앞에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분노에 가득 찬 우유가 일곱 개나 모여 있었다. 언젠가 저것들이 폭발해 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내 몰래 가져다 변기에 쏟아 넣고 물을 내려버릴까. 회오리처럼 빠져나가는 물줄기 속으로 뭉텅이진 카제인 덩어리도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굴도 모르는 대리점 주인만큼이나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의 청년만큼이나 아내도 낯설고 두려웠다.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집 안이 엉망이었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뚜껑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초파리들이 새까맣게 앉았다가 부스스 날아갔다. 내가 아침에 보았던 신문도 거실 바닥에 그대로 흩어져 있고 건우가 가지고 놀았을 블록도 발에 밟혔다. 아내는 들쭉날쭉한 날씨와 문밖에 쌓여가는 우유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도무지 살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리는 좀 하고 살지. 나는 블록을 집어서 바구니에 넣다가 문뜩 이곳이 사건의 현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나는 집어들던 블록을 다시 내려놓고 살금살금 걸어서 안방 문을 열었다. 누가 왔다 간 흔적처럼 침대 위에는 아내의 옷이 여러 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건우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건우의 방은 평소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다시 아내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도록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나는 건우의 유치원에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번호를 몰랐다. 아내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을 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유치원에서 받아 온 유인물도 어디다 두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접 찾아가볼 수밖에 없었다. 막상 찾아가려니 마음이 급해져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 밖을 나오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 계단 어디에서 그가 나를 지켜볼까봐 염려가 되었다.

다행히 건우는 유치원에 있었다. 동화책을 읽고 있는 선생님을 둘러싼 아이들 사이에 건우도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러나 지하철 역사에서 노란 티셔츠를 발견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졸아들었다. 다시 보니 노란색 티셔츠의 주인은 긴 머리 여학생이었다. 가슴팍에 해골무늬도 없었다. 한적한 오후의 지하철에서도 우유 배달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빈 의자를 찾아 앉아 숨을 돌렸다. 시원한 냉방이 땀을 말끔하게 식혀 주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들의 싸움에 말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전화했었어?”

“도대체 어디 갔었어?”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었다.

“말도 마. 아침부터 얼마나 바빴다구. 소라 엄마가 구청에서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강연이 있다고 해서 갔다 왔지. 전문가한테 두 시간 동안이나 강연을 들었다구. 필기까지 해가면서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알아? 이제 걔들은 다 죽었어.”

아내의 빠르고 높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쏟아졌다. 나는 아내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녀와 나는 동갑인데 나만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거리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더운 날이었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 누군가 내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해골무늬 노란티셔츠였다.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과장님, 왜 이렇게 놀라세요?”

박 대리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해골무늬 노란티셔츠를 가리켰다.

“저, 저 해골무늬…….”

“과장님, 모르셨어요? 저 옷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뜨는 디자인이잖아요.

박 대리의 말을 듣고 보니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쪽에도, 저기 저쪽에도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을 하고 무심하게 나를 지나쳐 갔다. 간신히 버티고 섰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박 대리의 팔을 붙잡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내는 인터넷의 소비자보호센터에 사연을 올렸다. 억울한 심정이 신파적 언어로 잘 드러난 길고 긴 사연 아래에는 비교적 짤막한 답변이 달렸다. 〈소비자 분께서 주장하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나 증거불충분으로 중재가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 한 답변치고는 너무 짧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담원은 처음엔 양자 간에 말로 잘 해결해 보라고 타이르다가, 아내가 꺾일 기세가 아니자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고 그냥 빨리 잊어버리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고는 상담원이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자, 아내는 구청에서 주워 들은 것은 있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선 중간에서 합의가 된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느냐,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느냐며 핏대를 올렸다. 아내가 전화를 하는 내내 나는 분쟁이 소비자와 소비자고발센터로 옮겨가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결국 아내는 대리점에 시정경고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리점에서 사과 전화가 오길 기다리던 중, 나는 예기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아내와 건우는 자축파티를 위해 케이크를 사러가고 없었다.

“경호회사 하이에나 시큐리티의 경호팀장 강준구입니다. 근래에 속 썩은 일이 있으시죠?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잡음 없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음산할 정도로 낮았다. 스포츠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새까만 선글라스까지 쓴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떻게 우리 집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을까? 소비자고발센터에 고발한 내용이 빠져나간 것일까?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못했다. 단지, 좀 생각해 본 후에 연락을 하겠다는 말만 했다.

“연락 주시면 고객님의 마음과 뜻과 목숨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여운을 남기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사라지자, 착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사람이 내게 접촉을 해온 것하며 목숨을 지켜 주겠다는 과격한 말까지 남긴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일이 너무 커져 가는 것에 대해 나는 두렵고 화가 났다. 아내가 돌아오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에 대해 따질 생각이었다.


아내를 기다리며 거실을 서성이는 동안 생각은 점점 바뀌어 갔다. 여차하면 나는 그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아내는 요즘 들어 종종 내게 불만을 표시했다. 강 건너 불 구경한다며 나의 태만함에 대해 화를 내기도 했고, 뭐가 그렇게 겁나냐며 경멸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 때문에 두려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그 같은 공포를 이용해 대리점 주인을 혼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섣불리 경호팀장이라는 남자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최신무기라도 하나 감추고 있는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전세(戰勢)는 역전되고 있었다.


삼일이 지나도록 대리점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우유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소비자고발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서류를 확인해 보더니 시정경고를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원하신다면 다시 한 번 시정경고를 할 수는 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이상 어떤 조치도 불가능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검색버튼을 누르고 하이에나 시큐리티를 입력하자 경호회사의 전화번호가 액정화면 위로 떠올랐다. 출근길에, 나는 대리점을 찾아갔다. 대리점 앞에 있는 커다란 초록색 플라스틱 통들 안에는 크고 작은 우유팩들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동굴 속을 탐사하듯 쌓아 올려진 우유팩들 사이사이를 지나가자, 대리점 안쪽 깊숙한 곳에 주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은 얼핏 보면 인자한 인상으로까지 보였다. 그의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어둑어둑한 공간에서도 반짝였다.

“어떻게 오셨지요?”

그가 나를 힐긋 보며 말했다.

“소비자고발센터에서 경고조치를 받으셨을 텐데요.”

나는 되도록 목소리를 낮게 깔고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은 흡사 경호팀장의 말투와 비슷했다.

“글쎄요, 제가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서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 그는 말끝을 흐렸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라고 말하며 책상을 한번 쾅 내리칠 참이었다. 그때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으로 테두리까지 입힌 명함에는 분명 하이에나 시큐리티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지갑을 열었다.

“진작 그러실 것이지. 우유는 기어코 바꾸실 건가요?”

상한 우유뿐 아니라 오늘 아침에 들어온 우유의 값까지 모두 합한 돈을 세면서 대리점 주인이 말했다. 그의 느물거리는 웃음을 보며 나는 그가 새로운 우유에 독극물이라도 집어넣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이번에는 1년 계약이라 어쩔 수가 없고요, 대신 그 계약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지요. 근데 믿어도 되겠죠?”

“가계약이라도 할까요?”

“뭐, 그러실 필요는 없고 일단 믿어보지요. 아저씨는 경우가 바른 사람인 것 같구먼.”

그는 옆에 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통에서 200㎖ 우유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차가운 우유팩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저, 상한 우유 값은 제한 금액으로 영수증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아내가 알면…….”

“하하, 역시 현명한 남편이십니다.”

그는 흔쾌히, 영수증에 힘을 주어 금액을 적고, 사인을 했다.

대리점을 나오자 햇살이 따가웠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을 닦았다. 하얀 손수건에 누르스름한 얼룩이 생겼다. 몇 걸음 걷고 나니 갈증이 일었다. 들고 있던 우유를 열었다. 파란색 우유팩 속에서 찰랑거리는 순백의 우유를 보는 순간, 훅! 구역질이 넘어왔다. 여름은 끝없이 이어질 듯했다.

〈끝〉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소설 심사평 - 김윤식·오정희


사소한 문제서 사회 위협하는 폭력 긴강감 있게 묘사

예심에서 올라온 11편의 작품들 중 5편의 작품에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김경의 ‘민들레 귀하’는 문장과 스토리 전개의 빠른 흐름이 경쾌하였으나 비교적 단순한 내용과 깊이의 부족이 지적되었다. 신윤아의 ‘1683 라모를 찾아서’는 나름대로의 실험성과 안으로 파고드는 치열성이 돋보이나 무리한 주제 설정으로 작위성이 드러나는 것이 흠이 되었다. 이희진의 ‘이빨’은 상실과 결핍과 소외라는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닥터피시’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매개로 하여 끌어내고 치유를 꾀한다는, 다소 생경하고 특이한 소설이다. 소설을 만드는 솜씨의 능란함과 탄탄한 문장력에 호감이 갔으나 작품 전반에 걸쳐 ‘닥터피시’에 대한 설명이 장황한 데 비해 그것의 상징성이 약한 것이 소설적 긴장의 약화로 이어졌다.

임기선의 ‘룸메이트’는 무엇보다도 능숙한 문장과 소설의 유려한 흐름에 호감이 갔다. 시종 객관성을 잃지 않는, 작가로서의 시선도 쉽게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계속하여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면서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흡혈인’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든가 결말에 가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동성애 모티프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 때문에 작가가 어떤 소설적 필연성보다는 유행하는 시류에 편승한 면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윤희의 ‘우유’는 여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소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일상적 사건 안에 이 시대적 삶과 사회를 위협하고 잠식해 들어오는 폭력, 점진적으로 고조되어가는 공포와 불온한 긴장, 그리고 그 앞에서 나약하고 주눅들어 있으며 무력한 분노에 차 있는 자신과 이웃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아냄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하고 소심한 사람들의 의식과 삶의 한 단면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룸메이트’와 ‘우유’를 놓고 논의한 끝에 ‘룸메이트’의, 버리기 아까운 여러 미덕을 인정하면서도 글쓰기에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세련된 문장과 따뜻하고 진솔한 시선, 주제를 확실히 장악하는 능력 등을 높이 사서 ‘우유’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김윤식(문학평론가)·오정희(소설가)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소설 '우유' 당선소감


삶의 진실 탐색 위해 눈과 귀 늘 열어놓겠다

카페 루카는 아늑했지만 음악은 좀 시끄러웠다. 차분히 분위기를 잡고 앉아 당선소감을 쓰고 싶었던 바람은 다소 빗나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깊은 내면에서부터 신이 났다. 한 해 동안 비교적 열심히 살았다. 나름대로 완성작이라 생각하는 소설을 세 편 썼고, 쓰다 버린 소설이 두 개 더 있다. 열정적으로 덤비다가 제풀에 꺾여 무기력증에 빠지다가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성경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 나는 늘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들 앞에서 의기소침했다. 그러나 성경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열 달란트로 불려놓은 사람만 칭찬하지 않는다.

두 달란트를 네 달란트로 불려놓은 사람도 똑같은 칭찬을 받는다. 사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빤히 보면서 내 손의 두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을 비울 수 있었을 때, 당선 소식을 들었다. 미학적 깊이를 담은 명작을 쓸 자신은 없다. 대신 삶의 진실과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눈과 귀를 늘 열어놓겠다.

주위에서 나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오래 소설과 함께 한 문우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행운이 내게 온 것은 내가 그들보다 인내심이 적고 조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내게 양보해준 그들에게 감사한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또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까다로운 성격에도 늘 곁에 있어준 부모님과 세 명의 자매, 남편과 아이들,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시편의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전윤희

▲1968년 서울 출생

▲성심여자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영문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졸업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 박미산 '너와집'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심사평- 신경림·유종호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쓴 아주 따뜻한 시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수준이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특별히 개성 있는 시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이재근), ‘나비의 꿈’(문계현), ‘너와집’(박미산) 같은 작품들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준은 넉넉히 되었다.

먼저 ‘실직’은 삶에 뿌리박은 정서의 시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한데 무언가 신선한 맛이 덜하고, 죽음의 이미지가 시를 무겁게 만든다. 게다가 너무 건조하다.

같은 작자의 ‘얼굴’은 읽는 재미는 ‘실직’보다 낫겠는데, 산만하고 장황한 것이 흠이다.

‘나비의 꿈’은 장애인 부부의 외식 나들이가 소재가 된 시로서,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비유가 좀 억지스럽고 관념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화자가 되고 있는 ‘붉고 둥그스름한 다라이’는 정리가 더 돼야 할 소재 같다.

하지만 남과 같지 않은 상상력은 그의 앞날에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너와집’은 아주 따듯한 시여서 일단 호감이 간다.

물론 ‘너와집’은 실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과 ‘내’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말이나 감각도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심사위원은 최종적으로 박미산의 ‘너와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너와집' 당선소감


느리게 공부하는 내게 격려·질책해 준 선생님께 감사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한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산을 탔다. 바싹 마른 말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무너지려 할 때 지리산을 완주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설악과 북한산에 다니면서 내 몸을 다져 밟았다.

잘근잘근 밟혀 돌아오면 후줄근한 내 몸에서 말들이 피어나왔다. 허기진 가슴에서 바람이, 구름이, 안개가 시로 피어났고 때로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은 나도 모르게 곳곳에 쌓여 갔다.

찰랑찰랑 의심하던 사랑을, 요절을, 시를 여름 계곡에 떠나보내고 푸른빛이 사라져 이슥해진 나의 겨울 계곡은 은빛의 물 뿌리가 드러났다. 바닥이 다 드러난 나는 솔솔 내리는 눈발에 목을 축이고 사모하는 긴 혀를 따라 구불구불 의심했던 길을 다시 갔다.

피어나지 못했던 말은 부패되지 않은 채 골짜기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부딪치며 새 물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밤 나는 가장 예쁜 꿈을 꾸었다. 눈 쌓인 계곡에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살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철없는 나에게 ‘늦게 피는 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와 질책을 아낌없이 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시 합평회를 할 때마다 묵사발을 만들어준 수요시창작팀, 유안진 선생님, 장만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과 구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하시는 친정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 단비와 차래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십년을 함께 땀 흘린 택견패들에게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도 유종호 선생님과 신경림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말로 살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삶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씀으로써 두 분 심사위원께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참이다.


박미산(본명: 박명옥)

▲1954년 인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방송대 강사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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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신춘문예 페이지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08/index.html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 이 은 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이시영(시인)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예심 박형준 김선우)


 
예심을 통과한 15명 투고자들의 작품을 읽고 검토한 결과 두 명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무릎’ 등 5편의 작품을 투고한 조율의 경우 일상적 삶의 구체성에 바탕을 둔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감상이나 과장을 멀리한 채 삶의 신산함과 남루함을 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 투고자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또 시를 떠받치는 인식이 아무래도 소품 지향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경전)’ 등 5편을 투고한 이은규의 경우 일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기보다는 관념에서 시를 끌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상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작품을 관류하는 활달한 상상력 덕분에 요즘 시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느낌과 더불어 세련된 이미지와 진술의 어울림이 주는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잠언풍의 시는 자칫하면 시적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함정을 잘 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두 선자는 이번 심사에서 일상의 세목에 대한 충실보다는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의 피’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당선자의 시가 한국시의 비좁은 영토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언어의 모험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이 은 규
△1978년 서울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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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시는 시의 몸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시가 아닌 것에서 시의 속살을 만나다니, 새삼 逆(역)은 眞(진)이 아닐 수 없다.

열두 살의 아이는 어느 날 고분의 등잔 사진을 보게 된다. 복숭아모양의 등잔을 보는 순간 몸 안의 혈액들이 출렁, 그 후 어두운 무덤 내부가 등잔 빛에 환히 열리는 환영에 시달리며 혹시, 저것은 시가 아닐까 자문하는 날이 길었다. 시를 알기 전 시적인 것에 생의 운율이 출렁이다니.

영혼의 심지에 불을 놓았을 어느 손길. 불빛으로 한 생의 삶의 폭을 넓히겠다는 기원과, 한기에 영영 얼지 말라며 다독였을 시정(詩情)이 거기 있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주문을 외웠겠지. 그 주문은 언어이면서 언어의 배후. 침묵은 언어의 배후로 알맞지, 꽃의 배후가 허공인 것처럼.

누군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시는 무엇인가. 새삼 逆(역)은 眞(진)이 아닐 수 없다.

늘 존재 자체로 시이신 고재종 선생님과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객지에서의 새움을 틔우는데 도움을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족들과 바람으로라도 가닿고 싶은 정처(定處)에게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의 나와 도약의 지점에 대한 약속을 맺는다. 머리맡에 시를 두고 자는 밤이 길 것이다. 그 밤들을 생이 함께 지새워줄 것. 


날려, 훅                 - 정 수 진 



화장실 냄새가 다 거기서 거기지, 라고 말하지 마. 니가 그 화장실에서 나는 악취를 맡아봤다면 그렇게 말 못할걸. 이건 심한 정도가 아니라니까. 어디 화장실? 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만큼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 상상이 가는 건물들 있잖아. 그 날 면접을 보러 간 건물이 그랬어. 5층짜리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우중충한 회색 건물인데, 뭐랄까, 마치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요즘 애들과는 달리, 국사책에서나 보던 좀 오래된 옛날 사람들의 골격을 닮았다고나 할까. 어딘지 안쓰럽게 골골대고, 우스꽝스럽게 짜리몽땅해가지고 내세울 거라곤 징그러운 나이뿐인, 아주 꼬질꼬질하고 꼬장꼬장한 노인네 같은 분위기.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사무실은 5층이었어. 그 좁은 계단 폭을 오르려니 저절로 요조숙녀 자세가 나오는 거 있지. 그래도 면접이랍시고 그간 옷장에 처박아 둔 프릴 스커트에 8센티미터의 아찔한 스틸레토 힐까지 꺼내 신고 왔는데, 이거 예정에 없던 계단 등반으로 완전 스타일 구기게 됐지 뭐야. 2층쯤부터 서서히 발이 아파오더니 뒤꿈치가 빨갛게 벗겨지질 않나, 간만에 한 화장은 땀범벅이 된데다 치맛자락은 자꾸 들러붙질 않나,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높은 굽에 몇 번 휘청거려서 낡은 계단 손잡이를 움켜쥐고 한 칸 한 칸 어기적어기적 오르노라니, 문득 다음부턴 아르바이트 모집공고를 볼 때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하는 건물인지 아닌지 부터 조목조목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그래 맞아. 5층까지 헉헉대며 올라가는 동안, 나는 면접을 대충 마친 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검색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구. 물론 얼굴도 모르는 사장한텐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 쪽에서도 5층짜리 계단을 핑계로 흔치 않은 취업 자리를 미련 없이 포기하는 근성 없는 알바생은 썩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왜 아니겠어? 지원자가 남아 돌 텐데. 뭐 일에 비해 그리 적은 월급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간신히 5층에 도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무실을 찾으려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면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신호가 오는 거야. 알지? 내 오랜 지병인 과민성 대장증후군. 그 녀석이 하필 그렇게 들이 닥칠 게 뭐라니? 신경질이 나긴 했지만 일단 장비 점검부터 들어갔어. 시간상 5층 계단을 내려가 바로 앞 편의점에서 질 좋은 티슈를 풍족하게 준비하긴 역부족이었고, 그나마 핸드백 안에 길거리에서 나눠 준 개업 홍보용 티슈가 몇 장 남았다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했지. 나는 일단 복도 끝에 보이는 남녀공용화장실로 향했어. 알아, 그런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화장실에 대한 기대 따윈 없었어. 기대는 무슨. 그 건물 안에서 비데달린 대리석 화장실을 찾아 헤맬 멍청이가 어딨겠냐구? 이미 각오한 바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기대치를 그렇게 낮추었음에도……, 이건 좀 심했다니까. 차라리 시골길 풀숲 안이 낫지. 거긴 공기라도 맑을 거 아니니. 우웁, 말을 말아야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구역질난다니까. 그래, 처음엔 너무 급한 나머지 화장실을 천천히 훑어볼 겨를은 없었어. 뱃속이 막 꾸르륵대기 시작하니까 나름 긴장하고 당황했는지 그나마 화장이 번진 얼굴에 아예 땀이 줄줄 흐르더라고. 그게 얼마나 공들인 메이크업이었는데. 나중에 세면대 거울로 확인하기 전까진 그 정도일줄 몰랐다니까. 아이라인은 번지고 볼터치는 얼룩져서 퍼프를 꾹꾹 눌러도 소용이 없었어. 니가 봤으면 분명 한마디 했을 거야. 왜 아니겠어? 넌 유난히 그런 지적을 즐기곤 하니까. 아니긴 뭘 아냐. 하긴 뭐, 그 순간 삐에로가 되든 너구리가 되든 그깟 번진화장이 대수겠어? 난 부리나케 그 건물 5층 화장실 첫 째 칸으로 입성했지. 들어서자마자 핸드백부터 거추장스러워진 난 우선 물건 거는 고리부터 찾았어.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맥없이 너덜거리더군. 하지만 그 정도로 다음 칸을 건너가기엔 뱃속 신호가 꽤 급박 했던 거야. 대충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매는데 자꾸 흘러내려서 그냥 목에 걸어버렸지. 찰랑대는 핸드백 끈을 목에 건 채 엉거주춤 한 자세로 치마를 올리고 팬티를 내리고 엉덩이를 겸손하게 낮추며 쪼그려 앉기까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어. 뱃속은 이미 전투태세인지라 자칫 힘 조절에 실패했다간……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지. 난 입을 벌리고 이를 악물었어. 코로 숨쉬긴 싫었거든. 그리고 쪼그려 앉자마자 화장실에서 해야 할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지. 힐을 신은 발끝이 저리도록, 앉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도록, 땀범벅인 얼굴이 시뻘개 지도록, 최선을 다해 아랫배에 힘을 줬어. 당연히 화장실엔 원치 않는 민망한 효과음이, 변기통엔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그래, 그래, 알았어. 깔끔한 척은. 하여간 마지막 단계를 위해 난 핸드백을 열고 얼마 안 남은 티슈를 꺼냈지. 그야말로 공짜로 준 티가 팍팍 나는 티슈, 티슈란 고운 이름으로 불리기엔 다소 거친 재생의 과정을 거쳐 더욱 거친, 그 뻣뻣한 감촉의 휴지들을 몽땅 뽑아 들었어. 보기보다 얄팍해서 몇 장 겹쳐봤자 겨우 험한 꼴 면할 수준이더군. 몇 장의 재생 휴지를 신중하게 접어 쓰고 돌려쓴 뒤 뿌듯한 마음으로 막 팬티를 올리려다, 나도 모르게 휴우, 입으로 숨쉬길 깜박한 거야. 긴장이 풀린 게지. 우웩, 나는 코로 흡입한 공기를 거의 동시에 입으로 뱉어내야 했어. 후웁, 악취도 그런 악취가 없다니까. 단순히 인간의 배설물이 품고 있는 특유의 냄새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뭔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며 보다 진화된 형태의 악취, 라고 하면 좀 이해가 될까? 뭐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군. 알았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뭘 원해? 파스타? 난 상관없어. 파스타든 뭐든. 그 때 생각 하니 갑자기 입맛이 싹 달아나는걸 뭐.


어쨌거나 내가 말하려던 건 그 화장실의 분위기야. 빛이 들어 올 창문이라곤 없고 복도도 어두컴컴해서 작은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는데 그마저도 자꾸 껌뻑대더라고. 세면대는 잔뜩 녹이 슬었고 음식물 찌꺼기들이 들러붙었는지 오물 자국투성인데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수도꼭지엔 물발도 쫄쫄쫄. 축축한 바닥을 보니 타일 틈새로 시커먼 물이 고여 몇 번 안신은 내 힐을 딛고 서있기 조차 꺼림칙했다니까. 게다가 휴지통 근처를 기어 다니는 이름 모를 자잘한 벌레들이며 배수구 근처에 미처 물에 내려가지 못한 시커먼 머리카락 뭉치며, 어찌나 섬뜩하든지. 으, 정말이지 이 세상에 낱개보다 여러 개가 뭉쳐있을 때 그 그로테스크한 위력이 극대화되는 걸로 치자면 난 단연코 벌레와 머리카락을 꼽겠어. 그 긴 더듬이를 저으며 내 힐 위로 기어오르는데,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시커멓게 엉겨 붙은 긴 머리카락들은 어떻고. 아니 대체 누가 그 더러운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나간 걸까. 순간 미끌미끌하고 냄새나는 축축한 타일 바닥에 맨 발로 서서 음식물 찌꺼기가 배어있는 녹슨 세면대에 저 길고 검은 머리칼을 집어넣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거야. 아무래도 그간 쓸데없이 사다코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싶었지. 하지만 상상은 거기서 멈추질 않았어. 더러운 타일바닥의 머리카락, 벌레들이 꼬이는 휴지통 속 썩은 시체, 머리가 잘린 피투성이 좀비들, 우워어어, 귀를 찢는 비명 소리, 그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거지. 녀석들의 몸통을 차례로 명중시키고 휴지통을 뒤져 아이템을 획득하고 새로운 스킬과 무기로 남은 좀비들까지 모두 처치하고 나면 이 악취 나는 화장실 스테이지는 가볍게 클리어, 캐릭터는 가뿐히 레벨 업!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래, 심각했지. 온라인게임에 미쳐 살았으니까. 인정해. 할 일이라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보내고 좀비들을 격파하는 것 뿐 이었으니까. 썩 보람된 일은 아니지. 그 끔찍한 좀비들을 하루에 수천 명씩 죽여줬는데도 누구하나 고마워하지 않더군. 더군다나 매일 그것들을 죽이다보면 눈가엔 짙은 다크써클, 온몸은 뻐근하게 이곳 저 곳 쑤시는 데다 시선은 멍, 걸음걸이는 휘청휘청, 그야말로 영락없이 좀비 꼴을 닮아가는 거야. 살아있는 시체 말이야. 안타까운 악순환이었지.


눈치 챘겠지만 당시 난 여러모로 고립되어 있었어. 돈도, 남자도, 일도, 사람들도, 어쩜 끊길 땐 모조리 다 딱 끊겨버린다니? 오죽하면 너한테 그런 부탁까지 다 했겠어? 지금 생각하면 니가 오히려 잘 거절해준 거야. 난 제 정신이 아니었거든.


그렇게 게임 캐릭터를 레벨 업 하는 낙으로 하루를 마감한 뒤, 머리와 어깨가 쑤셔와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정 벽지를 노려보는 일만 반복했었지. 아니 어느 순간 벽지 무늬 세는 일에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더라니까. 아직도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그 지긋지긋한 마름모꼴들이 생생해. 라면국물이 튄 벌건 자국까지도. 정말이지 끔찍한 무늬야. 그래, 상황만 따지자면 누구보다 다급했지. 인정해. 5층이 아닌 10층이라도 걸어 올라가서 면접을 보고 합격통보를 받아낸 후 일정한 수입을 얻어내야 할 형편이었단 거. 물론 좀 더 재밌고 편한데다 돈도 많이 주는 알바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나 같은 한심한 휴학생에게 그런 일을 시켜 줄 사장님은 없다고 봐야지. 당장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사무직 알바야 좀 지루하긴 해도 나처럼 예민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 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적은 편이니까, 그런대로 내 시간도 있고 말이야. 그럼, 할 만하지.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리 나쁜 조건도 아니었다구. 의외로 경쟁률이 꽤 될지 몰라. 혹시 알아? 낡은 회색 건물을 닮은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사장님으로부터 꼬박꼬박 미스 리, 라고 불리게 될지. 뭐 어때, 적어도 지금보단 안전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일주일에 5일정도 미스 리로 사는 거, 나쁘지 않아 보였어. 방바닥에서 벽지무늬 헤는 밤을 보내느니 5층 계단 오르는 아침을 맞는 게 건강에도 좋고 생활에도 유익하고, 안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 자리 옮기자. 메뉴는? 아, 파스타 먹고 싶다고 했지. 그래도 꼬리곰탕 같은 게 더 나을 텐데.


사실 본격적으로 너한테 할 얘긴 이제부터라고. 밥 먹기 전 화장실 얘기 꺼내게 된 건 유감이지만 말이야. 여기, 주문요! 자, 자, 그러니까 면접 시작 5분 전, 화장실의 지독한 악취에도 불구하고 난 금이 간 세면대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바쁘게 재점검에 들어갔어. 왜는, 사장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뭐 내자랑은 아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작정하고 꾸미는 날엔 남자들이 침 좀 흘리잖아. 야, 물은 왜 뿜어! 알았으니 진정하고 들어봐. 번진 아이라인을 다시 그리고, 마스카라를 덧칠하고, 반짝이는 립글로스를 다시 발라주고, 땀으로 얼룩진 볼 화장을 조심조심 고치고, 들러붙는 스커트자락은 물을 좀 묻혀서 가능한 바짝 올려 입고, 하이힐과 벗겨진 뒤꿈치 사이에 사무실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구겨 살짝 집어넣어주고, 또 뭘 했더라, 그래, 하늘거리는 쉬폰 블라우스를 좀 더 타이트한 실루엣으로 만들기 위해 가슴 쪽 리본 끈을 풀었다 다시 매고, 단추를 끼웠다 풀고 하면서, 그야말로 알차게 남은 5분을 활용하고 난 뒤, 드디어 운명처럼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어. 두두둥, 바로 이런 효과음이 필요한 순간이었지.


“주문하시겠습니까?”


이런, 타이밍하곤. 넌 뭐? 봉골레? 난 카르보나라. 다른 건? 내가 쏜다니까. 말했지, 나 이제 돈 많다고. 좋아, 그럼 이따 더 시켜. 저기요, 우선 이거랑 이거 먼저 주세요.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약속 된 면접 시간, 나는 사무실 문을 빠끔히 열고 쭈뼛쭈뼛 들어섰어. 보기보다 낯가림이 좀 심하잖니. 누군가 바로 돌아봐 줄줄 알았지만 두 명의 직원 모두 하나같이 컴퓨터 모니터만을 전투적으로 노려 볼 뿐이었어. 사무실 안 공기는 조용하고 눅눅하며 꽉 막혀있었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과 파티션들은 무척 지루해보였고. 휑한 벽면에는 고장 난 플라스틱 벽시계가 뜬금없는 시간에 멈춰있었어. 내가 둘 중 그나마 또랑또랑해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저기요, 면접 보러 왔는데요, 라고 하자, 그는 으악, 깜짝이야, 라고 소리치더니 잠깐만요, 하곤 마우스를 쉴 새 없이 움직인 후, 조용히 일어나 사장실은 이쪽입니다, 라며 왼쪽 끝의 유리문을 가리키더군. 모니터엔 전사 복장의 게임 캐릭터가 괴물좀비들과 한창 피 터지는 전투 중이었어. 아무렴, 쉽게 한 눈 팔 수 없는 순간이지. 더군다나 그 정도 고랩 유저라면, 이해해. 아니 모두들 전투적으로 모니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난 진심으로 이해 한다구. 아마 그들은 스피커 소리를 죽여 놓은 채 자신이 피 흘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방바닥에 누워 마름모꼴 벽지무늬를 세는 데 몰입했던 것처럼 말이야. 난 피 터지는 전투에 몰입한 채 마우스만 딸깍대던 무표정한 직원들을 쳐다보면서 어쨌거나 자포자기에 날 잡아 잡수, 보단 이런 전투적인 사무실 분위기가 더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


사장실, 이라고 할 것까지 없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예상과는 달리 마흔 중반 쯤 돼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가 통화를 마무리 지으며 막 수화기를 내려놓는 중이었어. 입사 지원자에게 신뢰를 줄만한 적절한 첫 장면이었지. 책상위엔 그에게 메일로 접수 된 지원서 뭉치가 쌓여 있는 것 같았어. 사장은 쉽게 내 이력서를 찾아내더군. 지원자들 간의 면접시간이 철저히 나누어져 있나보다, 했지. 이쪽으로 앉으시죠, 인상 좋은 사장은 그날따라 무료했던 게 분명해. 도대체가 별 쓸데없는 걸 꼬치꼬치 캐묻는데 나중엔 내 이력이 오죽 한심하면 그냥 심심풀이로 면접을 보는 걸까, 싶더라니까. 아르바이트경력, 문서작성능력, 교통편, 학교, 전공, 학점, 휴학사유, 졸업 후 진로 따윈 궁금해 하지도 않고, 백수 경력, 현재재정상태, 교우관계, 관상, 체력, 100미터 달리기 기록, 평균취침시간, 알레르기유무, 애인유무, 를 따진 뒤 회사 창립 배경, 고객우선의 경영모토, 분기별 수익현황, 사무실 이전 계획, 사원들의 다양한 경력과 프로필, 등을 거쳐 다시 애인유무, 이별 사유, 마지막 데이트, 휴일 여가활동, 취미, 가장 선호하는 게임, 종류별 게임 경력, 요즘 플레이하는 게임, 최장 플레이 시간, 캐릭터의 종류, 레벨, 소유하고 있는 레어 아이템, 마지막으로 미니홈피주소, 에 이를 때쯤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해 하품을 하고 말았어. 일종의 두뇌 조건반사지. 그동안 지겹게 겪어 온 주선자와 상종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소개팅과 전혀 다를 게 없었거든. 다만 사장은 소개팅에 나온 녀석들보다는 수다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어. 꼼꼼한 정보를 요구하면서도 질문은 간단했고 내가 답변하는 동안 끼어들거나 자기 경험 따윌 들먹이지도 않았어. 그는 내 대답에 아주 가끔씩 동의를, 가끔씩 한숨을, 대부분 침묵을, 일관하며 말을 아끼는 편이었지.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는 진지한 자세였어. 뿐만 아니라 면접 내내 내 가슴과 엉덩이, 다리와 허벅지에 고요히 머물러있는 눈빛 역시 전혀 흐트러짐 없는 일관된 시선이었지. 나는 사장실이 유리문임을 기억하곤 뒤를 흘깃 쳐다봤지만 이미 연두색 블라인드가 촘촘히 내려와 있는 광경에 과연, 하고 생각했어. 이해해. 사장이란 한 발 앞서 늘 주도면밀해야하니까.


그럼,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장은 팔이 아프도록 긴 악수를 하더니 복도를 지나 계단 앞 까지 날 배웅 했어. 반 층쯤 내려왔을 때 문득 못 다한 신호가 또 밀어닥쳤지. 꾸르륵, 꾸르륵, 다시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려고 뒤를 돌자마자 아직도 안가고 서 있던 사장이 당황한 표정을 보이더군. 뭐 하세요, 정말 그렇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이유를 대답하고 있는 건 나였어. 저, 화장실 가려고요, 아마 몸을 살짝 비튼 채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야 하는 내 하이힐이 몹시 아슬아슬 해 보였나보지. 쓸데없는 노파심은.


“주문하신 파스타 나왔습니다. 봉골레, 어느 쪽이세요?”


저 쪽요, 맛있어 보이네. 일단 한 입……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화장실로 한달음에 뛰어 들어가 반복되는 작업을 허둥지둥 마치고나니 그제서 뻣뻣한 휴지 한 장 없음을 깨달은 거지. 난 과감히 소리쳤어. 사장님! 여기 휴지요! 역시나 주도면밀한 사장은 어느 틈에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 화장실 문 위로 조용히 내려주었어. 그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 같았지. 그래, 비웃어라. 니가 그 심정을 어떻게 알겠니? 뭐? 이게 끝이냐고? 설마, 이게 끝이겠니? 성격한번 급하셔. 지난번 헤어숍에서도 제대로 얘기 못하고 헤어져서 얼마나 서운했는데, 오늘은 내 얘기 다 듣고 가야 된다구. 자, 불편하면 여기 쿠션에 팔을 좀 기대시고.


면접합격통보를 받고 내일부터 출근하게 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하고 뭔가 믿는 구석이 생긴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 물론 그 이유가 하늘에서 내려 온 두루마리 휴지 때문이라고 한다면 넌 날 한심하다고 하겠지. 알아. 한심한 생각.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 근데 왠지 그 사무실은 나를 그렇게 구원해줄 것만 같았어.


우중충한 회색 건물을 빠져나오자 햇살이 눈부시더군. 연이어 쪼그리고 앉아 아랫배에 힘준 탓인지 온몸에 힘도 없고 몹시 어지럽기까지 했어. 화장실 악취 탓인지 머리도 띵하고 말이야. 난 큰길로 나와 버스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았어. 벗겨진 뒤꿈치에서 피가 나와 제법 쓰라렸어. 바람은 신선한 봄바람, 공기가 달랐지. 그제야 거리가 온통 벚꽃과 목련으로 가득하단 걸 알아챌 수 있었어. 까르르,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들의 넘어가는 웃음소린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옥타브였지. 걸어오는 남녀커플은 두 손에 구름 같은 솜사탕을 들고 오는 바람에 반달모양의 눈웃음밖에 안 보였어. 쇼핑백을 한 가득 든 모델 같은 여자는 바로 앞 건널목에 주차된 매끈한 스포츠카로 폴짝, 올라탔고, 건널목정면의 통유리 카페엔 커피를 홀짝대며 최신형 노트북을 두드리는 뿔테안경의 긴 손가락이 몹시도 바빠 보였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런웨이를 행진하듯 거침없이 걸어갔어. 아무도 돌부리에 걸리거나 높은 굽에 삐끗대거나 흐물흐물 휘청대진 않았어. 찾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의 구두엔 뭔가 다른 바코드라도 입력 된 걸까. 길바닥마저도 너그럽게 인식하는 그런 바코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두운 지하 던전에서 좀비들과 싸우기엔 너무 화사한 봄날 오후였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벽지무늬를 헤아리기엔 너무 낯 뜨거운 햇빛이었어. 나는 핸드백을 뒤적여 휴대폰을 찾았어. 휴대폰에선 지독한 화장실 냄새가 났지.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메시지를 쓰다가 지우다가, 벨소리를 바꿨다가 진동으로 다시 바꿨다가, 이래저래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몇 시나 되었나, 몇 시쯤에 들어가야 적당하나,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순간이었지. 두두둥, 그래, 사장의 전화였어.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그의 말투는 간결 했지만 내겐 간절하게 들려오더군. 마치 내가 없으면, 날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 할 것 같다는 고백처럼.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두터운 지원서 뭉치를 제치고 당첨된 것 치곤 어쩐지 좀 시시하기까지 한 걸, 순식간에 여유만만해진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지. 하지만 튕길 필요까진 없었어. 지난번에도 공연히 재다가 소식 끊긴 적 있었거든. 멍청하게도 가끔 면접과 소개팅을 구별 못 하는 게 탈이라니까. 아무튼 괜한 도도함은 접기로 했지. 그 전화야말로 벽지 무늬를 세던 천정을 뚫고 내려 온 든든한 동아줄임을 부정 할 순 없었으니까. 난 동아줄을 꼭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줬지. 사장님, 고마워요! 낼 봬요! 너무 유치하다고? 니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대개의 감정은 거창하게 포장될 뿐이야. 포장을 벗긴 감정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거든. 알고 보면 모든 결정은 한없이 유치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한 감정의 흐름. 그러나 결코 억누를 수 없게 쿡쿡 통증을 유발하는 충동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넌 잘 모를 거야.


어디선가 긴 바람이 불어왔어. 바람이 지나가자 곧 기다리던 버스가 스르르 도착하더군. 바로 코앞에서 버스 문이 열리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 오더라고. 그래 또 유치하다 해도 좋아. 이제 세상은 날 향해 문을 활짝 열어주는구나, 그래, 그렇게 모든 게 척척 풀리는구나, 뒤꿈치에선 피가 흘렀지만 발걸음은 가뿐했어. 정말이지 인간의 감정이란, 신기하지 않니?


여기 피클 좀 더 주세요. 배고프다더니 어째 잘 못 먹네. 속이 별로 안 좋아? 내가 화장실 얘길 너무 오래 했나? 하지만 이제부턴 니 취향에 맞는 흥미진진한 얘기니까 걱정 마.


첫 출근, 너무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남들 다 하는 출근, 이란 걸 하게 되니까 무뎌진 온 몸의 세포가 흥분하기 시작하는 거야. 국사책에 나올법한 그 우중충하고 낡은 건물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건물로 보였고, 엘리베이터 없이 오르는 5층 계단은 직원들의 근력발달을 돕는 훌륭한 운동기구로 느껴졌으며 사무실의 고즈넉한 분위기 역시 업무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고, 누가 들어 오건말건 말없이 게임에 몰입 중인 직원들은 내가 파티사냥으로 한 판 붙어 주면 금방 엄지를 치켜들고 찬사의 말을 쏟아낼 것 같았지.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 내게 사장은 자잘한 얕은 주름을 지으며 웃더니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치레부터 건넸어. 그리곤 모두 주목, 훈련조교 같은 목소리로 달랑 두 명뿐인 직원들을 향해 진지하게 내 소개를 시작했지. 그제야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된 두 명의 직원들도 설렁설렁 통성명을 마치더군. 물론 워낙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는 바람에 도대체 그게 본명인지, 게임 아이디인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지만.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셔츠가 경쾌해 보이는 서른 초반쯤의 남자는 이반 씨, 빛바랜 양복을 츄리닝처럼 소화하고 있는 마흔 중반의, 아니 가끔은 환갑처럼 보이기도 하는 후줄근한 아저씨는 언데드. 그러니까 반 씨와 언데드 아저씨, 난 이들과 직장동료가 된 거였지. 그래, 동료를 가져 본지도 오랜만이었어. 모두 제자리로, 다시 훈련조교 같은 사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도 어디로든 해산해야 할 것 같아 쭈뼛 쭈뼛 서성거리고 있었지.


사장은 날 유리문 안으로 부르더군.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어. 커피 심부름이나 문서 작성, 복사 따위의 일은 기대도 말라고. 사무직 알바잖아요? 내 반문이 무색하게 그는 싱긋 웃고는 간단한 계약서니 읽어보고 질문하라며 내 앞에 몇 장의 종이를 들이밀었지. 빽빽하게 들어 찬 글자만 봐도 머리 아픈데 갑이니 을이니 뭔 소린지 모르겠더군. 그런데 몇 줄 읽다보니 뭐야, 이건, 하며 코웃음 치게 되는 거야. 몇 줄 더 읽으니 웬걸, 이거 계약서야, 소설이야, 싶다가, 조금 더 지나선, 혹시 날 시험해보려는 면접의 연장인가, 란 생각까지. 아니, 아니, 이건 아니지. 뭔가 이상한 사이코 회사가 틀림없어, 난 점점 의심스러워졌어. 그리고 결국 마지막 줄에 을, 이라 불리는 내 서명난이 보이자, 난 이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사장은 내 표정을 찬찬히 살폈어.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 그 와중에도 난 사장의 예상과 달리 제법 영리한 신입사원임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곧바로 아는 척 대답했지. 그러니까 고객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복수를 돕는 거군요, 빙고! 사장은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호응을 하더니 멋쩍은 듯 머리칼을 쓸어 올렸어.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 그 목표물이란 걸 프로그램화 한 후 온라인 게임에 투입한다, 고 하는 데 이거 무슨 전체관람가의 판타지영화시나리오냐고, 이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데, 혹시 내가 중학교쯤 휴학인걸로 보이냐고, 아님 여기가 말로만 듣던 취업사기단의 온상지냐고. 기가 막혀, 나 참. 사장은 기껏해야 그런 상식적인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젠장, 그렇다면 이건 게임을 빙자한 청부복수 쯤 되는 게 아니냐고, 사무직 알바 채용은 사기였냐고, 아니 뭔가 더 그럴듯한 사기였다면 덜 억울할 지경이라고, 난 거의 몇 분간 혼자 열을 내며 소리를 질러댔지. 이 미친 회사에 동참할 수 없고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서명 할 수 없으니 이만 관두겠다고, 아니 그전에 일단 이 불법 영업행위를 경찰에 고발해야겠다고, 각종 일간지와 주간지, 방송사의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비롯해, 노동부나 근로복지 공단, 중소기업진흥청, 한국 소비자 연맹, 문화관광부, 한국 게임 산업 진흥원, 저작권위원회, 인터넷 취업포탈 사이트, 취업 정보공유 카페 날아라 백수, 건전한 e스포츠 만들기 위원회, 등등 내가 아는 모든 시민단체, 아니 어느 게시판이든 들어가 이런 사이코 회사를 조심하라는 글을 줄줄이 올리겠다고, 이 땅의 순진한 취업준비생들을 등쳐먹는 당신 같은 인간들 때문에 뭔가 해보려는 그들의 마지막 피와 땀이 어쩌구, 저쩌구, 여기까지 온 차비와 통신비, 그러니까 이 허위 공고에 대한 면접비 환불이나 준비 해두라고 블라블라블라, 그렇게 얼마쯤 열변을 토했을까. 내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사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어. 혹시 누군가 죽도록 미워 본 적 있나? 죽일 힘도 용기도 없지만, 아니 꼭 죽일 필요까진 없지만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사장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설명을 계속했지. 그저 나 자신의 안정을 위해 그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말끔히 떨쳐버리고 싶은 적, 없었냐는 거지. 증오의 대상이 날 굳이 눈치 채지 않아도 좋은, 편안하고 산뜻한 방법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진행 되는, 손에 피 한 방울 묻지 않는 우아한 복수 말이야. 죄책감은 필요 없어. 기껏해야 지푸라기 인형에 바늘을 찔러대는 부두교의 저주 수준과 다를 바 없으니까. 말하자면 간편하고 배부른 인스턴트식 복수,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심한 복수라고나 할까. 사장이 뭘 설득하고 싶은지는 알겠더군. 하긴 그런 인간이 왜 없겠어. 살의를 느끼지만 살인할 수 없고 살의까진 아니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되는 보기 싫은 인간들, 널렸지.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난 선뜻 계약에 동의할 순 없었어. 우선 계약서에 적힌 그 우스운 시스템이 믿기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지원한 일은 엄연한 사무직 알바지, 복수 담당도우미가 아니었으니까. 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설득방향을 바꾸기로 한 것 같았어. 재밌고 편한데다 돈도 많이 주는 일을 원하지 않나? 나는 냉큼 에이. 그런 일이 어딨어요, 라고 말할 뻔했어. 다행히 사장이 먼저 덧붙이더군.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하긴 모든 일엔 양면성이 존재하는 법.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 회사모토는 고객우선이고 그건 곧 의뢰인 위주로 생각한다는 얘기, 의뢰인이 단 몇 분의 플레이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면 이는 처방전 없는 진정한 심리치료일터. 그래봤자 가상현실 속 복수이고, 상대방은 알 턱도 없고, 괴로워하던 당사자만 마음 편안해지고 정신건강 회복하고 삶에 활기 좀 얻는다면 그게 그리 큰 문제 될 거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합법도 아니지만 불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떤 흔적도 증거도 남지 않는데다 아직 어디에도 보급되지 않은 특수 스캐닝 장비에 관한 관련법 따위도 없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뭐 도덕적으로 목표 대상자에게 양심의 가책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만 그건 고객 상담을 거친다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거란 걸 보장하지. 아마 한 인간으로 인해 의뢰인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대상자에 대한 의뢰인의 적의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될 거야. 생각해봐, 눈에 가시 같은 인간 때문에 하루하루가 괴로운 나의 고통을 과연 누가 대신해줄 수 있겠어? 우리 회사의 이 획기적인 시스템이야말로 결코 사회나 국가가 해주지 못하는 개인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 인류의 정신건강을 위한 최첨단 복지 시설과 다름 아님을, 곧 깨닫게 될 거라고.


복지시설? 복수시설이겠지. 나는 사장의 말이 끝나자 속으로 웅얼댔어. 정말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렇더라도 어째……사장은 설명을 마친 후 서랍에서 붉은 인주를 꺼내 올려놓았어. 그는 이 일에 무궁한 긍지와 자부심, 심지어 어떤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 누구도 눈치 못 챌 소심한 복수라, 아니, 뭐 이런 말, 도, 안, 되, 는……나는 말도 안 되는 걸 짚어주려고 내동댕이친 계약서를 천천히 다시 넘겨보았지. 사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로젝트 당 성과급에 관해 얘기했어.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지. 저, 정말요? 기대 이상이었어. 아니 솔직히 내 처지엔 꿈도 못 꿀 액수였지. 고객우선, 고객우선, 단지 고객의 고통을 덜어주고 돈을 받는 서비스업일 뿐이라고, 난 냉철해지기로 마음먹었어. 해보다가 관둬도 늦지 않다 생각했지. 계약서를 다시 넘기던 나는 결국 마지막 장에 사뿐히 서명을 마치고 지장까지 찍어줬어. 그래, 마침내 고객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들이 의뢰한 목표물을 처치해주기로 결심한 거야. 물론 게임 속에서. 마치 히어로가 된 기분으로 두 어깨가 묵직해진 채 사장실을 나오자, 새 직장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날 맞아줬지. 반 씨는 폭신한 마우스 패드를, 언데드는 전자파 방지용 선인장을, 각각 내 품에 안겨주며 너도 공범자가 된 걸 축하해, 란 표정을 짓더군. 어제보다 한결 다정하게 말이야. 하긴 비밀을 공유한 이들은 피를 나눈 이들보다 더 돈독한 법이니까.


이반씨, 오늘 신규 고객 상담은 신입이랑 같이 진행하도록. 사장은 자리에 앉으려는 날 지목 했어. 반씨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더군. 나는 일단 반씨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고객이 편한 시간과 장소를 잡아야했지. 그게 첫 출근 날 내게 떨어진 첫 업무였어.


통화 연결 음은 의외였어. 중학생이나 좋아서 따라 부를 아이돌 그룹의 시끄러운 랩이었지. 알아듣기 힘든 빠른 랩이 계속 되는 동안 내 심장박동도 빨라지더군. 여보세요? 목소리는 남자였어. 아니 정확히는 남자 얘였어. 학원 보충이 끝나는 밤 10시쯤, 자기 동네 편의점 근처가 좋겠다고 하는 데요, 그러자 반씨는 오케이, 이따 저녁 먹고 출발하면 되겠네, 저녁은 뭘 먹을까? 뭐 좋아해? 나 참, 점심때도 되기 전에 저녁 메뉴를 고르라니.


하품 나는 오후까지 난 유명 쇼핑몰들을 뒤지며 다음 달에 살 수 있는 물건들을 고르고 또 골랐지. 그러다 지쳐 창을 내리며 고스톱을 치고 그러다 지쳐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어나 클릭해대며 이 곳 저 곳 무료하게 인터넷을 서핑 중이었어. 맞은편의 언데드는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대고 입을 헤 벌린 채 부스스한 머리를 연신 벅벅 긁어대고 있었어. 워낙 말수가 없어 혹시 말을 붙여도 말을 못하면 어쩌나 싶어 말 붙이기가 겁이 나는 사람이었지. 파티션을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손거울을 꺼내 보다가, 간간히 화장실이나 다녀오는 정도로 남은 오후를 대충 때우는 중이었어. 그러나 반씨는 심각한 표정이었어. 스캐닝한 목표물의 DNA와 영혼을 게임 캐릭터 안에 주입시키는 중요한 작업 중이니 잠시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하더군. 난 그런 그가 조금 우습게 보였어. 내겐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업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세상에, DNA와 영혼이라니. 내가 계약서에 동의했다고 해서 저걸 다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해.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진 않거든. 그래, 어차피 내 믿음 따위 없어도 잘 굴러갈 사이코 회사잖아. 그러니 적당히 믿는 척해주고 돈이나 제대로 챙기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원래부터 난 인간들의 흐리멍텅한 언어보단 명확한 숫자를 더 신뢰하는 편이었어. 내 방 천정을 메우고 있는 가로 36개, 세로 27개의 징그러운 마름모꼴들, 지하철 5호선과 시내버스 145번 버스를 타야 9시까지 도착하는 회사, 몇 명의 좀비를 죽여서 얼마나 레벨을 높였는지 정확히 표시해주는 게임화면, 몇 분간 얼마의 사용료가 나왔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PC방의 요금 창, 그리고 내 계좌로 입금될 보기만 해도 배부른 일곱 자리 숫자.


저녁을 대충 때우고 낡은 소형차 뒷좌석에 방송국 ENG 카메라처럼 생겨먹은 이상한 기계를 싣자마자 반씨와 나는 신규 고객과의 약속한 장소로 출발했어. 반씨는 운전을 하면서 조금씩 흔들릴 때 마다 뒷좌석에 실은 기계가 어떻게 될까 꽤나 노심초사하는 눈치더군. 알고 보면 이 업무의 핵심이 되는, 그러니까 이 회사의 밥줄이 되는, 저 인간들과 날 먹여 살리는 기특한 기계임은 틀림없으니까. 하지만 난 도무지 그 투박하고 촌스러운 외관에 정이 가질 않았어. 그래도 명색이 최첨단 기계란 게 무슨 80년대 B급영화에나 쓰일 구닥다리 소품 같았다니깐. 아마 니가 봤다면 촌스럽다고 대놓고 비웃었을걸. 진짜야. 넌 워낙에 촌스러운 거 보면 못 견뎌 하잖아. 아니긴 또 뭘 아니야. 저번에 너 헤어숍 따라갔을 때, 기억 안나? 왜 다들 니 머릿결 좋다고 칭찬하고 그랬잖아, 그 때 나보고 너도 머릿결 관리 좀 하라면서, 꼭 무슨 80년대 가수 같다고 놀린 게 누군데. 진짜지 그럼. 쟤 촌스러운 머리 어떻게 좀 해달라고 헤어디자이너랑 둘이 막 웃어놓고는. 어이구, 미안한 건 아셔? 지금 이 머리? 얼마 전에 거기 가서 했지. 괜찮아? 다행이네, 비싸게 주고 한 건데. 잠깐만, 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지? 미안, 미안, 또 샜다. 여기 메뉴판요! 다른 거 뭐 더 시켜. 너 맛있는 저녁 사주려고 했단 말이야. 잘 먹어야 건강해지지. 아픈 데도 빨리 낫고.


무슨 학교 학생인 게 중요해요? 편의점에서 만난 우리의 첫 고객은 얼굴가득 여드름으로 뒤덮인 깡마른 남자애였어. 첨엔 죽어도 그냥 학생이거든요, 라더니 내가 녀석이 뛰어나오던 학원 간판을 가리키자 부정하지 않더군. 특목고 대비 전문, 세상에 중학생일 줄이야. 중 학생인 게 중요해요? 상관없어, 다만 니가 입금하기엔 선금 액수가 좀 많지 않나 놀랐을 뿐이야. 어, 반말이시네. 고객우선이라더니, 쳇. 녀석은 중학생임을 꼬치꼬치 밝혀낸 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물론 나도 부모 잘 만나 풍족한 용돈을 이런 데다 써가며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저주나 퍼부으려는 어린 녀석의 심보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 반씨는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여드름 중학생의 비위를 살살 맞췄어. 이 누나가 게임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니가 플레이 할 목표물을 잘 찾아내서 너에게 넘겨줄 거야, 자, 그럼 목표물에 대해 얘기해볼까? 혹시 형이 반말하는 것도 기분 나빠? 그럼 안 하고, 여드름은 의외로 고분고분해지더라. 그리곤 목표물 얘기가 나오자 왠지 좀 겁먹은 얼굴로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어.


그 자식은 우리학교 짱이고요. 맨 날 애들 패요. 맨 날. 이빨 나가고 코뼈 나가고 갈비 나가고. 암튼 완전 개새끼에요. 그 자식한테 존나 맞고 나면 여드름 다 터져요. 이거랑 이거 이건 다 그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 스트레스. 암튼 전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학기 초부터 신청했을 텐데. 솔직히 처 죽이고 싶은데, 소년원 이런데 가긴 싫고, 엄마는 특목고 가라, 가라 하는데 사실 제 점수론 어림없고. 진짜 가고 싶은 건…… 전학이요. 아주 먼데로. 그 자식 때문에 성적 떨어진 게 얼만데. 내신 완전 안습, 안습. 암튼 그 새끼 죽어야 되요. 우리 학교 애들 중 그 자식한테 당한 애들은 존나 많은데, 또 존나 얻어터질까봐……이거 신청자 쓸 때도 다 지 이름 안 쓰려고, 치사한 새끼들! 제가 몇 명 애들 같이 돈 모아서 이거 신청한 거거든요. 아, 씨발! 아까도 서로 여기 안 나간다고 하다가 제가 게임 져서 나온 거 에요. 대표로. 아이디 나오면 다 돌아가면서 플레이하려고요. 존나 잔인하게. 아, 그 자식요? 그럼 낼 학교로 오세요. 3학년 8반 15번 3분단 뒤에서 둘째 줄. 아, 셋째 줄인가? 잠깐, 잠깐만요, 친구한테 물어보면 되니까……문자 보냈어요. 아, 둘째 줄인지 셋째 줄인지 존나 헷갈리네. 정확히 알려드릴게요. 엉뚱한 자식이 좀비 되면 난감하니까. 쫌만 기다려요. 아, 근데 이 새끼는 왜 또 문자를 씹고 지랄?


잠깐, 잠깐, 영혼 스캐닝은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작업이야. 주위에 소음이나 사람들 기운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프로그램화 할 때 골치 아픈 버그가 생길지도 모른다구, 학교 말고, 목표물이 나타날만한, 좀 더 조용한 장소는 없나? 반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녀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지. 순간 쿡, 하고 웃음이 났어. 영혼 스캐닝 같은 소리 하네, 버그는 개뿔.


학교폭력에 관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음성변조와 모자이크로 처리된 피해 학생과 같은 사연을 특목고 대비반 학생답지 않게 조리 없이 떠들던 중딩 고객과 헤어진 다음날, 난 녀석이 알려 준 그 조용한 장소로 곧장 출근했어. 반씨는 그 투박한 고철기계를 애지중지 옆에 끼고 날 기다리고 있었지. 여기에서 1, 2학년 삥 뜯는 짓거리를 하는 거군, 반씨가 중얼거렸어. 그놈의 영혼을 스캐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 고철덩어리를 녀석의 머리통에 갖다 대나요? 아님 가슴팍에 갖다 대나요? 반씨는 낄낄 거렸지. 이봐, 신입, 어쨌거나 돈이 꽤 급했나보군, 난 뜨끔했어. 이걸 믿고 안 믿고는 자유야. 그리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어. 차라리 안 믿는 게 더 속편할지도 모르고.


저기 와요! 난 고개를 수그리고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겼어. 여드름이 첨부해 준 사진파일에 의하면 가무잡잡하고 찢어진 눈을 한 저 키 큰 놈이 틀림없었어. 난 다소 긴장했지. 반씨는 영혼스캐닝인지 뭔지를 맡았지만 나에겐 다른 임무가 있었거든. 아무래도 젊은 여자가 접근하는 게 목표물의 경계심을 늦출 거라나. 접근하는 이유? 게임 속 목표물의 외형을 재현하기위한 DNA 샘플 때문이라지 아마. 그래, 목표물의 머리카락을 뽑아오는 게 나의 주된 업무이자 다음 작업을 위한 중요한 퀘스트였지. 근데 너무 불공평하지 않니? 영혼 스캐닝인지 뭔지는 왠지 날로 먹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하여튼 아무리 중딩이라지만 만만치 않은 성질머리에 소문난 파이터인 키 큰 놈에게 다가가 대뜸 까치발을 들고 머리카락을 뽑아오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 놈에게 막 얻어맞으려던 1학년들조차 어디서 굴러온 미친 여자냐, 는 식으로 날 쳐다보더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설픈 훈계로 어른 흉내 내며 다가는 것보다 미친 여자 행세가 훨씬 더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됐지. 누나랑 사귈래? 으, 말도 마, 생각하기도 싫다구. 누군가 휴대폰 카메라까지 꺼내드는 바람에 더 이상 끌지 못하고 냅다 뛰었지. 놈의 머리카락 한 줌을 손에 쥐고, 야, 이 씨발년아, 놈의 목이 멘 욕지거릴 뒤로 한 채.


반씨는 신입치고 제법이라며 사장 앞에서 날 추켜세웠어.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중학생의 머리카락을 뽑아들고 튀는 일이 신입치고 제법인 업무능력으로 평가된다는 게 어째 좀 떨떠름하긴 했지. 나는 여드름에게 플레이어를 위한 난이도, 사용무기, 사운드, 목표물의 복장 등 몇 가지 게임옵션의 선택 사항을 문의했어. 녀석은 다른 건 필요 없고 목표물을 오직 주먹으로 처치하고 싶다더군. 어쩐지 주먹으로 많이 맞아 본 듯한 결연한 말투였어. 반씨는 곧바로 작업에 몰입해야했지. 나는 흰 장갑을 끼고 핀셋으로 놈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한 올 한 올 소중히 비닐 팩에 담아 넣었어. 이건 뭐, CSI 수사대라도 된 기분이었지. 의외로 스릴도 있고 잔재미도 있는 하루였어. 반씨가 알려준 대로 나는 고철 기계의 후드를 열어 작은 유리홈을 잘 닦은 후 머리카락을 담은 비닐 팩을 끼워 넣었어. 고철 기계를 USB포트로 컴퓨터와 연결시키고 나자 반씨는 수고했다며 담배 한 대를 꺼냈지. 무슨 담배인진 몰라도 묘한 냄새를 피우더군.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내내 반씨의 담배연기가 끊이지 않는 걸보니 여드름을 위한 좀비 캐릭터 제작은 만만치 않은 일인 듯했어. 그래, 좀비였어. 회사가 만들어내는 게임 속 괴물은 모두 좀비였지. 아무래도 목표물과 가장 흡사한 게임캐릭터여야 고객의 만족을 얻어낼 수 있다더군. 요상하고 기괴한 다른 몬스터도 시도는 했었지만 영 실감이 안 난다며 퇴짜 맞기 일쑤였다나? 하긴 나중에 완성된 화면을 보니 십분 이해가 되더라고. 일상 속에서 꼬박꼬박 날 괴롭히던 그 뻔뻔한 인간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흉한 좀비 꼴로 나타났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고객에게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훌륭한 서비스였지. 그리고 생각해봐. 괴물과 인간보다는 괴물 같은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훨씬 더 리얼한 거라고. 훨씬 더 실감나게 승부욕을 자극한다는 거지. 닭싸움이든 소싸움이든 개싸움이든, 같은 종이어야 피 튀기게 싸우는 거거든. 소 닭 보듯 하거나 닭 쫓다 지붕이나 쳐다보는 개 꼴이라면, 이거 경기가 시시해지거든. 안 그래?


K-321 고객님 접속 중입니다. 반씨가 막 출근하는 언데드에게 소리치자, 그는 자다 덜 깬 모양새로 말없이 컴퓨터 전원을 켰지. 여드름 그 자식이잖아, 아직 목표물 투입 시간 전인데, 성격 한번 급하긴, 반씨는 투덜대며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더니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고는 완성된 목표물 좀비 캐릭터를 보여줬어. 어때? 그 키 큰 놈과 좀 닮아 보여?


세상에! 나는 입을 헤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지. 좀 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더군. 무서우리만치 완벽한 복제였어. 그것도 아주 끔찍한 좀비로. 이거 대단 한데요! 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지. 헐리웃 최고의 CG팀 못지않았어. 이게 그 발음하기도 민망해지는 영혼 스캐닝의 결과인가? 영혼이라니, 그런 구닥다리 단어를 붙이기엔 아까웠어. 반씨가 다시 보이더군. 난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지. 머리카락 한 올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이야.


처음에 사장이 재미도 있고 돈도 많이 주는 일을 운운할 때만 해도 별 기대 없었거든. 나야 사이코 회사의 꿍꿍이엔 관심 없고 오로지 근거 없이 두둑한 수당에만 관심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은 점점 재미있어졌어. 스릴과 흥분도 있고 보람과 만족도 있었지. 새로운 의뢰인을 만나고 그가 꼰질러 준 목표물을 뒤쫓는 모험, 목표물을 미행해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뽑았을 때의 그 희열, 첫 플레이때 게임 속에서 의뢰인과 그의 철천지원수를 만나게 해주는 감격, 의뢰인의 복받치는 플레이를 관전하며 들이켜는 맥주 한 캔, 지루할 틈이 없었지. 몇 주가 지나자 왜 모두들 게임 중인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어. 사장이 가진 자부심과 사명감이 뭔지도 조금은 알 수 있게 됐고 말이야. 색다른 경험이었지. 한 때 갖가지 게임을 섭렵했던 나로선 솔직히 의외기도 했고. 사실 반씨와 언데드가 만들어낸 이 온라인 게임은 목표물 캐릭터 외엔 배경이나 사운드, 스토리 전개 면에서 상당히 고리타분한 스타일이었으니까. 아마 요즘 초딩에겐 공짜로 줘도 안 할 걸.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광고 하나 없이 순전히 지하 경로를 통해서, 그러니까 누군가의 소개나 입소문을 통해 신청하고 입금한 후 상담을 거쳐 게임시디와 아이디를 배송 받은 유저들만 이미 수백 명을 넘어섰다는 거, 그들 모두 단 한명의 영구탈퇴도 없이 매일 꾸준히 접속해서 일정시간 플레이를 즐기고 있다는 거, 분명 엄청난 중독성을 가졌단 얘기지. 품질은 별로라도 묘하게 맛이 있어 자꾸 손이 가는 불량식품처럼 말이야. 이 낡은 게임에 왜 그렇게 고객유저들의 접속이 끊이지 않는 걸까. 뭐 그건 좀 있다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여드름은 전사복장을 갖추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드넓은 벌판에 서있었어. 난 어딜 헤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여드름의 목표물 좀비를 찾아내야했지. 다행히 다른 좀비들과 떼 지어 다니지 않아서 빨리 발견할 수 있었어. A23구역의 폐교에서 발견 된 놈은 찢어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느릿느릿 걷고 있었어. 소환해, 반씨의 말에 마우스를 클릭하자 목표물 좀비는 폐교에서 빠져나와 여드름과 맞짱 뜨게 될 벌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타났어. 흰 눈이 드문드문 날리는 새벽녘 벌판이었어. 좀비들은 그 시간을 좋아하지. 즐겜! 메시지 창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난 순수한 관객이 되었어. 여드름 전사는 주먹을 무기로 쓰는 만큼 육중해 보이는 커다란 덩치더군. 목표물 좀비가 멋모르고 먼저 달려들었지. 여드름 전사는 오른쪽 주먹으로 좀비의 얼굴을 가격했어. 우워어어어, 비명은 실제 목표물의 목소리와 비슷한 음색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어. 과장되지 않은 효과음은 기계를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바로 앞에서 내가 아는 이들의 싸움을 보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지. 어쩜, 일그러지는 표정까지도 완벽했어. 여드름 전사는 자신이 첫 번째로 날린 훅이 믿기지 않는지 잠깐 주춤하는 듯했어. 근사한 훅이었지. 칼이나 총 같은 다른 무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이야. 복수의 칼을 가는 조잡한 짓보다는 주먹 한 방을 제대로 쳐주는 게 훨씬 더 시원스러운, 백퍼센트의 완승을 거둔 기분이라고나 할까.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나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훅은 이미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지. 아마도 모니터에 모여 집중하고 있던 중학생들은 여드름의 통쾌한 한방에 PC방이 떠나가라 환호했을 거야. 서로 마우스를 뺏으려 난리법석일지도 모르지. 환희의 복수는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어. 몇 명이 돌아가면서 하는지 어쩌는지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더군. 목표물 좀비는 거의 탈진 상태, 이제 곧 플레이어와 목표물 좀비 사이의 방어 및 공격 행위들이 수치화 되어 현재 목표물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알려주는 순서만을 남겨 놓고 있었지. 이 정도면 조만간 어린 놈 하나 보내겠는걸, 반씨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둘러 난이도 조절에 들어갔어. 분노에 찬 중딩들의 복수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여드름 전사는 탄력을 받았는지 점점 능숙해졌어. 팔을 구부리고 유연하게 허리를 회전시켜 훅, 훅, 훅, 목표물 좀비의 얼굴을 강타, 또 강타, 쉴 틈 없이 날렸지. 이게 이렇게 통쾌한 건 줄은 몰랐는데요, 다른 무기가 시시해지겠어요, 혼자 모니터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해하는 중, 언데드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더군. 설마 입을 열리라곤 생각 못했어.


암, 통쾌한 무기지. 그러나 훅을 날려야 하는 순간은 아주 눈 깜짝 할 사이야. 대부분 그 한방을 날리지 못하고 슬금슬금 내빼고는 뒤돌아서 온갖 욕설을 내뱉기 일쑤지. 잘했어, 이정도면 충분해, 이정도가 교양인의 매너지, 더 얽혀봐야 좋을 거 없어, 욕이라도 내뱉으니 이 얼마나 시원한가, 씨발! 그렇게 포기하는 거야. 훅의 기회는 길지 않아.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하는 인간은 매우 드물지. 반드시 권투레슨을 받을 필요도 없고 지독한 관장에게 쌔빠지는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어. 훅은 기술이 아닌 본능이야. 우리 몸 안에 이미 내재 된 본능이지. 배설하는 기술 따위 따로 배운 적 있나? 그저 타이밍만 잘 맞추면 되는 거라구. 순간을 망설이다 애꿎은 지 빤쓰에 지리지 말고 신호가 올 때 냅다 싸질러 버리란 거야. 아주 상쾌해지지. 쌓인 숙변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라구.


언데드의 목소리를 이렇게 오래 들은 적은 없었어. 침을 튀겨가며 일장연설을 하는데, 마치 왕년의 챔피언이 멋모르는 신참을 앞에 놓고 과거 화려했던 전적을 회상하는 조금은 서글픈 모양새 같았지. 훅이란, 그런 거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남몰래 주먹을 꼭 쥐어봤어. 언데드의 얘길 들으니 나도 누군가가 떠오르더군. 망설임 없이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내 본능을 살살 일깨우는 누군가가 말이야.


고철기계를 조심스레 건네주며 반 씨는 고객 건이 끝 날 때마다 매우 꼼꼼히 청소해줘야 한다고 했지. 그래야 다음 목표물 스캐닝 때 그 놈의 버그가 생길 염려가 없다고 말이야. 유리홈은 반드시 흐르는 물에 씻어야하고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김없이 배수구에 쏟아버려야 한댔어. 까다롭긴. 난 두 팔로 고철기계를 안고 화장실문을 발로 박찼지. 생각보다 꽤 무겁더군. 시커먼 고철을 화장실 세면대에 올려놓고 반 씨가 설명한대로 말끔히 이 곳 저 곳을 닦아냈어. 그래, 그 때까지도 그 곳의 악취와 머리카락뭉치, 이름 모를 벌레들이 저 투박스러운 기계와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깨끗이 닦았어? 그럼 서늘한 그늘에서 건조할 것, 반씨는 구석에 놓인 캐비닛에 넣어 두라고 하더군. 곰팡이 냄새 나는 캐비닛 안이 서늘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이봐, 신입, 배수구가 막혀서 악취가 더 심해졌을 거야. 화장실 문은 되도록 열어두라고. 머리카락 뭉치에서 나는 악취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까. 왜긴? 그것들은 누군가로부터 지독한 저주를 받은 영혼들이라고. 저주받은 영혼들은 자신의 존재를 냄새로 피워내지. 그 냄새는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어. 잡생각이 많아지면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한다구. 그러니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참, 벌레가 지난달보다 두 배가량 늘었더군. 벌레 퇴치 업체? 모르는 소리, 그걸로 없어지는 놈들이 아니야. 스캐닝 과정에서 생겨나 프로그램 속에 침투하지 못한 버그들이 숨어 있다가 기계 청소 중에 밖으로 빠져 나오면서 그만 진짜 벌레가 되고 만 거지. 그래서 기계 청소가 중요하단 거야. 물론 저것들이 저렇게 커지기 전에 흐르는 물에 휩쓸려 배수구로 떠내려 가버린다면 별 문제 되지 않지만 오래 청소를 안 하면 벌레들이 갈수록 커지거든. 수챗구멍으론 떠내려가지도 않게 된다니까. 아무튼 다음번 사무실 이전 때는 화장실의 배수구와 환기구를 중점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사장의 말씀이 있었으니, 어때? 좀 더 버틸 수 있지? 뭐 설마 벌레들이 사무실까지 바글거리겠어? 반씨는 호기롭게 말하면서도 인상을 구기며 어깨를 흠칫 움츠렸어. 문득 면접날 그 악취 나는 화장실에서 내 발등 위로 기어오르던 긴 더듬이의 벌레가 떠올랐지.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 버그가 되지 못한 채 화장실 타일바닥을 헤매야하는 비운의 벌레들, 주인 잘 못 만나 본의 아니게 저주받은 영혼의 악취를 풍겨야하는 머리카락 뭉치들, 어쩐지 반씨가 어깨를 움츠리는 게 이해되기도 하더군.


여드름의 공격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해졌지. 관전이 조금은 심드렁해질 무렵, 새로운 고객과의 미팅이 잡혔어. 출동해, 사장은 나와 언데드를 지목하며 말했지. 악의 무리를 소탕하려는 우주 사령관처럼 말이야. 악의 무리는 커녕 벌레 소탕도 못하는 마당에 출동은 얼어 죽을.


언데드는 느릿느릿 낡은 소형차 뒷좌석에 고철기계를 실었어. 면허 없냐? 내가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있단 거야, 없단 거야? 짜증을 내더라고. 난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 아직 없는데요. 한숨을 쉬는 그의 입에서 점심때 먹은 김치찌개 냄새가 났어. 난 조심스레 조수석으로 들어가 안전벨트를 맸고 그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츄리닝 같은 양복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져 선글라스를 꺼내 쓰곤 시동을 걸었지. 언데드의 운전은 한마디로 말해 모든 게 귀찮은 운전, 마지못해 차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뭐 언젠간 도착할 테지, 의 운전패턴이라고나 할까. 마치 유유히 강을 건너는 뱃사공이 세월아 내월아, 노 젓듯 핸들을 잡더라니까. 약속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어찌나 규정 속도를 지켜 대는지, 뒤차는 빵빵대고 속은 답답하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구. 몇 년 전 운전면허 필기시험 59점에 빛나는 내 억울한 점수가 진정 후회되는 순간이었지.


약속시간 15분을 경과하자 예상대로 고객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어. 눈가의 깊은 주름으로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여자는 자신을 웨딩플래너라고 소개하더군.


늦으셨네요. 뭐 굳이 이렇게 만나 뵐 것 까진 없는 데, 회사 방침이라시니. 아무튼 여기 사진 가져왔어요. 이 남자에요. 맞아요, 남자친구였었죠. 두 분도 남의 연애사 일일이 듣기 피곤하실 테고, 저도 처음 뵙는 분들께 구구절절 설명 드리려니 좀 그렇군요. 그냥 이 게임에 흥미를 느꼈고 어떤 건지 직접 한 번 플레이 해보고 싶었다는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그러다 제가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면 계속 진행하는 거고 듣던 것과 달리 시시하다면 그냥 관두면 되는 거고요. 아, 그래요? 장담하시는군요. 어쨌든 그렇게 장담하시니, 기대해보죠. 그리고 몇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선, 이 친구 주변은 늘 북적 거려요. 목표물, 글쎄 이 말이 딱히 입에 붙진 않는군요. 어쨌든 그 목표물을 캡쳐 하신다고 했나요? 아, 스캐닝요? 아무튼 그러려면 주위가 조용하고 사람이 없을수록 좋다고 하시던데, 이 친구는 그런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되요.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 때문에 얼굴 볼 틈이 없었거든요. 아마도 기회를 포착하시려면 같이 움직이시면서 고생 좀 하실 것 같네요. 또 하나는, 그러니까 이 친구의 캐릭터를 제작하실 때 꼭 좀 염두 해주실 게 있는데요. 엉덩이 위쪽에 새겨진 나와 이 친구의 이니셜 문신을 빼놓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복장도 거기에 맞춰 주시고요. 어쨌든 전 그게 있어야 실감이 날 것 같거든요. 소개해주신 분의 말에 따르면 이 게임의 생명은 실감, 이라더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에 제가 이 친구 캐릭터를 가지고 노는 게 지겨워진다면 중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가능한 지도 알고 싶어요. 제가 좀 참을성이 없고 금방 질리는 편이거든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더 궁금하신 거 있나요? 없으시면 먼저 실례 좀 해야 될 것 같네요. 저도 고객 상담이 잡혀 있어서 말이죠.


웨딩플래너 고객은 서른 중반의 미혼 여자였어.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란 작자는 나이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났을 거고, 그에 대한 분노를 안으로 다스리다 못해 밖으로 표출할 곳을 찾던 중 우리의 최첨단 복지시설까지 굴러온 걸 거야. 남자친구에 대한 집착과 미련에 매일 밤 질질 짜면서도 겉으로는 쿨한 여자로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이라니, 안쓰럽지만 너무 티 나더군. 직업적 영향에서 오는 논리에 대한 강박으로 저런 말투와 행동을 보이곤 있지만 실제는 그와 딴판으로 마음이 여리고 감정적인 편이라 플레이 도중 남자친구보다는 남자친구와 바람난 상대 여자 쪽으로 목표물을 바꿀 우려가 다분해 보였어. 언데드도 이런 내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했지. 원래 마음 약한 플레이어들이 곧잘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군.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최소 3개월 안에 다시 복귀할 확률은 99퍼센트에 이른다나. 그건 목표물의 존재가 어차피 고객의 일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거나 감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 잊었다가도 다시 보면 스트레스가 되고, 어느 정도 플레이로 시들해졌다가도 다시 적의로 부글거리게 되는 현실과 맞닥뜨리기 일쑤고, 그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예전의 통쾌했던 해소법을 찾아 재신청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하지만 단순히 마음 약한 플레이어들보다 더 갈팡질팡하는 골칫거리는 웨딩플래너처럼 소위 남녀문제일 경우라는데, 언데드는 개인적으로 이런 부류의 고객들을 가장 귀찮아한다고 했어. 증오인지 애정인지도 구분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것들 말이야. 그런 플레이어와 목표물을 위해 다른 게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떠냐며 사장에게 기획안을 낸 적도 있다더군. 스테이지는 분위기 좋은 카페, 놀이공원, 클럽, 레스토랑을 거쳐 죽이는 모텔까지, 그리고 두 캐릭터를 소환해서 주구장창 응원하는 거지. 데이트 코스는 지들끼리 사연이 있는 장소와 배경음악을 옵션으로 설정해주고. 얼마간 그렇게 게임 안에서 지들끼리 회포를 푸는 거야. 그간 얼굴보고 말 못한 열띤 대화든, 사이버 머니 팍팍 쓰는 열띤 데이트든, 현실에서 못 해본 열띤 섹스든, 못 할 게 뭐있냐고. 착실히 사랑을 쌓아 레벨 업이 될 때마다 영혼 스캐닝으로 만들어진 상대 캐릭터의 식었던 마음도 차츰 뜨거워지고, 실제 목표물의 영혼도 서서히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거지. 목표물의 호르몬 수치, 바이오리듬을 고려하고 긍정적인 기억을 유도하여 정확한 타이밍에 공지창이 뜨면 고객은 그 순간 전화 한통만 날려주면 끝.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훅이라나. 언데드 답지 않게 청순하더군. 기획안? 물론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지. 사장이 그러더라나. 임마, 그런 걸 다 해본 여자랑 왜 또 하고 자빠졌냐?


웨딩플래너의 목표물을 만나기 위해 언데드와 나는 그녀가 가르쳐 준 남자친구의 아파트 앞에서 암담한 잠복에 들어갔지. 어디로 갈지도 일정치 않고, 누굴 만날지도 알 수 없는데다, 야근과 밤샘이 잦아서, 한마디로 말해 워낙 불규칙한 변수가 많은 목표물이다 보니, 뭐든 귀찮은 언데드에겐 이리저리 목표물을 따라다니기보단 그저 한 곳만 파는 잠복작전이 손쉬웠을 거야. 그래도 언데드는 이번 건이 제법 재미있을 거라더군. 왜요? 그는 영혼 스캐닝과 DNA 샘플로는 문신이나 피어싱, 반영구화장이나 성형 같은 후천적인 외적 변화를 담아낼 수 없다고 설명했어. 고로 고객의 간곡한 부탁인 캐릭터의 문신 재현을 위해 직접 목표물의 엉덩이를 관찰하지 않을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라나? 언데드는 낄낄 대더니 나보단 니가 더 의욕적일 것 같군, 요령껏 잘 찍어놔, 라며 반짝이는 디카를 건넸어. 나보고 웨딩플래너의 남자친구 엉덩이를 까고 사진을 박아 오란 건데, 그래, 업무치곤 제대로 독하지. 이건 엄연히 변태 영업행위 아닌가요? 언데드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아끼는 디카니까 잘 다루라고 한마디 하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갈수록 태산이었지.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잠복이란 생각보다 지루했어. 슬슬 배가 고파진 난 꽤 먼 편의점에서부터 양 손에 뜨거운 컵라면을 들고 와 겨우 유리창을 두드렸지. 졸고 있던 언데드는 컵라면을 받아들며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더군. 잠복용 식사메뉴를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로만 생각하는 건,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냐? 구제불능 언데드. 난 잠복의 로망은 컵라면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대뜸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럼 뭐 드시고 싶으세요, 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지. 꼭 간편할 필요 있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오늘은 곱창이나 생선구이 정식 같은 게 딱 인데 말이지. 그럼 드시고 오세요, 아직 나타날 것 같진 않으니까. 반쯤은 비꼬는 말이었건만 설마. 그는 그럼 갔다 올까, 되도록 빨리 올게, 라며 냉큼 일어서더군. 정말이지 선배의 포용력은 커녕 기본적인 파트너쉽 따위도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이라고. 얼마 후 기가 막힌 생선구이 집을 찾았다는 언데드의 전화를 받고 불어터진 그의 컵라면을 몇 젓가락 떠 넣다가 확 신경질이 나버렸을 즈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


그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는 목표물이 츄리닝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퇴근시간도 안 된 이른 오후, 떡하니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거야. 다시 봐도 또 봐도 사진과 동일했어. 다른 게 있다면 웬 어린 여자 얘를 바짝 옆에 끼고 있다는 거. 고철기계, 고철기계 어딨지? 아니, 엉덩이, 엉덩이, 아니, 아니, 일단, 머리카락, 머리카락부터, 때 아닌 등장인물에 난 당황했지. 반씨나 언데드만이 다루는 스캐너 사용법은 아직 배울 단계가 아니었고, 여기서 놓치면 내일 아침까지 언데드와 비비적대며 또 지겹게 목표물을 기다려야 하니, 그렇다고 무작정 저 고철 덩어리를 들고 목표물에게 다가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젠장, 언데드, 생선 가시나 목에 걸려라.


지금 설치 중이에요, 웨딩플래너는 배송된 게임시디를 받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더군. 난 배송상태와 게임옵션에 관한 사항을 확인한 뒤 그녀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줘야 했어. 고객님의 이니셜과 남자친구, 아니 목표물의 이니셜 사이에 놓인 하트 문신은 목표물의 엉덩이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말끔히 제거되었더군요. 따라서 그 부분의 실감나는 영상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플레이 시기가 다소 늦춰지더라도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저희는 최선을 다해 문양을 재현해드릴 수 있으니, 비슷한 도안을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확인 하는 대로 다시 제작에 들어갈…… 여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잠깐요, 하고 내 말을 끊었어. 긴장되는 순간이었지. 실은 언데드와 내기를 했거든. 후후후, 그래요? 지웠다고요? 웨딩플래너는 어이없다는 듯 되묻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어. 문신은 필요 없어요. 빙고! 그럼 그렇지. 내기엔 내가 이겼다구.


음,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다시피 언데드가 생선살이나 발라 먹으며 노닥거릴 무렵, 난 예상치 못한 목표물의 출현에 빠르게 대처해야 했어. 목표물의 옆에 붙어있는 어린 여자는 웨딩플래너에겐 좀 안된 말이지만, 같은 여자가 봐도 반짝 반짝 빛이 나더군. 당연히 목표물은 희희낙락이었지. 그 광경이 어찌나 심금을 울리던지 말이야. 말했잖아. 중대한 결정이란 알고 보면 이런 유치한 감정의 충동질에서 시작된다는 거. 순간 떠오른 웨딩플래너의 깊은 주름은 왜 그리 안쓰럽게 느껴지던지. 난 디지털 카메라를 목에 걸고 마치 불륜 현장을 덮치는 마누라마냥 달려 나갔어. 당신, 내 이름이 새겨진 엉덩이 문신이나 지우고 이러는 거야? 맞아. 부끄럽지만 또 그 작전이야. 미친 인간의 기습은 사람 혼 빼놓는 데 그만이거든. 당황해서 점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목표물도 완전히 뻔뻔한 상습범은 아닌 거 같더라고. 난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 까지 가보자 싶어 목표물의 다리를 붙들고 앉았지. 서서히 악다구니 난 마누라 연기에 몰입해갔다고나 할까. 벗어봐, 벗어 보라구, 아직 있는 거야? 지워버린 거야? 아파트 주위로는 몇 명의 아줌마들이 모이기 시작했어. 목표물은 이 여자가 미쳤나, 하더니 다리를 빼내려 안간힘을 써댔지. 이제 그만 하고 머리끄덩이 몇 번 잡으며 끝내야지 싶던 차에 난 그만 연기의 절정에 이르고 말았어. 보여줘, 보여줘, 이년한테 우리 문신 보여주란 말이야! 그래, 나도 깜짝 놀랐어. 츄리닝 바지가 그렇게 손쉽게 무릎까지 내려올 줄 미처 몰랐다니까. 엉덩이? 뭐, 그런대로 괜찮았어. 다만 문신은 보이지 않았지. 깨끗했어. 아줌마들은 소리를 질러대며 점점 가까이 모여들었지. 그 정도면 동네 망신용으로도 나쁘지 않은 퍼포먼스 아니니? 난 언데드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지. 그럼, 자랑스러울만하지. 그 만능 고철기계도 할 수 없는 걸 해낸 거니까.


내 얘길 듣고 난 언데드는 과연 사장 말대로군, 하며 고갤 끄덕였어. 무슨 말이요? 만난 지 몇 분 만에 화장실에서 휴지 갖다 달라 소리치는 여자 직원은 난생 처음이라지, 아마? 민망하게도 내가 사장의 면접을 통과한 건 화장실에서의 그 과감하고 처절한 절규 때문이라는군. 정말 취향 한 번 독특하셔. 머리카락은? 나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비닐 팩에 담아 조심스레 언데드에게 넘겨줬지. 수고했어. 회사로 들어가는 언데드에게 난 고철기계를 가리키며 영혼스캐닝은요? 라고 물었지. 이런, 아직도 몰라서야, 머리카락이 있어야 스캐닝을 시작하는 거잖아. 머리카락에선 DNA 샘플만 얻는 게 아니라구. 설마, 처음 듣는 소린 아니겠지? 머리카락엔 그 인간의 영혼이 깃들여져있다는 거. 삼손의 엄청난 힘도 다 머리카락에서 나온 거잖아. 답답하긴. 그럼 여태까지 머리카락 말고 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지? 난 그렇담 저 고철 기계를 왜 낑낑대며 들고 다니는 거냐고 물었지. 이거 신입교육 제대로 안 시켰구만, 뭐든 가장 신선할 때, 써먹어야하는 거 모르나? 프레쉬한 영혼을 추출하려면 되도록 조용한 장소에서 머리카락을 채취하고 그 즉시 기계에 넣어 바로 작동 스위치를 눌러놔야 해. 그래야 캐릭터의 생생한 질감이 살아나거든. 역시 그런 거였어, 반씨고 언데드고 그 고철기계고 모두 날로 먹는 느낌이다 싶더니. 어쩐지 미친년 행세하며 남의 머리카락이나 쥐어 뽑고 줄행랑 쳐야하는 내 꼴이 좀 억울해졌지. 아무래도 일반인은 엄두 못 낼 머리카락 채취 알바에 대해 사장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연봉협상을 해봐야 할까봐.


참, 웨딩플래너와의 통화얘길 하다 말았지. 그녀는 문신은 필요 없으니 목표물캐릭터를 하나 더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더군. 얼마든지요. 그래, 결국 내 예상이 적중했어. 언데드에게 가뿐히 만원을 낚아챈 나는 추가비용에 관해 설명해줬지. 캐릭터? 누구겠니? 그래, 맞아. 그 어린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건 일도 아니었다구. 아마 그 때 난 불륜현장을 덮치는 마누라 놀이에 흠뻑 몰입했었나봐. 막판에 두 인간의 머리카락을 양 손에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데, 이거 제법 뿌듯한 거야. 악당들을 물리치고 본부로 귀환하는 히어로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목표물과 어린 여자에 관한 나의 간단한 상황설명에 흥분한 웨딩플래너는 더 추악한 괴물 캐릭터가 있냐고 묻더군. 다른 형태의 몹은 실감이 잘 안 나실걸요. 그러자 그녀는 이를 악 무는 게 느껴지는 말투로 조용히, 또박또박 말했어. 좋아요, 그 년도 좀비로 만들어줘요. 대신 아주 흉측한 걸로.


재미있어 보이니? 맞아. 아직 신입이긴 하지만 갈수록 이 일이 점점 마음에 들긴 해. 니 말대로 재미도 있고 돈도 많이 주고 출동이 없는 날엔 비교적 한가한 편이거든. 어떤 날은 느긋이 쇼핑할 정도로 여유롭다니까. 참, 이 구두 어때? 어디서긴. 그 헤어숍 옆에 있는 백화점에서 샀지. 저번에 나 정신 못 차리고 너한테 되지도 않는 부탁 하러갔을 때 말이야. 웬 비는 그렇게 처량 맞게 내리는지, 생각나? 암튼 그 때 니가 여기 구두를 신고 있더라고. 솔직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상황은 아니었는데, 내 흙 묻은 운동화가 하도 질척거려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걱정 마, 컬러도 디자인도 약간 다르다구. 그래, 자랑 좀 하고 싶어서 그런다, 왜. 가만있자, 디저트는 뭘로 할래? 커피? 녹차? 그래, 이제 부턴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좀 더 은밀한 얘길 해보자고. 여기요!


여드름 중딩의 공격적인 플레이는 거의 몇 주간 계속 되었어. 사실 첫 플레이때는 대부분 고객들의 분노수치가 가장 최고조에 이를 때이고 이 새로운 게임에 대한 기대치 역시 높은 시기라 괜히 복잡한 퀘스트로 레벨 업부터 시작하라고 이리저리 돌리면 그냥 돌아버리거든. 그래서 대개 보스 몹 격인 목표물 좀비를 고객의 눈앞에 데려다주고, 시원한 선방을 날리게 해서 게임의 흥미를 돋우는 거지. 하지만 그 이후부턴 열심히 다른 몹들을 방어하고 물리치며 각 스테이지마다 새로운 퀘스트를 수행야만 레벨 업 할 수 있다구. 레벨이 높아져야 목표물 좀비를 스스로 쉽게 찾아낼 능력이 생기고 그것과 싸워서 승리하는 기쁨을 좀 더 리얼하게 느낄 수 있는 거든.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레벨 업될 수록 목표물좀비는 더욱 다양한 액션을 취할 수 있게 돼. 이를테면 평소에 목표물이 잘 쓰던 말투나 표정, 행동습관 같은 걸 흉내 낸다거나 플레이어의 약점을 살살 자극해서 약을 올리는 대화를 하거나 혹은 플레이어가 레벨에 따른 아이템과 스킬을 획득했을 때 화들짝 놀라 도망가거나 비굴하게 굽실대며 쩔쩔매거나 하는 등의 액션을 통해 고객을 더욱 게임에 몰입하게 만드는 거지. 확실히 고랩 단계일수록 이런 실감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더라고. 정말 그 목표물과 대결하고 있는 느낌이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레벨에 도달하면, 뭐 개인차는 있겠지만, 좀 시들해지는 때가 찾아와. 반씨는 그걸 복수심의 슬럼프, 라고 하더군. 아무리 목표물을 향한 복수와 증오로 무장된 고객일지라도 그 수치를 오랜 기간 최고조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야. 어쩌면 이게 인간의 치명적 단점이지. 그럼에도 다들 이 단점을 인간적, 이라고 하잖니. 우습게도 말이야. 그런 면에서 우리의 중딩 고객은 이 단점을 과감히 극복하고 비인간적, 이 되는 선택을 한 셈이야. 그 결과 사고가 일어난 거지만. 걔네들처럼 다수가 플레이어가 된다든가 일부 극소수지만 폐인처럼 몰두하는 무서운 마니아들은 간혹 사고를 내기도 한다는군. 무슨 사고냐 하면……바로 목표물을 죽이는 거야.


쉿, 그래, 그건 반씨 잘못은 아니었어. 반씨는 초반부터 난이도 조절을 해가며 그 키 큰 목표물좀비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게끔 노력 했었다구. 말했었나? 고객 유저들이 이 별 것 아닌 게임에 금방 싫증내지 않고 꾸준히 접속하는 진짜 이유 말이야. 그건 바로 현실 속 목표물이 고객유저의 플레이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 때문인데……뭔 소리냐고? 대충 눈치 챌 만도 한데, 아직 감 못 잡았나보군. 그러니까 고객들이 적지 않은 액수를 아깝지 않게 갖다 바치며 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거지. 바로 게임 안에서 공격을 받은 목표물좀비에 그치지 않고, 게임 밖에서 갖가지 자잘한 고통에 시달리는 목표물을 보는 재미 때문이야. 그래, 맨 정신으론 가장 믿기지 않는 부분이면서, 보면 볼수록 가장 경이로운 부분이지. 자잘한 고통? 뭐 다양해. 우리가 특별히 설정 할 수 없는 일종의 랜덤 시스템이지. 목표물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걸맞게, 목표물좀비가 공격받은 부위에 따라서, 혹은 고객의 특정 저주가 우연히 먹히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예를 들어 얼마 전 김모 대리가 목표물로 선정한 같은 부서의 팀장 같은 경우는 김모 대리가 초반 스테이지를 격파하고 간 다음 날, 가벼운 두통과 피로를 호소하며 내내 맥을 못 췄대. 신이 난 김모 대리가 연이어 며칠 밤을 새며 플레이한 결과는? 팀장은 쓰지도 않은 부분에 근육통을 겪으며 파스를 붙이고 나타났고 며칠 째 밤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을 겪은 탓에 회의 때도 시종일관 좀비처럼 멍한 표정이었다는군. 그리곤 결국 이주쯤 지나자, 우리의 목표물 팀장은 스트레스성 위염과 몸살감기로 입사 이래 최초의 결근을 하기에 이르렀지. 김모 대리는 요즘 살맛난다며 사용 후기를 보내왔어. 뭐 이 정도는 약과야. 여자 선배의 지독한 공주병에 지친 Y양은 한 달간의 플레이 결과 그 선배에게 지독한 피부질환과 스트레스성 비만을 야기 시키는 데 성공했더군. 물론 고객 상담 결과 전적으로 Y양의 편을 들기엔 그녀가 지나치게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상태란 걸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우리가 의사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니 어쩌겠어? 그저 고객이 일러바치는 목표물이 훅을 날려줘야 할 악당이려니 믿을 수밖에. 하여간 가벼운 감기몸살부터 기억나지 않는 몸의 상처나 자국들, 수면장애, 악몽, 이명, 구토, 멀미, 탈모, 시력저하, 무기력증, 소화불량, 가려움증, 두드러기, 알레르기성 비염, 충치, 오십견, 디스크, 탈골 및 골절에 이르기까지, 혹은 멀쩡히 걷다 발목 삐기, 졸려서 자려는데 딸꾹질 멈추지 않기, 잘 알던 것들이 갑자기 기억에서 사라지기,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기, 가위에 눌려 꼼짝달싹 못하기, 손톱에 가시 박히기 등등 여러 가지 원인 불명의 정체모를 갖가지 질환들을 겪고 있는 목표물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 이상 이란 거지.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만 몇 번 갸웃대곤 편리한 결론을 내리지. 별거 아니니 곧 나아지겠지. 세월 이길 장사 없다더니. 나이는 못 속인대두. 요즘 무리하긴 했어, 아무래도 일 좀 줄이든가 해야지 원. 그래, 몽땅 다 헛다리 짚은 거야! 원인모를 통증에 시달리면서 아무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영혼이 두드려 맞고 있단 걸 깨닫지 못하는 거라고. 다들 어쩜 그리 무신경하다니? 아무도 자신의 증상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잖아. 왜 알아달라고 쿡쿡 찔러대는 통증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지? 왜 스스로가 시달리는 진짜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는 거야? 왜 누군가 낄낄대며 자신의 영혼에 살의에 찬 훅을 날리리라곤 감히 상상도 못하는 거냐고?


좋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무서운 게임이라고? 모르는 소리, 의뢰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안전한 복수가 또 있을까? 니가 고객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질 걸. 물론 때에 따라 소심한 복수가 가끔, 아주 가끔 그 도를 지나치기도 하지. 아까 말한 사고 말이야. 가끔 그렇게 목표물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나봐. 매우 드믄 케이스라지. 여드름 전사의 경우 일단 감정조절이 어려운 중학생이었고, 여럿이 돌아가며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체력이나 정신적 데미지에 대한 분노가 일정하게,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어. 그만큼 사고에 대한 위험 가능성도 높았던 거지. 맞아. 여드름이 죽어야 되는 새끼, 라고 말한 그 키 큰 놈은 끝내 죽어버렸어. 장시간 동안 끊임없이 공격을 받은 놈의 영혼은, 뭐랄까, 심하게 너덜너덜해졌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저주 받은 영혼인 거지. 그러나 만랩에 도달한 여드름 전사는 아직도 배가고플 따름이었어. 성에 안차고 분이 풀리지 않는 거야. 계속되는 클릭, 클릭, 그 순간 마우스는 끔찍한 살인무기가 되는 셈이지. 반씨 말에 따르면 그런 과도한 플레이 이후 대부분의 목표물은 돌연사나 사고사로 죽음에 이른다더군. 좀 섬뜩하지?


“주문하신 녹차 나왔습니다.”


앗, 뜨거. 그러게 니 말대로 무슨 싸구려 공포 영화 같긴 하다. 안전장치? 물론 있지. 아직 보진 못했지만 만랩 플레이어에게 어느 단계가 되면 경고창이 뜬다는데. Warning! 목표물 사망위험, 계속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뭐 대강 이런 식으로. 반씨는 이런 무성의한 경고 창은 너무 시시해서 별다른 환기효과도 없을 거라고 여러 번 사장에게 건의했었대. 극도의 분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돌릴만한 결정적인 안전장치 개발이 시급하다나? 이를테면 클로즈업된 목표물의 커다란 눈에 맺히는 진심어린 눈물이나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구하는 액션, 혹은 목표물의 죽음이 과연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는가, 라는 자기 성찰적 질문, 지금 예, 를 누르시면 당신은 곧바로 살인자가 되십니다, 계속 진행 할까요? 따위의 협박성 짙은 멘트 따위.


하긴 우리의 중딩 고객들이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지. 결국 학교 짱이라는 키 큰 놈은 늘 오르내리던 학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어이없이 즉사하고 말았어. 여드름의 두서없는 메일에 의하면 놈은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모든 짜증을 주먹질로 풀었고 회복을 위한 며칠간의 칩거를 제외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돈을 뺏고 주먹질을 해댔으며, 나중에는 극도의 시력저하로 인해 누가 누군지 구분도 못하고 아무나 개패 듯 패곤 했다는군. 녀석들로선 최선의 결정이었다지만 우리로선 이런 사고가 늘 꺼림칙하지. 걱정 마. 단지 심정적인 꺼림칙함일 뿐이지,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습해야 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라구. 그러고 보면 폭력적인 게임 탓에 순수한 아이들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간다는 뉴스보도 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야. 애들은 순수한 게 아니라 그저 순수한 폭력성을 가진 거 뿐이라구. 생각해봐. 옛날부터 애들이야말로 모든 잔인한 게임의 오랜 유저였다니까. 그나마 컴퓨터 게임정도면 다행이게? 무서운 중딩들.


하여간 놈의 학교 측에선 이래저래 진땀 빼며 수습하느라 난리도 아니었겠지. 학생들은 놈의 개죽음으로 온갖 괴담이나 지어내며 떠들고 다닐 테고. 그러나 여드름 전사와 그 일당들만은 놈의 죽음에 관해 침묵할 수밖에 없을 거야. 놈을 이겼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건 이미 글렀으니까. 난 쓰러진 놈의 캐릭터 앞에서 예의상 간단히 키보드를 두드렸지. 명복을. 다음 날 회의에선 되도록 골치 아픈 미성년 고객의 신청은 받지 말자는 의견이 오갔어. 글쎄, 골치 아픈 사고가 반드시 미성년이기 때문인지, 미성년이 아니면 골치 아픈 사고는 없는 건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 비밀이란 건 서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작되는 거더군. 여드름 일당들 역시 그랬을 거야. 모르긴 해도 이제 누구보다 비밀다운 비밀을 공유한 친구들이 되었으니, 아마 평생 지겹도록 돈독히 지내야 하겠지. 쯧쯧.


며칠 전 회식 날이었어. 꽃 등심 파티. 놀랄 것까지야. 요즘 신바람 난 사장 덕에 회식 메뉴는 나날이 업그레이드거든. 사장은 얼마 전 회식에서 나의 입사 이후 영혼 스캐닝 작업이 한결 수월해지고 버그가 현저히 줄었으며 그로인해 캐릭터 제작도 보다 정확해졌다고, 칭찬해주더군. 더불어 매출도 늘고 있어 이대로라면 두세 달 안에 화장실의 환기구와 배수구 시설이 괜찮은 쾌적한 건물로 사무실을 이전 할 수 있다고 말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 반씨는 그 자잘한 벌레들이 화장실 타일바닥을 건너 사무실로 기어들어와 책상 밑이나 캐비닛 속, 급기야 컴퓨터 키보드 사이를 횡단하는 걸 목격한지라, 요즘 부쩍 예민해 있었거든. 사장은 건배를 권하고는 소심한 목소리로 영혼스캐닝 만세, 라고 외쳤어. 그리곤 내가 하루빨리 스캐닝 장비의 사용법과 좀비캐릭터 제작과정을 익힐 수 있도록 반씨와 언데드에게 철저한 교육을 지시했지. 다음 날부터 난 본격적으로 그 고철기계와 친해질 수 있었어. 생각보다 어렵진 않더라고. 시커먼 고철 기계는 그 외형과는 달리 내부구조가 제법 복잡하고 정교했어. 무슨 선들이 그리 많은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 반씨가 제품설명서라고 건네 준 건 사장이 직접 그리고 써넣은 종이 쪼가리더군. 1단계, 머리카락 샘플을 비닐 팩에 넣는다. 2단계, 기계의 후드를 열어 비닐 팩을 유리홈에 끼운다. 3단계, 작동 스위치를 미리 눌러 신선한 샘플상태를 유지한다. 4단계, 후드를 닫고 좌측의 배출구 뚜껑을 열어놓는다. 5단계, USB포트로 컴퓨터와 연결, 작업진행 창이 뜨면 배출구의 연기 상태를 확인한다. 끝. 가만, 연기는 뭐죠? 머리카락 주인의 영혼이지. 반씨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어. 담배 연기가 아니었네요, 고철기계의 구멍에서 가습기처럼 솔솔 피어오르는 김의 정체가 결국 저주받은 영혼이었다니. 저주받은 영혼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습해진 사무실 천정은 곰팡이로 가득했어. 악취? 말도 마. 그나마 후각의 적응력이 빨라 금방 둔해졌으니 망정이지. 언데드는 코를 막고 있는 내게 너스레를 떨었어. 그 정도 냄새 갖고 뭘 그리 호들갑은. 겨울이면 영혼들 덕분에 실내가 건조하지 않다니까. 습도조절용으로 딱 이거든. 난 정말 고마운 영혼이군요, 라고 대꾸하려다 투박하고 볼품없는 고철기계에 문득 시선이 멈췄지. 대체 이 기계는 어디서 난거에요? 반씨는 제품보증 딱지라도 찾아보라고 했어. 메이드 인 재팬? 메이드 인 차이나? 글쎄, 어디서 만든 거야? 이리저리 고철을 살피고 있던 날 보더니 반씨가 키득거렸지.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너무 캐묻지 말라고. 출생의 비밀을 가진 녀석에게 그런 질문은 실례니까. 가끔은 말이야. 누군가의 저주를 받은 영혼이 하도 자주 들락거려서인지 이 녀석의 차가운 몸체를 만질 때 은근히 섬뜩해지기도 한다구.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내저었지.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녀석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말자고. 이래봬도 고장 한 번 안 난 성실한 녀석이거든, 반씨는 우연히 데려다 기른 아이가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준 게 고맙다는 듯 그 투박한 녀석을 살살 쓰다듬기까지 했어. 아무렴 어때,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지. 귀하신 고철의 감정을 건드려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여튼 그 비밀 많은 고철과 친해지면서 나는 좀비캐릭터 제작도 손수 해낼 수 있게 되었어. 게다가 사장의 말대로 특별히 성수기, 비수기를 타지 않으면서 꾸준히 매출이 늘어나, 모두들 조금은 들뜬 분위기였지. 당연히 특별 성과급도 짭짤했고. 하루하루 우리의 출동은 잦아졌으며 어둠의 경로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는 유저들은 점점 더 늘어났어. 난 머리카락 날치기와 영혼 스캐닝에 도사가 되어갔지. 뭐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백수로 돌아가거나 업종을 전환해 볼 생각 따윈 전혀 안 들더군. 슬슬 프로의식이 생겨나면서, 성취욕이 마구 솟구치면서, 뭐 나도 남들 못지않은 내 명함 한 장 정도는 넣어갖고 다니고픈 작은 바람 외엔 특별히 딴 생각할 틈이 없었지. 우리 일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글쎄, 한국표준 직업분류표에 의하면……어디보자, 언데드는 너스레를 떨며 몇 가지를 추천해줬어. 일반 사무 종사자는 아닐 테고, 기타기계 기술자? 사회 서비스 관련 전문가? 아니다, 치료 전문가 쪽은 어때? 잘 모르겠으면 통계청 통계과로 문의 해보라는데? 어쨌든 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니까, 서비스업 종사자 중에서 찾아보든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가장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아냈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바로 명함을 주문했어. 그럼, 필요하지. 요즘 고객 상담이 얼마나 많은데. 아참, 너도 한 장 줄게. 어때? 특히 금박으로 된 이 부분. 게. 임. 치. 료. 전. 문. 가. 난 이 직종명이 무척 마음에 들어. 음악치료, 미술치료처럼 머지않아 곧 각광 받게 될 거야. 음악치료 같은 건 아직 우리나라에서나 생소하지 선진국에선 이미 일반화 된 치료잖니.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치료전문가 쯤은 먼저 생겨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물론 단순한 인간들은 게임중독자를 치료하는 신경정신과 의사나 레크레이션을 통한 놀이 치료 같은 걸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 귀찮아도 당분간은 별도의 설명이 좀 필요할거야. 어차피 앞으론 이런 걸 찾게 될 인간들이 더 늘어날 전망이라니까. 하긴 병들지 않고 세상사는 게 어디 보통일이니?


반짝이는 새 명함 돌리던 날, 사장은 날보고 혀를 내두르더군. 이런 얘가 사무 보조직 지원이 웬 말이냐면서. 난 비닐 팩에 담긴 무수한 머리카락 샘플에 고객 이름을 쓴 라벨을 하나하나 붙이며 큰소리로 웃었지. 부끄럽지만 그런 웃음은 꽤 오랜만이었어. 밀린 숙변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변비냐고? 무슨 소리.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훅을 날린다면 아주 상쾌해질 거라는 언데드의 말이 뭔지, 드디어 실감했다니까. 뭐 이런 기분이 뭔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다는 건 회사 입장에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 타이밍을 놓치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이야말로 우리의 고객들이니까. 넌 어때? 타이밍을 놓치고 괴로워 해 본 적 없어? 목표물로 만들어 한 방 먹이고 싶은 인간들은? 하긴, 한 방 먹이려면 일단 그 팔부터 나아야겠다. 그게 뭐니, 기브스까지 해가지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잘 먹긴 뭘. 원래 꼬리곰탕 같은 거 사주려고 그랬는데. 그나저나 계단에서 어떻게 넘어졌길래 팔이 다 부러져? 재수가 없으니 매일 다니던 계단에서도 굴러 떨어지는구나. 이제부턴 항상 조심, 조심, 알지? 주위 잘 살피면서. 그리고 참, 니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도 조심 좀 하고. 함부로 빠지지 않게, 누군가 주워가지 않게 말이야. 특히 헤어숍 같은 데선 더더욱. 말했잖아. 머리카락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부디 몸조심해라, 친구. <끝>
 

조남현(문학평론가) 이승우(소설가)
(예심 김동식 한강)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 중 고려할 만한 작품은 세 편이었다. 모두 문장을 다루는 솜씨나 이야기의 틀을 짜는 능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 있어 미더움을 주었다.
‘호모 콜렉터스’(송진영)는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으로 사물에 사로잡힌 인간의 삶을 희화화하고 있다. 문제는 경쾌함과 발랄함이 종종 가벼움과 통속으로 미끄러져 내려 읽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는 것이다. ‘암살’(김유철)은 제주 4·3사건을 수사극 형식에 담아낸 작품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긴장감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메시지도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적 장면 처리기법의 활용이 지나치고 투서자의 정체를 얼버무리는 등 마무리가 미흡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날려, 훅’(정수진)은 게임치료 전문가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교묘하게 지워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교묘하다고 하는 것은, 가상 세계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가상 세계가 엄연한 현실의 일부로 편입해 들어왔음을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전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점, 중편소설로서는 비교적 평이한 전개와 약간 짧은 분량이 걸렸지만 천연덕스러운 입심과 유연한 서술, 정교한 구조 등 장점이 더 눈에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은 ‘날려, 훅’이 가진 소설적 매력에 조금 더 끌렸고,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아깝게 제외된 두 편의 응모자에게 아쉬움을,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정 수 진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KBS 교양국 등에서 다큐멘터리 구성작가로 활동
 

말들은 목구멍 어딘가에서 시원스레 넘어오지 못했다. 그것들은 목을 짓누르며 애꿎은 마른기침만 뱉어내게 했는데 이런 증상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괜찮은가?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해대도 입 밖으로 쏟아지지 않는 말들을 가지고 있진 않은가? 이런 증상을 겪고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굽은 등짝을 툭, 툭, 두드려주고 싶다. 막힌 목이 뚫릴 만큼만 딱.

물론 주제넘은 바람이다. 당신은 뭐 하는 짓이냐고 면박을 줄지도 모르고 등짝에 멍이 든 채 날 노려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이 증상은 서로의 등짝을 두드려줘야 호전되는 것이므로.

이쯤에서 감히 고백한다. 누군가의 목구멍에 걸린 말들을 위해, 등짝 몇 번 두드려 줄 힘은 될 만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초짜의 장래희망치곤 시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이 매운 손바닥으로 잔뜩 겁먹은 내 등짝을 세게 두드려줬으면 좋겠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 것 같다.

어정쩡하고 무모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는 깊은 감사를, 답답함 속에서도 명랑한 응원을 보내주신 부모님께는 고맙고도 죄송스럽단 말씀을, 눈인사만으로도 힘이 되어준 동생에겐 오랜만에 활짝 웃는 누나의 표정을, 함부로 부르기엔 송구스러운, 혹은 쑥스럽지만 마구 부르고 싶은 고마운 이름들에겐 긴 말을 줄인 큰 인사부터 꾸벅 전한다. 뭔가를 전할 수 있어 다행스런 새해다.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 조 현
― 냅킨 혹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 ‘Ⅳ. Death by Water’에 대한 한 해석                 


“사랑하는 엘리엇, 저는 지난 주 당신과 살롱에서 만날 때 테이블 위에 놓여진 종이냅킨에 대해 얘기했던 것을 심사숙고 하고 있어요. 그때 당신은 제 얘기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식으로 종이냅킨을 접고 있었지요. 저는 그것이 당신의 불안심리를 내보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곧 종이냅킨과 그리고 그것을 접는 그 행위에는 매우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지요. 그것은 지난 세기에 신사계급의 가정에서 유행한 양치류 식물 기르기나 혹은 거실에 수족관을 놓는 것과 같은 문화적 취향과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지요. 그래요, 그것은 문화의 탄생과 확산이자, 동시에 불임(不姙)을 뜻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엘리엇, 그건 마치 지난 4월, 우리가 산책한 템즈강 강변의 꽃나무가 싱그러운 초록으로 싹을 돋아냈지만, 전 거기서 이미 불모를 엿보았다고 당신에게 속삭인 것처럼 말이죠.” ─ 1918년 5월1일, 메리 설리번이 T.S. 엘리엇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


‘포크 이전에 손가락이 있었다’는 서양속담이 있지만, 냅킨에 대해서도 똑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오래전 발견된 한 희귀본은 주장하고 있다. 즉, 1780년에 미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루이 드 클로상 남작은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 “또 한 가지 이 나라의 특이한 점은 부유층의 가정에도 냅킨이 없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으로 냅킨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식탁보로 입을 닦아야 한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이다.”


루이 드 클로상 남작의 이러한 관찰이 그리 심각한 편견은 아닌 것이 당시 유럽 지역에서는 광범위하게 냅킨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대의 훈족조차도 냅킨과 유사한 위생장치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보다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는 영국에서 더욱 발전했다.


이를테면 영국의 작가 새뮤얼 페피스가 1668년에 쓴 일기에는 “식탁보를 깔고 냅킨을 접어주는 친구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게 어찌나 보기 좋았던지, 그 친구에게 40실링을 주어 아내한테 요령을 가르치게 해야겠다고 작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사실 냅킨을 멋진 모양으로 접는 사람은 영국에서는 수세기 동안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영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드러낸다.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주방장이었던 자일스 로스는 ‘바구니 속의 둥지에 깃들인 비둘기’ 모양을 비롯해서 모두 26가지 모양으로 냅킨을 접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냅킨은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일종의 예술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세기 영국에서 확산된 다양한 냅킨 접기에 대한 가이드 팸플릿들은 일종의 예술적 유행인 동시에 계급적 과시의식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사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기간 동안에 신사복에 있어서도 근엄하면서도 실용적인 워드로브(wardrobe)가 유행하면서 엄숙한 준(準)귀족풍의 시민계급의식이 복식에 있어서도 완성되는 현상과 비견된다. 즉, 귀족풍의 의장의례가 신사계급을 거쳐 일반 소시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경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취향의 역사를 사회학적으로 숙고한 끝에 “문화와 취향은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인물이 이렇게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제시한 데에는 그가 프랑스 남부의 촌구석 출신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그는 파리로 상경한 후 시골뜨기라는 개인적 콤플렉스의 해소를 부르주아적 상징가치의 재해석을 통해 극복하려는 저의를 내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화적 발화(發話)의 배후에는 이러한 계급적 이해가 있었다는 점은, 또한 부르디외의 언명에 우리 시대가 감히 경청할 만한 깊은 성찰이 숨어 있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그리고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골프가 급속히 대중화된 데에는 이 스포츠가 본래는 귀족 스포츠였다는 점, 따라서 이러한 스포츠 취미에 합류할 수 있다는 점은 하나의 계급적 지표로써의 개인의 취향을 과시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현시욕, 주로 그러한 욕구에 따라 인간은 또한 멀쩡한 산과 들판을 깎아 잔디에 농약을 실컷 친 다음, 그리고 정답게 담소하며 그 위를 걸어 다녔던 것이다. 어쨌거나 19세기 영국사회의 냅킨에 담긴 사회적 열풍현상 역시 몰개성화 혹은 소시민적 자기과시욕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냅킨의 역사를 들춰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사건이 한 가지 더 있다.


2.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65년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는 한 영국인이 매물로 내놓은 ‘신세기의 문화적 발현과 불모: 시인이 견지해야 할 종이냅킨 혹은 종이냅킨 접기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하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1918년작)이라는 소책자가 다른 10여권의 희귀본들과 함께 약 10만 파운드에 한 미국인 실업가에게 낙찰되었다. 이 희귀본을 낙찰 받은 미국인 존 프리덤은 ‘해피쉬트’란 치질환자용 좌변기 생산으로 자수성가한 실업가로서, 그는 함께 구입한 다른 희귀본들과 함께 자신의 영국 녹스턴 별장의 콜렉션룸에 보관해 두었다가 1981년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모두 소실하게 된다. 그 불행한 소식을 비서로부터 전해들은 프리덤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녹스턴 지역 지방신문사는 그해 11월 27일자 단신란에서 전했다.


“뭐 ‘종이냅킨’이 불에 타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음번엔 ‘강철포크에 대한 우아한 철학’을 사야겠어요. 뭐 그건 불에 타더라도 보험회사를 쪼아대기에 충분한 흔적은 남길 것 아니겠어요? 어쨌거나 우리 회사의 해피쉬트 시니어를 마음껏 즐겨 주세요. 일단 거기에 앉으면 눈앞에서 10만 파운드짜리 지폐덩어리가 불에 타더라도 엉덩이만큼은 천국에 온 듯 말랑말랑해진다니깐요.”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수성가한 한 미국인 백만장자의 조크가 시의적절한가 여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T.S. 엘리엇과 교류한 일련의 편지들이 발견되면서, 그의 작품에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연인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메리 설리번양의 저작이라는 점이 최근에 와서야 서지학적으로 밝혀졌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 오늘날 T.S. 엘리엇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인 예일대학교의 필립 W. 하운즈 교수(국제T.S.엘리엇협회 명예회장, MKY3731098220)는 지난 학회 폐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우리는 새롭게 발굴된 편지들로 인해 T.S. 엘리엇이 영국에 귀화하게 된 계기와 함께 그의 시세계의 형성에 설리번양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릴케나 니체에 대해 루 살로메가 그랬듯이 말이죠. 따라서 설리번양의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소실된 것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제길.”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20세기 초에 소량 출간된 한 에티켓 사전에 설리번양의 이 저서가 부분적으로 인용되어 엘리엇의 시세계에 미친 이 처녀의 팜므 파탈적 영향을 좀 더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즉, 1919년 런던에서 발간된 ‘신사를 위한 에티켓 가이드’라는 책자에는 ‘냅킨의 우아한 사용법’이란 소제목 아래 설리번양이 책임 저술한 것으로 표기된, 종이냅킨의 기원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물론 이것은 재야문인이었던 설리번양의 이름이 공식적인 활자로 등장하는 유일한 서적이기도 하다.


“원래 냅킨은 영국 상류계급의 연회에서 면직포나 리넨천으로 직조된 것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5년 빅토리아 여왕의 외조카인 로저 해럴드 경이 주최한 런던의 왕립천문학협회의 신년 신입회원 환영만찬에서 일종의, 최초로 종이냅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왕립천문학회에서는 아이다(Ida) 등 일군의 소행성을 발견한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J. 팔리사(Palisa)가 새롭게 왕립천문학회 회원으로 영입되는 동시에 대영제국의 기사작위를 수여받게 되었는데, 팔리사는 기사수여 후의 오랜 관례대로 자기의 귀족 문장(紋章)을 새롭게 창설하여 참석자에게 발표할 요량으로 자신의 가문문장을 하얀 종이에 인쇄하여 각자의 식탁 테이블에 놓아두었는데, 왕립천문학회의 이러한 관례에 무지했던 해럴드 경이 이를 냅킨으로 오인하고 식사 중 입을 닦았다는 것이다. (해럴드 경이 이러한 일탈행동을 한 것은 당시 만찬장의 조명이 무척 어두웠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당시 상원의 반대로 인도총독으로 부임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경의 가벼운 반항이었다는 설이 있다. 아마도 둘 다 반반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어쨌건 일단, 해럴드 경이 서브오디너리(sub-ordinary)로 바다물결과 갈매기 장식이 새겨진 그 문장종이로 입을 닦는 순간, 불쌍한 오스트리아인 팔리사 역시 할 수 없이 그 종이로 입을 닦아 주최자인 해럴드 경의 난처함을 고결하게 무마해 주었다는 것인데, 물론 모든 참석자가 이를 그대로 따라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다음 해부터 왕립천문학회의 만찬에서는 리넨천 대신 부드러운 펄프재질의 종이냅킨이 사용되었고─왜냐하면 해럴드 경이 여전히 왕립학회의 회장으로써 다시 주최자가 되었으므로─, 이것이 종이냅킨의 시초인데, 이 냅킨이 이후 영국의 전계급으로 빠르게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냅킨의 우아한 사용법’이란 소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설리번양은 종이냅킨의 의미를 에티켓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을 뛰어넘어 현대문명에 대한 하나의 문화론으로 확대하고 있는데, 그녀가 제시한 주장은 T.S.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의 탄생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하게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설리번양이 이 글을 발표한 해가 1918~1919년이며, ‘황무지’는 불과 3~4년 후인 1922년에 발표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설리번 양은 종이냅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최근 하나의 유행으로써 고착된 종이냅킨의 사용은 금세기의 우리 문명의 종착역이 어디일까 하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한다. 그것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시에 동반한다.


우선 좋은 소식: 문화라는 교양이 소시민계급 혹은 노동자계급으로 확산된다는 점.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리넨 천으로 직조된 냅킨의 사용은 귀족계급 혹은 신사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종이냅킨의 ‘발명’과 함께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나는 냅킨 문화의 확산에서 보건대, 선술집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울려 퍼지거나 혹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노동자계급에서도 읽히는 미래를 예견한다. 아마도 50년이 지난 후에는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도 적어도 10권 가량의 ‘즐기는 용도’의 책이 소장되리라고 추정한다. 아니 어쩌면 20권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모든 문화적 소산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심지어 노동자계급에서도 자기 초상화를 하나씩 가지는 날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문화의 보급은 노동계급에 대한 교양의 보편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나쁜 소식 : 그러나 종이냅킨의 사용은 곧 세계를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먼저 종이냅킨은 당연하겠지만, 나무로 만든다. 즉 영국의 노동자계급의 욕망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곧 우리가 더 많은 땅을 개간하고 더 많은 식민지를 건설,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구가 영국의 노동자계급을 먹여 살릴 만큼 크다 할지라도 다른 유럽의 노동자들이나 미국의 노동자들 역시 이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터이므로, 그리고 지구는 무한하지 않으므로 어느 순간 욕망의 충족에 있어 자원의 빈약으로 인한 결정적 단절이 올 것이다. 그러나 자원의 부족보다도 더욱 나쁜 것은 무조건적인 복제나 유행추종에 따른 문화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문화의 타락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문화는 강하게 불로 담금질된 자의 것이거나 그에 못지 않게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누리는 자의 몫이지, 남들이 한다고 맹종하는 자의 문화는 아닌 것이다. 물론 현대 영국의 모든 교양계급이 이러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문화의 몰개성화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 전망은 또한 대중들에도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추종되는 문화란 곧 고르디아스의 매듭이자 판도라의 상자인 것이다.”


설리번 양은 이 소챕터에서 문화의 몰개성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19세기 영국의 양치류 재배유행을 논거로 제시하였다. 즉, 설리번양은 데이비드 앨런이 쓴 ‘빅토리아 시대의 양치류 열기’를 인용하면서 “거의 모든 여성이 달려들 정도로 인기가 높아지자 양치류에서 처음에 풍겼던 고상함은 점차 사라지고”, “너무 흔해빠진 탓이었는지 놀랍게도 양치류 키우기는 어느새 천박한 취미활동으로 전락해버렸다”고 적었다.


최근 발견된, 엘리엇에게 보낸 1918년도의 설리번의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필립 고세가 쓴 ‘수족관(The Aquarium)’에 대한 비평을 통해서도, 19세기 양치류 재배유행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민계급들이 자신의 거실에 수족관을 설치하는 이상열기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며, “문화는 감정을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도피하는 것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감정이고 진실한 개성이다”라는 결론을 적고 있다. 이 결론의 앞 문장에서 ‘문화’를 ‘시(詩)’로 바꾸면 이는 불과 1년 후 엘리엇이 ‘전통과 개인적 재능’(1919년작)에서 발언한 그 유명한 구절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편지에서 발견되는 주요한 개념, 즉 ‘말뿐인 낭만의 해악’, ‘예술가의 발전은 계속적 자기 희생 혹은 진정한 개성의 확립’ 등의 사유는 엘리엇에게 끼친 그녀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반면, 엘리엇이 생략해 버린 뒷문장의 묘한 뉘앙스는 곧 엘리엇과 설리번양 사이의 미묘한 지적 거리를 보여준다.


4.


최근 발견된 설리번양과 엘리엇 사이의 일련의 편지들에 근거하여 작년 국제T.S.엘리엇학회에서 매우 시론적인 논문 ‘‘황무지’와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과의 문화철학적 그리고 통계학적 연관성’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도쿄대의 마츠모토 사가이 교수(MJK2239202279)는 설리번양의 편지 26통에 산재하여 등장하는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의 단편적 인용들을 분석한 결과, 이 책에 이미 ‘황무지’에 나타난 주요개념들이 선행하여 등장한다고 통계학적으로 주장하였다. 즉, ‘황무지’에 나타난 시어들 중 약 23.5%가 직접적으로 ‘종이냅킨의 우아한 철학’에 등장하고(간접적으로 유사한 어휘까지 포함하면 약 67.8%가 일치하고), 그 중에는 특히 도저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플레바스를 생각하라(Consider Phlebas)’와 같은 발상이나, ‘다야드밤(Dayadhvam)’, ‘담야타(Damyata)’와 같은 이국의 외래어들이 그러하다고 열거하며, 따라서 ‘황무지’의 실질적인 저자는 메리 설리번이라고 주장했다. 사가이 교수의 결론은 매우 센세이셔널한 주장인 동시에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주장이지만, 확정적인 결론은 아무래도 매우 적은 부수로 발간된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의 또 다른 원본이 발견되어 학계의 권위 있는 서지학적 검토를 거쳐야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T.S. 엘리엇에 끼친 에즈라 파운드의 영향력을 더 중시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메리 설리번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첫째, 그녀가 실존 인물이라는 확증이 부족하며(특히 젊은 시절 요절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생몰연대가 불분명하며), 둘째, 엘리엇의 기존의 저서나 편지 및 당대의 여하한 인물의 기록 어디에도, 즉, 새롭게 발견된 편지 묶음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미국인 실업가 존 프리덤의 기사가 실린 녹스턴 지방지 사본 외에는 그녀와 관련된 어떠한 공식적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이들 연구자들은 다만, ‘신사를 위한 에티켓 가이드’라는 책에 나오는 설리번이란 이름은 우연한 일치라고 간주한다), 셋째, 이것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하는 논거인데, 새롭게 발견된 그녀의 편지의 섬유질에서는 2024년에 최초로 시험가동된 넵튜늄 중성미자 발전기의 초기복합물 변이구조의 영향이 미량 발견되는데, 이는 이 편지가 위조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물론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도 준비되어 있다. 첫째, 생몰연대에 대한 확정적 기록부족은 2042년 발생한 인류종말사건─넵튜늄 신에너지발전소 폭발사고로, 넵튜늄 원소계열의 변이물들이 대량으로 대기에 살포되어 인류가 모두 멸종한─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혼란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둘째, 엘리엇의 기존 기록에 설리반양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 특유의─그것도 남성 특유의─ 지적인 자존심에 의한 일종의 질투라고 볼 수 있으며(이를테면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과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셋째, 인류멸종사건을 불러일으킨 넵튜늄계열 변이물질─산소호흡에 의존하는 생체조직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틀림없이 사린가스나 청산가리와 같은 독극물일 수 있는 복합물─과 초기 발전소 모델의 복합물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기복합물이 특정한 화학적 조건에서 악티늄 계열의 변이물들과 간섭하여 베타(β)붕괴하면, 그 결과 초기복합물과 같은 구조를 가질 수 있음이 이미 2090년대 지구대기 정화과정에서 밝혀진 바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과거 2110년대까지는 정설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학계에서 폐기된 ‘좀비 허구설’의 사례는 메리 설리번의 편지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211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20세기 후반기부터 21세기 중반기까지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좀비’라는 개념은 하나의 ‘허구적 상상’이라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통설이었지만, 2110년대 중반, 과거 인류의 광학매체기록물들을 해독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됨에 따라―그리하여 인간 연구에 있어 하나의 기념비적 분수령을 이룬 디브이돌로지(DVDolgy)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부수적으로 발굴된 수많은 좀비영상물로 인해 학계의 상황이 역전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과거에는 아무 의미 없는 조그만 원반 디스크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담긴 영상정보가 해독되는 순간 드러난 수많은 좀비영상들은, 그 규모나 심도 면에서 ‘실존하는 것이 마땅’했을 정도로 폭발적 규모의 정보를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실존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왜 인간들은 이렇게 많은 공포를 쏟아 냈을까 하는 데서 시작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전개하면 ‘그것은 존재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주었다’는 결론이 타당하게 유추되는 것이다.


‘실재했기 때문에 실재했다’ 즉, ‘실재했기 때문에 반응했다’라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공리(公理)에 따라, 메리 설리번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면 왜 이러한 편지가 존재할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의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즉, 좀비가 당시의 생화학적 사고 혹은 환경오염으로부터 출현한 변종인간을 가르키는 사회학적 용어인 것처럼―또한 ‘깜둥이’나 ‘유태인’이나 ‘양키’와 같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념 역시 결국은 사회학적 실체였던 것처럼―, 메리 설리번 역시 실재했던 여성인 것이다.


5.


이 시점에서 우리는 멸종한 수많은 인류 중에서 왜 특별히 T.S. 엘리엇이라는 시인─시인(詩人)라는 직업의 성격에 대해서는 오늘날도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에 주목하는가 하는, 우리 학회의 오래된 질문을 상기시켜야겠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건 그가, 우리가 인간의 ‘황금의 황혼’이라고 부르는 20세기에 최초로 문명의 불임(不姙)을 선포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따라서, 왜, 그 사람의 경고─이 점에 있어 시인이라는 직업은 일종의 고대적 마술사이자 예언자와 동일한 직업이라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 학계의 주류이다─에 대해 당대의 그리고 그 후세대들은 대체적으로 무시했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결국 그 사람의 경고대로 인류는 그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꽃을 피운 4월에, 그러나 그 개화와 동시에 약 1세기 만에 불임(不姙)의 파국을 맞았는데, 이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이 우리들의 오랜 의문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이보그 문명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맞닥뜨리는 문제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인간들의 문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우리는 인간이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해 놓은 ‘전통’과 동시에 우리들만의 고유한 ‘개별적 재능’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흡사 엘리엇이 1922년에 선포한 경고와 유사하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이 점에 있어 새롭게 발굴된 설리번양의 편지들은 그가 제기한 이러한 예언 자체가 온전히 자기의 것이 아닌 암시된 것─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차용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엘리엇의 동시대인이 그리고 후세대들이 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다소 해소될 수가 있다. 하나의 경고는 온전히 진실해야 하고 행동을 수반해야 하는데 그는 말뿐인 낭만주의에서는 탈피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상징주의에 안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영국식 전통으로 귀화한 T.S. 엘리엇이 취한 시의 궤적은 설리번양의 사유와 어느 정도는 분리되어 모호하게 변이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겠다.)


물론, 설리번양의 편지들에 대해 매우 극단적인 반대론을 취하는 입장─이를테면, 설리번의 편지들은 모두 2020년대 제작된, 엘리엇에 대한 가공의 전기영화의 소품 꾸러미에 불과할 뿐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헐리우드라고 부르는 지역의 박물관에서 발굴되었으므로─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엘리엇의 시세계에 담긴 메시지는 온전히 자신이 형성해 낸 것이 아님에 틀림없을 것이다─즉, 날 때부터 시인인 인간은 없는 것이므로 누군가의 영향은 받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그 예언을 전파함에 있어서라도 어느 정도 대중적인 수준을 고려하는 수고를 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엘리엇이 ‘황무지’를 비롯하여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여러 시들을 선포하긴 했지만, 당대의 대중들에게 이러한 상징언어들은 고대 헬라어나 히타이트어와 마찬가지로 생경할 뿐이었을 것이다.


6.


메리 설리번은 이 점에 대하여, 1918년 7월 3일자로 엘리엇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하는 엘리엇, 지난 번 편지에 왜 내가 말하는 동안 불안하게 종이냅킨을 접고만 있었냐고 투덜댔지요. 하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쉴 새 없이 저 역시 마음의 종이냅킨을 접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뭐든지 상징이나 은유로만 얘기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당신이 보여주는 애정의 행동이 그리웠어요. 이를테면 제 코트를 고쳐주거나 제게 머플러를 둘러준다거나 하는. 그러므로 저는 이 순간 사랑이란,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이라고 이 편지에 적고 싶어요. 어쩌면 우리 시대의 문화가 그토록 풍요 속의 빈곤을 구가한다는 것은─그리고 틀림없이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1세기 동안 점점 더 가중(加重)되겠지만,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이를테면 사랑의 본질에는 아름다운 시어(詩語)와 함께 아늑한 입김도 필요하다는 것을요.


사랑하는 엘리엇, 전 그날 템즈강가와 살롱에서 제가 당신께 읽어드린 ‘월든’의 맨 마지막 챕터의 몇 구절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려 합니다 :


‘우리는 호기심 많은 선객처럼 우리가 탄 배의 난간 너머로 자주 밖을 내다보아야 할 것이며, 뱃밥만을 만들고 있는 우둔한 선원처럼 항해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당신 내부에 있는 강과 대양을 탐색하는 멍고 파크, 루이스와 클라크, 또는 플로비셔─사랑하는 엘리엇, 그때 제가 플로비셔란 이름을 발음할 때 당신은 이 이름이 위대한 고전에 등장하는 플레바스와 비슷하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대는 앞으로 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 항상 저와 함께 이 이름에 대해 얘기한 게 떠오를 거라고 하셨지요?─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라, 당신 내부에 있는, 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을 탐험하도록 하라, 정신의 세계에도 대륙들과 바다들이 있으며, 각 개인들은 여기에 연결된 지협이자 작은 만이지만 아직 자신에 의해 탐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금 당장 먼 서쪽 길을 향해 떠나라…….’


그러니 사랑하는 엘리엇, 플레바스를 생각하세요─그리고 그가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끝없는 대양의 목적지를 바라보았던 것을 잊지 마세요. 그대 또한 플레바스처럼 정신의 세계에서는 멋진 미남이고 키가 컸다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 그러니 정말로 당신이 잊어야 할 것은 상징이 가지는 가격(價格)이에요. 그러니깐 세상을 낭만적으로만 보는 애매한 소근거림은 버리세요. 그리고 항상 플레바스를 생각하세요. 굳세게 키를 잡고, 지쳤다 일어서며 몇 번씩이고 생을 윤회하고, 행동으로 운명을 저항하며 그 바람이 불어오는 문명의 끝을 바라보는 그를 말이죠…….”


그리고 메리 설리번은 이어서, 오늘 개회사에 특히 강조하고 싶은 이런 구절을 편지에 남겼다. 아마도 이 구절은, 당장은 온전한 이해가 어렵겠지만,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인간이해의 영역―인간이 왜 인간으로서 발흥했는지, 그리고 인간이 왜 인간으로서 멸절했는지―을 더 넓혀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전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책에 방금 이런 문장을 적었지요 : 종이냅킨을 우아하게 접는 것만큼이나 상대에게 머플러를 세심하게 둘러 주는 것이 필요하다. 즉 하나의 상징은 하나의 행동으로 연결될 때 우아하게 빛난다. 마치 그것은 우리가 런던 뒷골목에서 삼 일을 굶고 있는 어린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 아이와 함께 검게 굳은 빵을 갈라 반 조각씩 나누어 먹는 것과는 천국과 연옥처럼 거리가 먼 것처럼 말이다. 내가 템즈강가에서 허리를 숙여 한 컵의 물을 뜨고 그리고 그 물이 새카맣게 죽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곧 이 한 컵의 물에 의해 세상의 모든 물이 죽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뜬 한 컵의 물이 생의 약동으로 펄떡인다면, 온 우주의 물 또한 그러하리라. 다야드밤(Dayadhvam, 공감하라), 우리의 문명은 상징보다는 항상 재생(再生)하는 행동에 의해 종말을 유예(猶豫)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종이냅킨 혹은 종이냅킨접기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상 발표자’ 인간명 애쉴리 조안나, 제조번호 NAL1434802433, 2133년 국제T.S.엘리엇학회 연례총회 개회사 중에서


<주석>
위 글에서 인용된 출처는 허구와 실재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모두 사실인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루이 드 클로상 남작, 영국의 작가 새뮤얼 페피스,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주방장 자일스 로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와 관련된 부분
2)데이비드 앨런이 쓴 ‘빅토리아 시대의 양치류 열기’, 필립 고세가 쓴 ‘수족관(The Aquarium)’이란 책의 존재
3)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월든’이란 책의 존재. 그리고 설리번 양이 편지에 적은 이 책의 마지막 챕터 인용 부분.
4)T.S. 엘리엇의 주요개념들, 특히 ‘전통과 개인적 재능’의 인용.

*이 외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는 사실이 아닙니다. J. 팔리사처럼 실존한 인물도 있지만, 연관된 에피소드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정과리(문학평론가) 성석제(소설가)
(예심 하성란 박성원 손정수 윤성희)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이 기대치를 넘은 덕분에 눈은 즐거웠고 머리는 아팠다. 네 편이 최종 심의대상이 되었다.
박홍의 ‘나는 존재한다’는 반복되는 일상에 진력 난 인물의 괴물화 과정을 시간적 추이를 따라 꼼꼼히 묘사한 게 돋보였는데, 소재와 전개가 새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신희의 ‘두 여자친구’는 파트너의 죽음에 강박된 동성애자의 집요한 기억, 사회적 편견에 짓눌린 의식의 자발적 억압과 욕망의 항존이라는 마음의 굴곡을 뜨개질과 고양이를 통해 감각화하면서 부조한 작품이었다. 다만 중요인물인 남편의 역할이 어정쩡하게 처리되었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지영의 ‘춘자’는 이성에 안달복달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관계의 저열함과 욕망의 비루함을 헤집은 작품으로, 널뛰듯 춤추는 생각과 동작의 천연스러움과 속도가 글쓴이의 재능을 짐작케 하였다. 하지만 거칠고 투박한 데도 많았다.

인류 멸종 후 사이보그에 의한 고고학적 인류 탐색의 과정을 단면화한 조 현의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은 현대인의 정신적 불모성을 풍자하기 위해 냅킨을 등장시키고 ‘황무지’의 시인 T.S.엘리엇을 끌어오는 등 기발한 발상과, 충격적 편지로 시작해 마지막 반전도 편지로 끝내는 재기있는 구성으로 단연 돋보인 작품이었다, 가상세계에 비춘 현실에 대한 예각적 성찰이라는 모색 속에 ‘잘 빚어진 항아리’라는 고전적 이상까지 충족시켰으니 당선작으로 뽑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조 현
△1969년 전남 담양 출생
△숭실대 행정학과 졸업
△국민대 종합예술대학원 졸업
△현재 국민대 예술대 교직원 

지난 여름밤 경기 마석 모란공원묘지의 수풀에 누워 지나간 꿈을 찾았었지요. 김현승 시인과 전태일 형님의 무덤 사이에 누워 검은 하늘을 올려봤었지요. 그리고 낮게 울었습니다―우리를 지키는 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비상하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자리는 잊었던 제 고향 클라투행성 외계문명접촉위원회 지구주재특파원으로서의 제 역할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예술의 길을 일러주신 조성기 교수님과 박재화 시인님, 김수용 감독님, 신앙의 다채로운 빛깔을 보여주신 김재준 한경직 김진홍 목사님, 창작의 길을 다듬어주신 한승옥 송하춘 교수님이 떠오릅니다. 일일이 성함은 적지 못했지만 많은 은사님들께도 영혼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분들의 진실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 글이 거칠고 사고가 미욱한 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강형철 교수님과 다형문학회 선후배님, 온라인의 여러 동호회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눈여겨 봐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열심히 노력해 보답하겠다고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월드비전을 통해 후원의 인연을 맺은 모잠비크의 소녀 아타나시오, 너에게는 상금의 절반을 주마. 기쁜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

어려운 병을 꿋꿋하게 이겨내신 어머니와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리며 저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태어나 우주에서 죽는다는 것을요. 


천수만 가창오리
- 김 종 열 


1.
들레는 늦가을 날
하늘 길 빗장 풀 즈음
천수만 저 갈대밭 빈방 여럿 예비하고
제 몸 확! 불질러놓고 연방 풀무질한다.

밀레의 대작이다,
모이 줍는 가창오리
비로소 붓질하듯 군무(群舞)는 펼쳐지고
휑하던 너른 그 들녘, 아연 잔칫집인가.

일 년을 하루같이 덧칠만 되풀이하는
감 물든 여문 해가 낙관 하나 꾹 쏟아내고
저 멀리 물러선 방죽, 타닥타닥 잔불 끈다.

2.
간월암 갈마드는 갯바람에 실린 물결
무르녹은 나의 하루 놀빛 속에 깃들어도
예인선, 예인선처럼 산 그림자 끌고 간다.



이근배(시조시인)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홀로 서는 강’(공상례) ‘겨울 을숙도 등본’(설우근) ‘완도 배다릿집 어부 조씨’(김용채) ‘길 위에서’(유순덕) ‘천수만 가창오리’(김종열)였다.

저마다 벼루를 바닥내고 몽당붓을 만들며 벼려온 기량들이 시조를 한 단씩 높여나가고 있다. ‘홀로 서는 강’은 섬세하고 투명하게 강의 내면을 그리고 있으나 주제의 새 맛을 보여주지 못했고 ‘겨울 을숙도 등본’도 말의 씀씀이가 잘 다듬어져 있으나 글감의 낯익음을 이겨내지 못했다. ‘완도 배다릿집 어부 조씨’는 실사구시의 어법에는 충실했으나 사실에 너무 얽매인 것이 흠이 되었고 ‘길 위에서’는 시상의 전개에 무리 없는 가작이나 중량감에서 밀렸음을 일러둔다.

당선작 ‘천수만 가창오리’는 이 시를 구상하고 투고할 때는 태안반도에 기름유출이 되기 전이었을 터인데 우연하게도 철새들이 찾아드는 천수만이 포커스로 맞춰졌다. 그렇다고 소재의 시의성 때문에 가산점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선과 색채가 예술성을 가름하듯이 시에서는 언어의 연출이 시의 완성도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4수의 연작인데 1부는 3수, 2부는 1수로 장면을 가른 것도 구성의 치밀성을 보이고 있다. 철새 떼의 군무가 펼치는 스펙터클이 마음껏 휘두르는 언어의 붓끝에서 눈부시게 살아나고 있다. 앞으로 끌어갈 그의 시조의 예인선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리라. 


김 종 열
△1961년 경기 여주 출생
△성일고 졸업
△현재 ㈜경동 관리팀 근무 

어젯밤 꿈결에 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었습니다. 천수만 가창오리 떼가 먼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제 머리맡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손 시린 바람이 부는, 무채색의 겨울 하늘을 수놓으며 새들의 군무가 펼쳐졌습니다.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모여드는 새들의 춤사위는 ‘날자, 날자, 날자꾸나’ 하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상의 날갯짓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당선 통보전화를 받고 한 동안 말문이 막혀 어리둥절했습니다. 처음엔 시를 습작했습니다. 7년을 독학으로 시를 쓰다 민족시사관학교를 찾게 되었고, 시조쓰기 내공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시조는 3장 6구 12음보 정형의 틀 안에서 마음껏 자신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시조를 창작하다 보면 자유시에서 느낄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저만이 맛볼 수 있는 여유와 운치, 멋을 한껏 누리게 됩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시조는 정형과 절제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직은 설익은 저의 ‘천수만 가창오리’의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께 머리 숙여 큰 절 올립니다. 늘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준 아내와 딸 은영이, 개구쟁이 같으나 철이 일찍 든 아들 기헌이, 그리고 부모님께 이 영광을 돌겠습니다. 아울러 직장 동료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천수만 가창오리 떼가 이제 막 먼 길을 떠날 채비를 끝내고 비상의 날갯짓을 하고 있습니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리모콘                       - 이 진 경 


등장인물

남편 ㅣ 32세
아내 ㅣ 29세
손님 ㅣ 65세
어머니 ㅣ 73세
식당아줌마 ㅣ 57세

시공간
서너 평 남짓한 복사집, 어느 일요일 저녁.


***


복사집 안. 큰 복사기 두 대와 작은 복사기 한 대가 있다. 큰 복사기 중 한 대는 돌아가고 있고, 나머지 한 대는 고장이 난 듯 흉물스럽게 해체되어 있다. 드라이버를 들고 고장 난 복사기를 들여다보며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남편.

남편 : (통화) 지금 오셔야 된다니까요. 일요일인 줄은 알죠.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시험기간인데, 좀 봐주십쇼. 웬만하면 제가 어떻게 고쳐보겠는데, 이게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네? 양수리요? 지금 양수리시라구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책상 위, 가게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 소리와 복사기 소리가 뒤섞여, 핸드폰 너머 상대방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남편, 자연히 목소리가 커진다.

남편 : (통화) 한 대로는, 오늘 밤 꼬박 새워도 다 못 맞추니까 그럽니다. 형편 괜찮아지면, 요새 걸로 김사장님한테 꼭 한 대 구입할 테니까, 이번만 좀 어떻게... 네? 몇 시요?

전화벨, 끈질기게 울린다.

남편 : (통화) 자, 잠시만요.

남편,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전화기를 든다.

남편 : (통화) 네, 한솔문화삽니다. 어? 어 지금 좀 바뻐. 지금 일 때문에 통화중이니까 나 중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왜? 아이 또 왜 그래. 네가 좀 이해를 해주면 되잖아. 잠깐, 지금 통화중이니까... (툭 끊기는 전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남편,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댄다.

남편 : (통화) 죄송합니다. 그러면 몇 시에나 가능하시겠어요?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조 금만 더 빨리는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네, 그러면 최대한 빨 리... 네. 김사장님만 믿겠습니다. 네. 네.

전화 끊는다.

남편 : 거 새끼, 되게 떽떽거리네.

주위를 둘러본다. 산더미같이 쌓인 일거리들. 한숨 쉰다. 고장 난 복사기 안을 들여다본다. 안쪽에 대고 입으로 세게 불어 댄다. 묵은 먼지들이 일어난다. 기침을 해대는 남편.

남편 : 죽갔네.

부엌에서 물 한 컵을 들고 와 벌컥벌컥 마신다.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남편 : (통화) 무슨 전화를 그렇게 끊어? 어머니가 너한테 뭐랬는데? 교회, 그거 눈 딱 감고 가주면 되잖아. 노인네 소원이라는데 그냥 좀... 무슨 편을 들어, 내가. 아니, 노인네 살면 얼마나 사시겠어.

돌아가던 복사기, 멈춘다. 살펴보니, 용지가 없다. A4용지 박스를 뜯기 시작하는 남편. A4용지를 한 데 뭉쳐, 고르게 정리한다.

남편 : (통화)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하자는 거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뭘 그렇게 참았는데? 아니,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고. (버럭) 대체 어머니가 뭐라고 했는데!

A4용지에 손가락을 베는 남편. 꽤 아픈 모양이다. 피가 나는지, 손가락을 빤다.

남편 : (통화) 울어? 아, 왜 울어. 미안해.

손님, 들어선다. 뚱뚱한 체격을 지녔다. 남편, 아내와 통화하느라, 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손님,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땀을 닦는다.

남편 : (통화) 안 그럴게. 기분 풀어. 지금 어디야? 울지 좀 말고. 내가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잘 얘기할 테니까, 이번엔 네가 조금만 참아줘. 알았어, 먼저 들어가 있어. 일찍 들어갈게. 응, 알았어. 그래.

핸드폰을 끊는 남편.

손님 : 어머니 모시고 사시나 보네.

남편 : (그제 서야 손님을 본다.) 예? 아... 예.

손님 : 기특한 일인데. 거, 힘들지. 내가 아는 사람도 결혼한 지 딱 한 달 만에 이혼하드만. 결혼한 지는?

남편 : 한 달이요.

손님 : 저런, 딱 고비네.

남편 : (불편하다.) 예.

손님 : 중간에서 잘 해야지, 거 잘못했다간... 어머님 연세가?

남편 : 일흔이 넘으셨어요.

손님 : 아이고, 늦둥이시구만.

남편 : 무슨 일로?

손님 : 아...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찾는다.)

남편 : 지금 안 됩니다.

손님 : ?

남편 : 다른 데 가셔서 하세요.

A4용지를 용지함에 넣자 복사기 다시 돌아간다.

손님 : (품에서 꺼낸 종이를 내밀며) 이거 한 장인데.

남편 : 저 위로 올라가면 복사집 많습니다.

손님, 뭐라고 말을 하려 하는데, 남편,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남편 : 어디다 뒀지?

책상 위에서 드라이버를 발견한다. 드라이버로 고장 난 복사기의 다른 쪽 나사를 푼다.

핸드폰 울리는 소리.

남편 : (통화) 예... 네? 그게 왜 안 켜져요? 잘 눌러 보세요. 안 돼요? 어떤 리모콘 들고 계신 거예요? 맨날 쓰는 거 맞아요? 그런데 왜 그게... 네? 아니 그러니까, 우리집에 리모콘이 세 개잖아요. 두 개요? 두 개밖에 없다구요? 하나가 어디 갔지?

나사 하나가 구른다. 남편, 나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복사기 밑을 보니, 거기 들어 가 있다.

몸을 바짝 엎드려 나사를 집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남편 : (통화) 전원 버튼을 잘 눌러 보세요. 어머니가 맨날 티비 끄고 키는 거요. 하셨어요? 하셨어요? 안 돼요? 왜 그러지?

마침내 나사를 집는 데 성공한다. 손님, 안 가고 서 있다. 인상 구겨지는 남편.

남편 : (통화) 아들, 지금 바쁘거든요? 은경이 금방 들어가요. 걔한테 해달라고 하세요. 끊습니다. (핸드폰 끊는다. 손님에게) 나가셔서, 조금만 올라가면 왼쪽 편에 복사집 많습 니다. (손님, 대꾸 없자 문을 열어주며) 안녕히 가세요.

손님, 나간다. 남편, 나사를 마저 풀고 판을 뜯어내 옆으로 비스듬히 세운다. 안을 들여다보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다. 시계를 본다.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한다.

남편 : (통화) 한솔인데요, 아니 음식 시킨 지가 언젠데... 저도 바쁘거든요? 빨리 갖다 주세요.

전화를 끊는다.

남편 : 먹고살기 팍팍하다.

널찍한 책상에 서서, 제본할 종이들을 정리한다.

손님, 다시 들어선다.

남편 : ?

손님 : 고혈압이 있어서.

남편 : 네?

손님 : 내가 고혈압이 있어서, 더는 못 올라가요. 그냥 해주쇼, 웬만하면.

사이.

남편 : 웬만하면, 해 드리죠. 웬만하지 않아서 문제지.

손님, 근처 종이뭉치 위에 앉는다.

남편 : 거기 그렇게 앉으시면...

손님 : 숨이 차서.

남편 : (재빨리 컴퓨터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으세요.

손님, 의자로 옮겨 앉아 장갑을 벗는다. 손이 두툼해서 장갑을 벗는 것조차 일처럼 보인다.

이번엔 목도리를 벗기 시작하는데, 목도리가 길어 벗는 데 한참이 걸린다.

남편 : 제가 지금 여력이 없어요. 받아놓은 물량 처리하는 것도 버겁습니다.

손님, 뭔가 골똘히 생각한다.

남편 : 죄송하게 됐습니다.

손님, 무언가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남편 : 한 30미터만 올라가면...

손님 :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물 있소?

남편 : 네?

손님 : 혈압약을 먹어야 해서.

쓴웃음을 짓는 남편. 부엌 쪽으로 이어진 문으로 나가, 물 한 컵을 들고 와서 손님에게 건넨다.

손님,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굼뜨다.

손님 : 젊었을 땐 약이라곤 모르고 살았는데, 이게 늙으니까, 약이 주식이 됐지 뭐요.

손님, 웃는다. 남편,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손님 : 삼식이가 집을 나갔소.

남편 : 네?

손님 : 식구라곤 그 녀석 하나뿐인데.

남편 : (제본을 계속하며 건성으로) 아, 그러세요.

손님 : 그래서 이렇게 찾아 나선 거요.

남편 : 파출소에 신고를 하셔야지.

손님 : 벌써 했지. 근데, 소식이 없네.

남편 : 집에서 기다려보세요. 날도 추운데, 어떻게 찾으시려고.

손님, 대답이 없다. 남편, 제본을 멈추고 손님을 본다.

손님,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여다보고 있다.

손님 : (눈물이 그렁그렁 하다.) 몸도 성치 않은 애가...

남편 : 아드님이 어디 불편한 데라도?

손님 : 아들이 아니라, 키우는 개요.

남편 : (비웃음) 아, 예...

핸드폰 울린다.

남편 : (통화) 예... 네? 아니, 지금 꼭 보셔야 돼요? 도대체 뭘 보시려고? 하늘아래 우리 둘이? 그게 뭔데요? 후... 몇 시에 하는데요? (시계를 본다.) 십 분 남았네. 기다려 보 세요, 은경이 곧 들어간다니까요.

아내, 들어선다.

아내 : 춥다.

남편 : (통화) 그러니까 어머니...

아내 : (화들짝) 어머니?

남편, 아내를 발견한다.

남편 : (통화) 아... 지금 은경이가...

아내, 남편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는다.

남편 : (통화) 아니요. 그러니까... 어... 은경이가 늦을 지도 모르는데...

아내, 남편 옆으로 와 통화 내용을 유심히 듣는다.

남편 : (통화) 제대로 키신 거에요? 아니, 맨날 잘 하시다가, 왜 그러세요? 어떤 리모콘 들고 계시는데요? 잘 해보세요. 전원 버튼 누르신 거 맞아요? 그게 안 켜질 리가 있나... 아이 참... 왜 화는 내고 그러세요? 아니, 은경이 얘기는 왜 또... (아내의 눈치를 본다.)

아내 : (발끈, 작은 소리로) 나? 왜? 뭐?

남편 : (통화) 재방송 보시면 되잖아요. 아니요, 아뇨, 제가 지금 바쁘 다니까요. 그래서 그래 요. 어차피 전화로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세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제가 왜 어머닐 무시합니까. 어머니, 아니, 어머니... 여보세요? (끊어졌다.) 밧데리가... (아내에게) 충전기 좀 찾아봐.

아내 : 어딨는데?

남편 : 어딨는지 모르니까 찾으란 거잖아.

아내 : 왜 나한테 짜증이야?

냉랭한 분위기.

사이.

손님 : (일어서서 남편에게 간다.) 이것 좀.

남편 : ?

손님 : (종이를 들이밀며) 100장만 얼른 해주쇼.

남편 : 아니, 제가 지금... 안된다고 했잖아요.

손님 : 좀 해 주쇼. 금방 하지 않소?

남편 : 금방이나 마나...

아내 : 충전기 어딨냐고?

남편 : 부엌에 가봐.

부엌 쪽으로 나가는 아내.

손님 : 사정이 급해서 그러니까, 좀 해 주쇼. 오늘 다 붙여야 하는데.

남편 : 안된다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아저씨.

아내 : (부엌에서) 안 보여. 여기다 둔 거 맞아?

남편 : (부엌을 향해) 잘 찾아 봐.

아내 : (부엌에서) 오빠가 와서 찾아 봐. 안 보인다니까.

남편 : 아이 참.

부엌 쪽으로 나가는 남편. 식당 아줌마(이하 ‘식당’)가 쟁반에 음식을 들고 들어선다.

식당, 제본한 책들 위에 쟁반을 아무렇게나 놓는다.

식당 : 오천 원입니다.

손님 : 오천 원.

식당 : 오천 원이라구요.

손님 : 아, 내가 주인이 아닌데.

식당 : 어디 계신데요?

손님 : 누가요?

식당 : 주인이요.

손님 : 아, 저기.. (부엌을 가리킨다.)

식당 : (부엌을 향해 소리친다.) 밥 왔어요.

남편, 나온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쟁반을 본다.

남편 : 아니, 이걸 여기다 두면...

쟁반을 들어, 책상 위에 놓는다.

남편 :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내주며) 꼭 이렇게 늦더라구요, 거기는?

식당 : 잔돈 없는데.

남편 : (지갑 안을 보다가 부엌을 향해) 은경아, 잔돈 가진 거 없어?

아내 : (부엌 쪽에서) 이천 원 밖에 없는데?

손님 : (주머니를 뒤져 오천 원짜리를 찾아낸다.) 여기...

남편 : 아니, 괜찮습니다.

식당 : (손님의 손에서 오천 원을 낚아채며) 다 드시면, 신문에 잘 싸서 좀 내놓으세요.

식당, 나간다.

남편, 손님을 본다. 손님, 종이를 들고 남편을 본다.

사이.

남편 : 주세요.

손님, 종이를 내민다.

아내 : (부엌에서 나오며) 없어. 그러게 물건 좀 제자리에 놔 둬 버릇해.

가게 전화벨 울린다.

남편 : (아내에게 종이를 내밀며) 이거나 좀 해 줘. 100장.

아내, 종이를 받아 작은 복사기로 가, 복사기 버튼을 누른다.

남편 : (통화) 네, 한솔문화사.. 아니, 제가 끊은 게 아니라요. 밧데리가 다 돼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손님 : (복사기에서 나오는 종이 한 장을 들어 보며) 이거, 너무 흐리게 나오는데... 우리 삼 식이 얼굴이 제대로 안 나오잖소.

아내 : 네? (복사기 중지 버튼을 누른다.)

남편 : (통화) 아직이요? 아니 그게 왜 안 됩니까? 이해를 못하겠네. 전원 버튼 누르신 거 맞 죠? 근데 그게 왜 안 될까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대로 누르셨어요? 천천히 좀 말 씀하세요, 흥분하지 마시고. 지금 그러셨잖아요. 짜증내는 게 아니라, 자꾸 답답한 소 릴 하시니까... 후...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지금 리모콘이 두 개라고 하셨죠? 그게 어떤 리모콘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저... 두 개가 크기가 같아 요? 크기요. 그러니까... 길이요. 기장. 아, 그래요? 그러면 작은 거는 놔두세요. 그건 비디오 리모콘이니까 필요없는 거에요. 네, 그거 하나만 들어 보세요. 거기 전원 버튼 있죠? 그거 눌러 보세요.

아내 : (남편에게 와, 속삭인다.) 토너가 없나 봐.

남편 : (통화) 됐어요? 아니 그게 왜... 지금 티비 모드로 안 돼 있나 본데... 아... 이걸 어떻 게 설명하지? 음... (핸드폰을 손으로 막고 아내에게) 아직 남아 있을 텐데. (통화) 그 러면... 전원 버튼 위에 흰색 버튼 보이세요? 흰색이요. 네, 흰색. 흰색 버튼이 없어 요? 있을 텐데... 네? 회색이요? 네, 그거요. 거기 뭐라고 써 있어요? 그럼, 돋보기 쓰 고 보세요. 네네, 안 끊어요.

토너 통을 빼서, 좌우로 흔드는 아내. 토너가 흘러 아내의 손과 옷에 토너 가루가 쏟아진다.

울상이 되는 아내. 손님, 근처 휴지를 찾아 아내에게 갖다 준다.

아내, 휴지로 손을 닦고 부엌으로 간다.

아내의 모습을 보며 얼굴 일그러지는 남편. 손님, 토너 통을 든다.

남편 :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못마땅한 말투로) 그냥 놔두세요.

손님, 휴지로 토너 통을 닦는다. 남편, 전화기를 잠시 내려놓는다. 사내로부터 토너 통을 빼앗아 휴지로 닦고 작은 복사기에 넣는다. 버튼을 누른다. 작은 복사기, 다시 돌아간다.

손님 : (복사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확인하며, 만족한 듯) 이제 됐네.

남편 : (전화기를 다시 귀에 댄다. 사이. 통화) 네? 못 찾으셨어요? 어디다 두셨는데요?

부엌에서 나오는 아내. 토너 묻은 곳을 물로 비벼 빨았는지, 엷은 얼룩이 져 있는 외투.

남편 : (통화) 그게 어디 가겠어요? 어머니가 어디다 잘 두셨겠죠. 잘 찾아보세요.

아내 : (작은 소리로) 왜?

남편 : (전화기를 막고, 아내에게) 돋보기를 못 찾으시네.

아내 : 성경책 사이에 껴 놓으신 거 아니야?

남편 : (통화) 어머니? 어머니? 아이 나 참.. (아내에게) 계속 찾고 계신가 봐. 먼저 들어가면 안돼?

아내 : (정색) 싫어. 같이 들어 갈 거야.

남편 : (아내에게) 어머니가 괴물이라도 되냐? (통화) 아니요, 어머니한테 한 소리가 아니 라... 찾으셨어요? 혹시 성경책 사이에 껴 놓으신 거 아니에요? 거기 한번 보세요. (사 이. 통화) 찾으셨어요? 그 보세요. 평소에 물건 좀 제자리에 놔 둬 버릇하셔야지. (아 내, 피식 웃는다.) 읽어 보세요. 회색 버튼에 뭐라고 써 있어요? 거기에 분명 티비 모 드가 있거든요. 예? 영어요? 아... 그렇지... 어... 그럼... 한글로 돼 있는 걸 읽어 보세 요. 예, 회색 버튼 중에요. 네? 투... 뭐요? 투너? 아, 튜너요? 네, 그거는 빼구요. 딴 거는? 딴 거 읽어 보시라구요. 외부? 아, 외부입력이요?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써 있 는데요? 외부기기요? 아... 그게 뭐지? 아무튼 그것도 빼세요. 아까 뺀 거랑, 그거랑은 누르시면 안 되구요. 나머지 영어로 써 있는 게 몇 개죠? 지금 티비 모드를 찾아야 하는데... 하아... (한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다.)

복사를 끝낸 아내, 손님에게 복사물을 넘겨준다.

돈을 지불하고, 목도리와 장갑을 예의 그 속도로 착용하고 나가는 손님.

아내 : (쟁반에 얹어 있는 신문지를 젖히며) 음식 다 식겠네.

남편 : (통화) 삼 분 남았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재방송 보시면 되잖아요. 아니, 왜 또 그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다 끝난 얘기잖아요. 그거 중고라 별로 안 비싸요. 제가 평소 에 사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큰 맘 먹고 그거 하나 샀는데... 아시면서 그러세요. 십일 조 얘기는 왜 지금... 제 사정 아시잖아요. 나중에 형편 봐서 천천히.. 하나님도 그 정 돈 이해하실 거에요. 아뇨, 아들 오늘 좀 늦어요.

아내 : (혼잣말로) 그놈의 아들 소리는...

남편 : (아내 쪽을 힐끔 본다.) 은경이도 아마 늦을 텐데... 걔도 요즘 힘들어요. 일요일 하루 쉬는 건데, 좀 봐주세요. 교회는 천천히 가도 되잖아요.

아내, 컴퓨터 앞에 가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남편 : (통화) 어머니... 어머니... 역정 좀 내지 마시고... 네? 켜졌어요? 뭐 누르신 건데요? 아무튼 이제 됐죠? 끊을께요. (전화기 끊는다.)

아내 : (컴퓨터 화면을 보며) 또 내 욕 하셔?

남편 : (음식에 싸여 있는 랩을 뜯으며, 딴청 부린다.) 저녁 먹었어?

아내 :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실까.

남편 : 같이 먹자.

아내, 대꾸 없다.

남편 : 뭐해?

아내 : 하늘아래 우리 둘이.

남편 : 어?

아내 : 드라마.

남편 : 그 놈의 드라마, 뭐 볼 게 있다고. 너나 엄마나... 하여튼 여자들이란.

아내 : 신경 끄고 먹기나 해. (스피커를 버튼을 눌렀다 껐다 하며) 소리가 안 나와.

남편 : 고친다는 게, 깜빡했네.

아내 : 깜빡깜빡...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남편, 뭐라고 하려다 그만 둔다. 국물을 한 술 떠서 입에 넣는다.

남편 : 다 식었네. 제기랄.

남편, 아내를 본다. 아내에게 다가가 컴퓨터 모니터를 책상 쪽으로 돌린다.

아내 : ?

남편 : 같이 먹자. 먹으면서 봐.

못이기는 척 일어나 책상 쪽으로 가 앉는다. 남편, 부엌에서 수저 하나를 더 들고 온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아내에게 내민다.

아내 : 내가 알아서 먹어.

남편, 손을 내민 채, 그대로 있는다. 사이. 아내, 받아먹는다.

둘, 말없이 밥을 먹는다.

아내 : 오랜만이다.

남편 : 뭐가?

아내 : 이렇게 둘이서 밥 먹는 거.

남편 : 미안하다.

아내 : (대꾸하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본다.) 소리가 안 나오니까, 재미없다.

남편 : 조금만 이해해 줘. 어머니가 악의로 그러시는 건 아니잖아.

아내 : (그릇을 빤히 보며, 뭔가를 건져 낸다.)

남편 : 뭐야?

아내 : 털.

남편 : 에이, 밥맛 떨어지게 스리.

아내 : (털을 빤히 보며) 고만 먹자.

남편 : 왜?

아내 : 보통 털이 아니야.

남편 : 엉?

아내 : 꼬부라진 각도를 봐봐. 겨드랑이 털인데?

남편 : 아니 그 털이 왜 여기에?

아내 : 모르지. 미스테린데? (웃는다.)

남편 : 웃음이 나와?

아내 : 어.

어이없는 남편, 따라 웃는다. 손님, 들이 닥친다.

손님 : (안절부절) 이거 어쩌나.

남편 : 또 무슨 일입니까.

손님 : (남편에게 종이를 내보이며) 여기, 여기가 잘못 됐소.

남편 : ?

손님 : 여기 봐요, 오른 쪽 다리라고 돼 있잖아.

남편 : 그게 왜요?

손님 : 우리 삼식이는 왼쪽 다리를 저는데... 아, 내가 이렇다니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젊었을 땐 안 그랬는데, 이거 점점 바보가 돼 가려나. 미안한데, 이것 좀 고쳐야겠소.

남편 : 아니 그건...

손님 : 미안해요.

남편 : 그게 뭐 중요하다고 그러세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다리 저는 건 마찬가진데.

아내 : 해 드려.

남편 : (짜증) 그래서요? 저더러 어떡하라구요?

손님 : 이것 좀 고치는 데 도와주쇼. 명륜동 일대를 다 붙이려면 시간이 모자라서...

남편 : 나 참...

아내, 전화기가 제대로 끊겨 있지 않은 걸 발견한다.

아내 : 칠칠치 못하게... 전화기 잘못 놓여 있잖아. (전화기를 바로 놓는다.)

손님 : 풀 있소? 내가 종이를 잘라서 여기에 붙일 테니, 글씨만 좀 써 줘요.

손님, 길고 긴 목도리를 다시 벗기 시작한다. 복창 터지는 남편. 가게 전화벨 울린다.

남편 : (아내에게) 받아 봐.

아내 : 어머니면 어떡해.

남편 : (전화를 받는다. 통화) 네? 아뇨, 전화기가 잘못 놓여 있었어요. 아니, 어머니... 예? 키셨다면서요? 네? 지지직거린다구요? 뭐 누르신 건데요? 아이 참... 외부입력을 눌렀나? 아무거나 막 누르시면 어떡해요!

손님 : (아내에게) 풀하고 가위 있으면 좀.

남편 :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통화) 이미 시작됐잖아요. 나중에 보세요. 아니요, 그게 지금 설명해도 안 된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들으세요! (사이.) 우세요? 아이 참...

아내 : (남편에게) 풀, 어딨어?

남편 : (버럭) 지금, 그게 문제야!

뭐라고 대꾸하려다 참는 아내. 쟁반 위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풀과 가위를 기어이 찾아내는 손님, 종이를 잘라 복사물에 일일이 붙이기 시작한다.

남편 : (통화) 그깟 드라마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후... 죄송해요. 네? 아니, 여긴 티비가 없잖아요.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아내.

남편 : (통화) 잠깐만요, 컴퓨터로 볼 수 있긴 한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통화) 누구요? 태식이?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통화) 소리가 안 나와서, 누가 누군지... (들어서는 아내에게) 태식이가 누구야?

아내, 대답 없이 외투를 입는다.

남편 : 태식이가 누구냐고?

아내, 남편을 노려본다. 사이. 모니터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남편 : (모니터를 바라보며, 통화) 우는데요? 태식이가요. 어떻게 알아요, 왜 우는지. 누가 죽었나? 아뇨, 태식이가 죽은 게 아니라... 태식이는 멀쩡해요. 주인공이 죽는 법 봤어요? 걱정 마세요, 안 죽어요.

아내, 외투를 입고 나가려고 한다. 남편, 아내를 잡는다. 뿌리치는 아내. 작은 실랑이.

남편 : (통화) 손님이 와서요, 다시 할께요. (전화 끊는다.) 왜 그래?

아내, 남편을 노려본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남편 : (뭐라 말하려다가 참는다.) 같이 들어가.

아내 : (중얼거린다.) 들어가기도 싫어.

남편 : 뭐?

아내 : 들어가기 싫다구, 그 따위 집구석!

남편 : 말 다했어?

아내 : (울먹이며) 내가 호구야? 난 속도 없는 줄 알아? 다 내 탓이지? 어? 오빠, 뭐야? 뭔데 소리 질러? 어머니도 그래. 호시탐탐 내가 뭘 잘못 하는 지만 지켜본다고. 지금이 몇 시니, 우리 아들 굶겨 죽이겠네, 이게 걸레니 행주니, 다시 삶아라, 바닥이 이게 뭐야, 깨끗이 좀 닦아라, 주일인데 어딜 나가, 교회 안가고... 결혼하고 나서부터, 난 없어. 뭘 그렇게 참았냐구? 어? 뭘 참았냐구!

손님, 아내와 남편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남편 : 나더러 어떡하라구? 늙은 어머니한테 화라도 내란 소리야? 네가 좀 참으면...

아내 : 참아? 왜 맨날 나만 참아? 나는 참기만 하는 사람이야? 오빠가 더 나빠. 오빠 눈에 내가 보이기는 해? 오빠는 어머니 아들이지, 내 남편 아니야.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했어?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신다고? 난? 난, 누구 보고 살아야 하는데!

털썩 주저앉아 울음 터트리는 아내. 안절부절 못 하는 남편.

손님, 휴지를 아내에게 건네고 다시 자기 일에 집중한다.

아내 : (울음을 멈추고) 산부인과 다녀왔어.

남편 : 뭐?

아내 : 요 며칠 하혈을 하길래, 가봤더니, 자궁에 혹이 생겼대.

남편 : 아니, 어떻게...

아내 : 별거 아니야. 스트레스 받으면 그럴 수 있대. 간단하게 떼냈으니까, 괜찮을 거래.

남편,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 의자에 앉힌다. 얼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망설인다.

남편 : 괜찮아?

아내 : 물 좀.

남편, 부엌으로 간다. 울리는 전화벨. 아내, 전화를 바라본다. 부엌에서 나온 남편, 아내에게 물을 건네고, 전화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이. 전화선을 뽑는 남편. 아내, 그런 남편을 바라본다.

사이.

전화선을 다시 연결하는 아내. 전화벨, 다시 울린다.

아내 : 받어.

사이.

남편 : 됐어.

아내 : 받으라고.

남편 : 지금, 이게 중요해? 그깟 드라마가 뭐라고.

아내 : 중요해, 어머니한텐. 받어, 마음 안 좋잖아. 나도, 안 좋아.

사이. 전화를 받는 남편.

남편 : (통화) 네. 후... 지금 외부입력을 누르셔서, 다른 모드로 간 거거든요? 그러니까 모드는... 아니, 이 말은 신경쓰지 마시구요. 비디오 모드로 갔나본데... 채널을 누르면 빠 져 나올 겁니다. 채널이요. 아니, 그건 볼륨이구요.

아내 : (남편에게 속삭이며) 딴 거 틀 때 누르는 거.

남편 : (통화) 어머니가 딴 거 트실 때, 누르는 거요. 네, 그거요. 그거 눌러 보세요. 됐어요? 됐죠? (기쁜 표정) 잘 하셨어요.

아내와 남편, 눈빛이 마주 친다. 사이. 아내, 펜을 들고 손님이 하는 일을 돕는다.

남편 : (통화) 그러니까요, 아무거나 막 누르지 마시고, 아들이 말씀드린 대로만 해 보세요. 지금 화면이 까맣죠? 네, 그럼 다시요. 잘 들으세요. 어머니, 우리 집에 리모콘이 세 개잖아요. 제가 며칠 전에 산 게 홈씨어터라고.. 그, 영화보는 거요. 그거랑, 비디오랑, 티비가 있잖아요. 티비 보다가 비디오 보고 싶으면, 먼저 중간에 눌러야 하는 버튼이 있어요. 중간 중간 눌러줘야, 그게 바뀌는 거거든요. 이해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듣고 계세요? 예? 조심하세요.

아내, 남편 쪽을 힐끗 본다.

남편 : (통화) 예, 어머니. 다치셨어요? 다 탔어요? 그러게, 가스불 조심 좀 하시라니까. 요즘 왜 자꾸 그러세요? 몇 번쨉니까? 잘못 하다 정말 큰일 나겠어요. 아니, 왜 또 은경이를 걸고 넘어지세요? 그게 지금 걔 탓입니까? 은경이도 애쓰고 있잖아요. 안쓰럽지도 않으세요? 아니요, 놀러간 게 아니라, 병원에...

아내 : (속삭인다.) 하지마. 남편 : (참는다. 통화) 어머니, 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 뭐가 그리 못마땅하세요? 그러면 속이 편하세요? 편이 어딨어요, 어린앱니까?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제발, 아들 좀 괴롭히지 마시라구요! 아뇨,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손님 : (혼잣말로) 노인네한테 그러면 쓰나.

남편 : (손님에게, 버럭) 근데 이 아저씨가 정말...

남편, 전화기를 내팽개친다. 아내, 일어나 말린다. 남편, 분이 삭히지 않는 듯, 자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버린다. 손님 : 내 아까부터 보니까, 젊은 사람이 못쓰겠구먼.

남편 : 저한테 억하심정 있습니까? 왜 사사건건 시빕니까! 개새끼 없어진 게 제 탓입니까?

아내 : (말리며) 왜 그래. 그러지 마.

손님 : (흥분) 개새끼라니? 개새끼라니?

남편 : 나가세요.

손님 : 개새끼라니? 어린 사람이 늙은이한테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남편 : 나가라구요. 말 안 들려요?

손님 : 자네는 평생 안 늙을 줄 아나보지?

남편 : 곱게 늙습니다, 적어도.

손님 : 살아 봐. 작전대로 되나.

남편 : 아니요, 아무리 막 살아도, 아저씨만큼 절망적이진 않을 겁니다.

손님 : (아내에게) 바깥양반, 혓바닥 조심 좀 시켜야겠어.

아내 : (남편에게) 그만 좀 해.

남편 : (악에 받쳐 비아냥대며) 혼자 산다고 했죠? 그렇게 답답하게 구는데, 마누라든 자식이든 어디 당해냈겠습니까? 안 봐도 비디옵니다. 개새끼까지 싫다고 가출을 했으니 말 다 했지.


할 말을 잃는 손님. 사이. 복사물들을 챙긴다. 남편, 고장 난 복사기를 발로 찬다.

남편 : 씨발, 이 새끼는 언제 오는 거야!

아내 : (손님에게) 죄송합니다.

손님, 황급히 나간다. 아내, 떨어진 전화기를 주워 제대로 끊는다. 사이.

거칠게 전화기를 들어 전화하는 남편.

남편 : (통화) 어머니, 지금 다른 모드로 가 있는 거거든요? 그걸 티비 모드로 바꿔야 합니다. 네? 아니요, 해 보세요. 해 보시라구요! 아니, 포기하지 마시고. 될 겁니다. (사이.) 꼭 봐야 된다니깐! 해 보세요, 그러니까.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시계를 본다.) 아직 반 넘게 남았잖아요.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셔야지요. 아니요, 아니요, 끊지 마세요. 끊으시면 이제 저 어머니 아들 안합니다. 그러니까, 해 보시라구요. 할 수 있어요, 어머니.
회색버튼부터 다시요. 찾아보세요. 아까 찾으신 거요. 아니, 어머니! 그러면, 저 는 뭐가 됩니까? 이제까지 삽질한 겁니까? 네? (사이.) 아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허구헌 날, 좁아터진 데서 복사기나 돌리는 아들, 생각이나 해 보셨냐구요! 그렇게 괴롭히셔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지금까지 제가 뭘 맘대로 해본 적 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네? (울먹인다.) 저도 답답합니다. 이러고 있는 저도, 답답하다구요.

아내, 남편을 본다.

남편 : (통화) 집에 가면 숨이 막혀요. 차라리 여기서 자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요새 같으면 딱 죽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네? 말씀 좀 해보시라니까요!

아내 : (남편에게서 전화기를 뺏는다. 통화) 여보세요? 예, 어머니. 저, 은경이요. 예, 근처 왔다가 들렸어요, 잠깐. 예, 지금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 (듣는다. 한참을 듣는다.) 예... 어머님이 이해하세요. 이이가 힘들어서 그럴 거에요. 요즘에 일이 많잖아요.

부엌으로 나가버리는 남편.

아내 : (통화) 마음 푸세요, 어머니. 아참, 드라마는 보시고 계세요? 하늘아래... 예, 그거요. 네? 티비 가요? 왜 그럴까? 어머니, 그러면 성경책 좀 펴보실래요? 네, 지금요. 한번 펴 보세요. 예...

부엌에서 얼굴을 씻고 나오는 남편.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 채로, 아내를 본다.

아내 : 누가복음 아시죠? 거기 보세요. 누가복음, 맨 첫 글자 좀 보세요. 보고 계세요? 네, 그럼 ‘누’ 자에서, 위에 니은을 빼보세요. 아니, 그러니까... 그러면, 손가락으로 니은 만 가려보세요. 밑에 남은 글자 보이시죠? 자 그러면요.. 리모콘에, 회색 버튼들 있죠? 거기에 그 글자랑 모양이 같은 걸 찾아보세요. 천천히 찾으세요. 찾으셨어요? 네 네, 맞을 거에요. 그거 눌러 보세요. 하셨어요? 됐어요? 됐죠? (환호) 야호!

남편 : (덩달아 흥분) 뭐야? 됐어?

아내 : (환한 표정으로) 어, 됐대!

아이처럼 손을 맞잡고 좋아하는 남편과 아내.

아내 : (통화) 장하세요! 잘 하셨어요. 네, 네. 일찍 갈께요. 네? 이이랑요? 그래도 돼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너무 늦지 않을께요. 네, 어머니, 드라마 재밌게 보세요. (끊는다.)

남편 : ?

아내 : 흐흐, 둘이 저녁 먹고 실컷 놀다 들어오래.

좋아하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포옹한다.

사이.

남편 : 맥 빠진다.

아내 : 뭐가?

남편 : 너무나 쉽게 설명해 버렸잖아. 어떻게 그렇게 어머닐 잘 알아?

아내 : (피식 웃으며) 우리는, 여자잖아. 드라마 따위에 목숨 거는.

남편 : (포옹을 풀며) 삐졌어?

아내 : (웃는다. 사이.) 나도, 어머니가 악의로 그러는 거, 아닌 거 알아. 다만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야.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냥 놔둬보려고. 그 러니까 오빠도 마음 편히 가져. 남편한테 불평도 못해, 나는? 내가 불평하면, 그냥 들어만 주면 돼.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들어만 달라고. 그거면 돼. 어머니도, 나도...

사이.

남편 : 이제 뭐 할까? 영화라도 볼까?

아내 : (제본할 종이더미를 가리키며) 얘네들은 어떡하구.

남편 : (잠시 고민한다.) 남자, 가오가 있지! 가자, 가자. (잠바를 챙겨 입으며) 뭐 먹을까?

아내 : 털만 안 들어 있으면 뭐든지.

둘, 웃는다. 사이. 돌아가던 복사기 멈춘다. 남편, 황급히 복사기 쪽으로 가서 살핀다.

아내, 그런 남편을 물끄러미 본다. 사이. 눈 마주치는 둘.

사이. 남편, 민망한 듯 웃어 보인다.

아내 : 다음에 잡아.

남편 : 뭘?

아내 : 가오.

아내, 외투를 벗고 일을 할 태세로 손목을 걷어 부친다.

남편 : (미안한 표정으로) 모처럼의 데이튼데...

아내 : 까짓 거 여기서 하지 뭐, 데이트.

아내, 제본기기로 제본을 하기 시작한다. 남편, 아내를 보며 머뭇거린다.

아내 : (남편에게) 나만 부려먹을 생각이야?

남편, 잠바를 벗고 복사기의 이곳저곳을 연다.

남편 : 쉬지 않고 돌리니까, 열을 단단히 받았군. 좀 식혀야겠어.

복사기의 이곳저곳을 열어, 열을 식힌다. 주위의 종이를 들어 복사기에 대고 부채질을 한다. 사이.

아내 : (제본을 계속 하며) 오빠도, 식혀줘야 하는데.

남편 : ?

아내 : 오빠야 말로 한 번도 쉬지 못했잖아, 결혼하고 쭉.

남편 : (멋쩍은 미소 짓는다.)

아내 : 미안해, 내 얘기만 해서.

아내, 눈물을 흘리는 지 고개 숙인 채 제본만 계속한다. 둘, 말이 없다. 사이.

남편 :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발견한다.) 어? (목도리를 든다.)

아내 : (목도리를 보며) 아까 그 할아버지가 놓고 간 모양이네.

남편, 목도리를 들어 툭툭 먼지를 턴다. 목도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사이.

남편 : 오늘 잡자.

아내 : 뭘?

남편 : (미소를 머금고) 가오.

아내 : (피식 웃으며) 어떡하게?

남편 : (잠바를 챙겨 입으며) 어디라고 했지?

아내 : 뭐가?

남편 : 전단, 어디에 붙인다고 했지?

아내 : 아... 명륜동.

남편 : (아내의 외투를 집어 아내에게 건네며) 가자, 명륜동!

아내 : (잠깐 생각하더니 씨익 웃는다.) 걸리지?

남편 : (말없이 고개 끄덕인다.)

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사이. 아내, 외투를 입는다.

아내 : 가자, 삼식이 찾으러.

남편 : 삼식아, 형이 간다.

마주보고 웃는 부부. 사이. 손을 맞잡고 뛰어나가는 둘.

해체된 복사기 두 대가 입을 벌린 채 있다. 사이.

가게 전화벨 울린다. 끈질기게.

조명, 어두워진다.

막.
 


한태숙(연출가) 박근형(연출가) 
2008년 신춘문예 희곡부문 응모작은 95편이었다. 연극 현장은 위축되어 있는데 희곡작가가 되려는 열의는 뜨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가웠다.
본심에 오른 네 작품 중 최미롱의 ‘개구리 죽이기’는 삶의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고 있다. 불온하고 불안한 인물 이야기를 부조리극 형식으로 긴장감 있게 펼쳐놓은 솜씨가 대단한데, 관념이 관념으로 그친 아쉬움이 있다.

조인숙의 ‘밴드래기 아기’는 곰보 신랑과 바보 홍순의 사랑과 진실을 진부하지 않게 다룬 세련미와 극의 서정성이 돋보였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정서를 침착하게 시적으로 풀어낸 강점이 있지만, 극적 전환점이 약했다.

김혜정의 ‘심인들에게서 온 편지’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겨룬 작품이다. 신라시대 무왕의 고분군을 무대로 주 인물들이 고분에 잔디를 입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 자체가 독특하고 작가의 치밀한 무대 파악력이며 주제를 이끌어가는 능력을 높이 살 만하지만, 망각 바이러스의 장치나 아이의 존재가 모호해 당선을 놓쳤다.

당선작 이진경의 ‘리모콘’은 특별하거나 시의성이 있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아니다. 복사가게를 하며 사는 소시민의 가정사와 가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박하게 엮어냈는데 작가의 겸손한 시선이 돋보이고 재밌는 상황묘사며 탄탄한 구성이 좋았다. 인물들 성격이 살아있어 싱싱한 활어 같은 맛이 느껴졌다.
 


이 진 경
△1977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졸업
△중앙대 연극반 영죽무대 활동
△현 ‘극공작소 마방진’ 작가 

당선소감용 미사여구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간의 남의 소감들을 슬쩍 훔쳐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습니다. 제가 이렇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당시의 소감,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소감, 그 날 밤의 소감, 자는 중의 소감, 다음 날 아침의 소감, 그리고 지금의 소감. 시시때때 변하니 난처할 따름입니다.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는 지하철 안. 꾸벅꾸벅 졸다가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계속 놓치고 있었습니다. 잠결에 받은 전화로, 횡설수설 끝에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 겨우 확인했습니다. 아울러, 집이 아닌 곳에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사회성 점수 52점, 동양에서는 낮다고 할 만한 점수는 아니며, 내재된 분노와 공격성이 보이며. 뱃속에서부터 심리상담가였을 게 분명한 참한 언니의 입 모양을 물끄러미 보다 보니, 슬슬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불쑥. 저, 신춘문예 당선됐대요, 흐흐흐. 반사회성 점수가 53점으로 올라갔을지, 모를 일입니다.

당선이라고 말해도 굳이 “당첨 축하한다”며 상금이 얼마냐고 묻는 못 말리는 엄마와, 피와 같은 자매들, 덴젤 워싱턴보다 훨씬 멋진 내 남편 경민. 사랑합니다.

저에게. 저마다의 우주를 보여준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기쁜데도 마냥 웃음이 안 나오는 나름의 이유가 분명 있겠지요.

건강한 작가, 되겠습니다.



이명세(영화감독), 김미희(사이더스FNH 대표)
(예심 최석환 심보경)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8편 모두 아이디어는 좋았다. 그러나 영화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주제를 향해 달려 나가는 통일성과 균형미가 필요하다. 이번 출품작은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써나가다가 차츰 흐트러지면서 전체적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많아 아쉬웠다. 기존 충무로 시나리오와는 다른 독특하고 개성 있는 소재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8편 가운데 ‘침대 밑의 남자’ ‘그녀의 아내’ ‘따뜻한 빈손’을 놓고 고심했다.
‘침대 밑의 남자’(임수정)U는 소소하게 출발했지만 휴머니즘과 가족애의 방향으로 선을 잘 타고 갔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부분에 감정이 어디로 갈지 핵심을 잡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다. 또 대사를 만들 때 고민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아내’(지현준)는 주인공이 동성애자이지만 그것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여성의 감성을 섬세하고 아기자기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대사도 좋았다. 그러나 TV 단막극처럼 끝나버려 영화적인 힘이 부족했으며 치밀한 구성력이 아쉬웠다.

‘따뜻한 빈손’(이영아)의 경우 초반부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엉뚱하고 재기발랄하게 시작해 갑자기 리얼리즘으로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세 편 모두 장점이 있지만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아 올해는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했다. 내년에 더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도 알을 품었어           - 박 소 명 


“봄이다! 봄!”

참새들이 봄바람처럼 한바탕 몰려다녔어요. 잣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따스한 기운이 아른아른 일어나고 있었어요. 나는 힘껏 기지개를 켰어요. 겨우내 웅크리고 있어선지 삐그덕 소리가 났어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 둘 늘고 내 몸 속에도 다시 쓰레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한 아이가 과자 봉지를 버리다가 내 앞에 과자 부스러기를 흘렸어요. 어떤 아주머니는 먹다 남은 음식을 내 속에 쑥 넣었어요.

“아, 맛있는 냄새!”

까치 부부가 가장 먼저 입맛을 다셨어요.

“맛있겠다. 맛있겠다.”

기다랗게 줄을 지은 개미들도 곰실거리며 달려왔어요. 내 위로 가지를 펼친 때죽나무는 또 심통을 부렸어요.

“하필 여기에 쓰레기통이라니.”

“왜 또 그래?”

“네가 여기 있으니까 벌써 지저분해지잖아.”

맨 처음 내가 이 오솔길에 왔을 때부터 때죽나무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통통한 내 몸 속엔 언제나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었고 킁큼한 냄새가 났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까치랑 개미들은 좋아만 하는데 뭘.”

“난 싫거든.”

“싫어도 할 수 없거든.”

나도 지지 않고 대꾸 했어요.

저만치 까치 부부가 아카시 나무 위로 바쁘게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입에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어요. 나는 궁금했어요.

“뭐해?”

“둥지를 틀 거야.”

“둥지?”

“알을 낳을 거거든.”

“알?”

“우리 아기들이 태어날 거라고.”

“나도 알이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까치들이 고개를 갸웃했어요. 때죽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웃었어요.

“나라고 못 가질까 봐?”

나는 큰소리쳤지만 풀이 죽고 말았답니다.

높다란 아카시 나무 위엔 둥그런 둥지가 지어졌어요. 까치 부부는 둥지 곁을 훨훨 나르며 기분 좋게 춤을 추었어요. 나는 둥지를 우러르며 중얼거렸어요.

“나도 둥지를 갖고 싶다.”

“말도 안 돼.”

때죽나무가 또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어요.

“가질 수도 있지.”

때죽나무가 깐죽거릴수록 나는 더 둥지를 갖고 싶어졌어요.

“알을 낳았어. 알을.”

아빠가 된 까치가 아카시나무에서 때죽나무로, 또 내 둥근 지붕 위로 겅중거리며 자랑을 늘어놓았어요.

“축하해!”

때죽나무도, 언제나 말없이 덩그마니 서 있던 굴참나무까지도 기뻐해 주었어요.

보름이 지나자 어린 까치들이 알을 깨트리고 나왔어요. 아빠가 된 까치는 날개를 퍼덕이며 부지런히 벌레를 잡으러 다녔어요. 나는 가끔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느라 바쁜 아빠 까치를 불렀어요.

“내 속에 먹을 게 들어왔어. 한 번 뒤적여 봐!”

“고마워.”

아빠 까치는 좋아하면서 나를 뒤적였어요. 나는 가려워도 꾹 참았답니다.

봄 햇살이 제법 따가워졌어요. 가지로 내내 햇살 온도를 재던 때죽나무가 말했어요.

“이만하면 딱 좋군.”

때죽나무는 한꺼번에 우르르 꽃을 꺼내 흔들었어요. 노란 꽃술을 단 하얀 꽃들이 내 위로 나풀거렸어요. 기분 좋은 향기가 후르르 후르르 날아다녔어요.

‘아, 예뻐라!’

때죽나무는 얄미웠지만 꽃들은 하나같이 예뻤어요.

“내 향기가 엉망이 되면 네 탓이야!”

때죽나무가 잘난 척하며 쏘아댔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어요. 청소부 아저씨가 내 속에 있던 쓰레기를 마지막으로 가져간 후 더 이상 몸속에 쓰레기가 차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긴 것이었지요.

“건너편에 넓은 황톳길이 생겼거든. 숲을 보호하려고 이 길은 막았대.”

잣나무 숲을 건너다니던 까치가 말했어요.?

“잘됐네.”

때죽나무는 가지를 출렁이며 좋아했어요. 꽃잎이 파르르 떨어졌어요.

오솔길은 마치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처럼 쓸쓸해졌어요. 까치 부부는 새끼들을 데리고 잣나무 숲 쪽으로 떠났어요.

‘그동안 고마웠어. 둥지를 갖고 싶다는 네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까치 부부의 목소리가 아직 들려오는 것 같았어요. 나는 텅 빈 내 속을 들여다보며 행복했던 까치 가족을 떠올렸어요. 저만치 아카시나무에서 빈 둥지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어요.

때죽나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잔바람에도 몸을 흔들었어요. 하얀 꽃잎이 하나 둘 눈처럼 내렸어요. 내 지붕 위로도 몸속으로도 떨어졌어요. 때죽나무는 조롱조롱 열매를 많이도 매달았어요.

나는 할 일 없이 하루 종일 때죽나무 열매를 세어보고 세어보았어요. 동글거리는 때죽나무 열매들이 어쩔 땐 꼭 알처럼 보였어요. 풋풋한 열매들 사이로 조각조각 흔들리는 하늘이 보였어요. 하얀 구름이 뭉실뭉실 흘러갔어요. 몽롱해진 나는 때죽나무의 꽃향기를 품고 잠만 계속 잤어요. 가끔은 까치처럼 알을 품는 꿈을 꾸기도 했어요.

“네게 둥지를 틀어도 되니?? 찌이찌이.”

꿈결에 들리는 말인 줄 알고 나는 혼자서 피식 웃기만 했어요.

“안되겠니?? 찌이찌이.”

다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내 몸 속에 딱새 한 쌍이 있는 것을 알았어요.

“둥지를?”

“까치한테 네 이야기를 들었어. 넌 둥지를 갖고 싶어 한다며?”

“까치가?”

“우린 마침 둥지를 틀어야 해서 널 찾아 왔어.”

“정말?”

“응. 까치 말대로 여긴 정말 조용하네. 네 둥근 지붕 때문에 비도 안 들칠 것 같고. 거기다 꽃향기까지 나네. 정말 맘에 들어.”

내 속에는 때죽나무 마른 꽃잎이 소복했어요.

“알도 낳을 거니?”

“응.”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딱새들은 보드라운 풀잎을 자꾸자꾸 물어 날랐어요. 둥지가 다 지어지자 조그만 알 다섯 개를 낳았어요. 누가 볼까 걱정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때죽나무가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걱정 마.”

잠자코 있던 때죽나무가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했어요.

“네 꽃잎이 있어서 더 좋대.”

“딱새 이야기를 다 들었거든. 어쨌든 내 꽃잎 향기는 최고라니까. 말랐어도 향기가 남았잖니.”

“그래, 최고야.”

때죽나무는 가지를 더 우쭐거렸어요.

“어쨌든 미안. 널 비웃었던 것. 넌 알을 가진 특별한 쓰레기통이야.”

"내가 가질 거라고 했잖아. “

내 어깨도 으쓱 올라가고 있었어요.

“부탁해. 난 알을 잘 지키고 싶어.”

“물론이지. 알은 내 열매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거든.”

때죽나무가 잘 익은 열매를 기분 좋게 흔들었어요. 나는 숲 속에 막 외치고 싶었어요.

‘나도 알을 품었어!’

하지만 꾹 참았어요. 딱새네 소중한 알을 지켜줘야 하니까요.
 


송재찬(동화작가) 채인선(동화작가) 
응모작은 크게 가정불화를 소재로 한 현실 동화, 사물이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의인동화 두 부류였다. 사실 가장 동화다운 현실은 그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만도 아니고, 그것을 밀쳐두고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김완수의 ‘뼈다귀를 문 고양이’, 이승민의 ‘비밀의 다이어리’, 오채의 ‘뚱보 스킬’, 박소명의 ‘나도 알을 품었어’다. ‘뼈다귀를 문 고양이’는 문체가 살아 있고 이야기를 쉼 없이 풀어나가는 힘은 있으나 창작욕의 과잉이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구조적인 오류나 다른 치명적 결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비밀의 다이어리’는 문체도 간결하고 내용도 좋았다. 하지만 작품이 소소한 일상에서 그쳐, 재미난 일화나 남의 일기를 훔쳐본 느낌이 들었다. ‘뚱보 스킬’ 역시 문체나 내용면에서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대회에서 다른 아이를 도와주는 선생님의 ‘반칙’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큰 의문이다. 이는 작품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다.

‘나도 알을 품었어’는 제한된 원고매수 안에서 이야기를 풀고 마무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이야기에 생기가 부족한 것이 아쉽지만 위에 지적한 여러 가지 면에서 흠이 없는 안정된 작품이다. 박소명 씨께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위에 언급한 작품들이 당선작에 버금가는 수준이라는 것을 덧붙인다.
 


박 소 명
△본명 박광숙
△1960년 전남 곡성 출생
△방송통신대 유아교육학과 졸업
△2002년 월간문학 동시부문 신인상 수상
△은하수동시문학상, 오늘의동시문학상 수상
△현재 화랑초교 독후영재반 교사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먼저, 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신 선물 덕분에 늘 꿈꾸며 살게 되었으니까요.
지난 여름 37일간 남미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꾸던 일을 이룬 것이지요. 페루 이까사막에서 진도 7.5의 지진을 만나 밤새 죽음과 찬란한 별빛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빈대에 온 몸을 물려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의 구름으로 떠다녔고 망망한 티티카카의 갈대숲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기쁨과 더불어 너무 커다란 여행이어서 여행기 한 장 끼적이지 못했지만 가슴엔 제 동화처럼 알 하나를 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그 알이 날개를 달고 글 속에서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고 다시 꿈꾸어 봅니다.

이번 당선 또한 제가 꿈꾸기엔 벅찬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글을 썼습니다. 싹이 트지 않을 것을 미리 걱정하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과정 또한 행복한 꿈꾸기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또 어떤 꿈을 향해 걸어갈지 알 수 없지만 이 기쁨을 오래오래 기억하며 글을 쓰고 싶습니다.

동아일보사와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병규 선생님, 동화세상 친구들, 오은영 시인 감사합니다. 언제나 기도로 후원해주는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
단평·빈곤한 역사와 소설-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 윤 경 희 



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


1. 신체, 징후, 미학적 진료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 종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가난, 실업, 우울증, 탈속. 그 중 무엇이라도 좋겠으나, 내 경험으로 볼 때 그 답은 질병이다. [......] 아름다움도 추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이, 나는 그저 병과 함께 살았다.
- 『그대의 차가운 손』


등단작인 「붉은 닻」에서부터 최근작인 『바람이 분다, 가라』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작품들에는 근현대적 의학담론의 시각에서 결코 정상이라 간주되지 않는 신체적 징후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그들이 앓는 병적 증상들의 일부는 작가의 집요한 관찰의 시선과 부단한 언어화의 시도에 힘입어서 현실세계에서 기술적으로 통용되는 병환의 분류기준에 맞추어 진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핍진성을 획득한다. 욕지기, 토악질, 위경련 등의 소화기능장애는 한강 작품 속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표출하는 대표적인 신체적 증상이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붉게 흉터 질 정도로 악력을 다하여 주먹을 쥔다거나 치아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로 이를 악무는 등, 하나의 견고한 돌덩이인양 온몸의 의사-마비상태를 지향하는 긴장강박증 역시 빈번히 발생한다. 사소한 외부적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경과민과, 표피의 상처와 울혈의 원인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통각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감한 신경마비가 공존한다. 급성야맹증 같은 히스테리성 신경마비, 거식과 폭식, 특정음식물 섭취거부 등의 식이장애, 우울증, 결벽증, 환청, 발작에 더해, 폭음, 알코올 중독, 노출, 질주, 자해, 투신 등 극한의 신체적 경험을 향한 의지적 충동이 한강의 인물들을 강렬히 사로잡는다.

병적 증상들에 관하여 때로는 작가 스스로 기술적 어휘들을 동원하여 구체적이고도 치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한강의 작품들은 결코 단순히 모호한 마음의 상처나 명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아픔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로 흐지부지 수렴되지 않는다. 작가가 구현한 병의 핍진성은 그러므로 독자의 입장에서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병이라든가 글쓰기를 통한 치유 등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의미하는 바는 거의 없는 상투적이고 모순적인 어구들을 무책임한 해석으로서 제시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다. 존재의 근원에 병이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로든 그 어떤 행위로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적 사유의 개념적 대상, 은유 등의 언어적 구성물이기 이전에, 또는 그것들을 넘어서, 병은 신체의 물질적 유기조직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사유와 언어의 토대로서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인자라는 데 그 우선적인 실재성이 있다. 대다수의 경우, 병은 통증을 수반하고, 통증은 힘의 감각에 기인한다. 병에 관한 서사를 창조하거나 해석할 때, 병을 신체와 정신에 작용하는 실재적 힘으로서 인식하기도 전에 섣불리 언어화하면서 은유로 덮으면, 실재적인 고통의 감각은 신체적인 표현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언어의 감옥에 갇힌다. 언어로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의 소설들에서 병적 징후들의 기술적인 국면에 치중하여 의학이나 교조적 정신분석 등 문학외적 담론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큰 성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 병적 징후의 생생한 묘사는 신체와 언어의 새로운 관계를 향한 실험적 허구이지 학술적 사례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인물들은 통증을 자각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과 의사의 권위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지만(「여수의 사랑」에서, “난 아파요. 정말로 아프단 말입니다,” 「진달래 능선」에서 ‘이봐, 난 실제로 아프다구’), 징후는 병인에 대한 기존의 지식체계의 망을 빠져나가거나(「내 여자의 열매」에서 “지금 보이는 게 위장인데...... 아무 이상 없어요”), 어떤 의학기술이나 약물요법으로도 완치되지 않고 재발한다. 인물들은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를 구분하는 사회적 합의기준에 타율적으로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병의 인식과 치료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몽고반점」에서,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 “...... 나한테 정신 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들이 행여 치유를 원하기나 한다면, 그것은 의학이나 정신과학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욕지기, 긴장강박증, 결벽증, 환청 등, 작중인물들이 “심인성 장애”라고 명명하는 일부 증상들의 경우, 그것을 앓는 인물들은 치료에 대한 의지 자체가 없고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 집착한다. 만성적인 위경련으로 가장 자주 구현되는, 병환의 완치불가능성과 단속적인 재발성은 한강이 묘사하는 모든 병적 징후들을 공통적으로 가로지르는, 징후들의 징후이다. 내장의 경련은 「붉은 닻」에서 『채식주의자』까지만 아니라 아마도 차후의 소설들에서도 재발할 것이고, 마치 고지식한 내과 의사를 속이듯 독자의 시선을 피하며 달아나는 경련의 인자는 내장에서는 물러간다한들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심장, 눈꺼풀, 입술, 사지, 자궁 등 몸 구석구석을 끈질기게 유랑하면서 신체를 파동치게 할 것이다. 결국 하나의 소설에서 다른 소설로 파동의 에너지를 전달하며 반복되는 경련은 작중인물의 신체의 격렬한 운동을 넘어서 한강 작품의 문학적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리듬과 패턴으로까지 증폭된다. 따라서 해석이 나아가야 할 지점은 작중인물들의 병명을 진단하거나 정신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토하고 경련하는 글에서 생성되는 낯선 리듬을 감각하는 것이다.

결국 병과 신체의 실재성을 고려하지 않는 언어유희가 체감되는 통증에 무감각함으로써 병과 치유에 관한 구체성 없는 모호한 서사만을 양산하고, 병과 신체에 관한 문학외적 담론이 문학적 신체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유혹적인 핍진성의 외피로 덮인 허구적 징후를 해석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을 때, 들뢰즈가 제시한, 치료에 관한 그 어떤 기존의 담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순수하게 미학적인 진료”[une clinique purement esthetique] 개념의 실현가능성은 설득력을 얻는다.1)

기존의 의학, 정신분석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병적 징후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는 글쓰기를 언제나 형성중이고 언제나 미완성인 “되기”[devenir]의 과정이자,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낸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un passage de Vie]로 정의한다.2)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그러한 생의 통로가 가로막히고 끊겼을 때 발생한다. 글을 씀으로써 지속적으로 "되기"의 과정을 실천하고 생의 통로를 뚫는 작가는 따라서 병자가 아니라 세계와 인간에 관한 징후들을 진료하는 의사이다. 문학은 삶의 길목이 막힌 자들,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발명한다. 그들의 혁명적인 열광과 착란은 지배자의 시각에서는 광기와 비정상이지만, 억압받은 생의 활로를 뚫고 끊임없는 “되기”의 가능성을 되찾아준다는 점에서 해방적인 치유책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역설적으로 병이 아니라 건강을 촉진한다.3)

이러한 문학의 임상적 기능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신체에 침투한 지배와 피지배,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 이성과 광기 등 이분법적 대립항들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일견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의 논지에서 병적 징후는 다시 건강의 징표로 치환되므로, 결국 병을 다시 억압과 말소의 함정에 빠뜨린다거나, 또는 착란과 광기에 대한 낭만적이고 순진한 예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비정상은 정상으로, 병적 징후는 건강으로, 죽음에 맞닿은 경험의 통렬한 감각은 생명의 징표로, 광기는 예술혼 등으로 손쉽게 치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을 미학적 진료를 실천하는 임상적 문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병적 징후들에 대한 진단과 치유책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징후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신체에 징후들을 접붙여서 그것들이 신체를 관통하는 궤적을 치밀하게 뒤쫓고, 신체와 징후와 궤적의 복합적인 형성물을 언어로, 글로, 즉 문학적 신체로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전언대로, 작가는 의사이고, 의사는 발명가이다. 한강은 토악질하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환청을 듣거나 투신하거나 자해하거나 질주하는 신체들을 발명하고, 단속적으로 재발하는 완치불능의 징후 속에서 그들은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몽고반점」) 같은, 극한의 감각과 경험이 집약적으로 응축된 매 찰나를 살아내고, 그 찰나들의 연속은 곧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 탈주의 구멍을 이룬다.


2. 구멍, 탈주, 기관 없는 신체 되기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거대한 바윗돌 같은 어둠이 재인의 몸을 조여오고 있었다. 살이 뭉개어졌다. 등뼈가 오그라들었다. 쇄골이, 갈비뼈가, 무릎과 복숭아뼈가 일제히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모든 근육과 내장들이 성내며 사방으로 튕겨져나갔다.
- 「저녁빛」


욕지기와 구토감은 한강의 소설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관찰되는 신체적 징후이다. 욕지기가 치미는 상황과 원인은 다변적이다. 길 위에 떨어진 종이를 보고 구토하는 앙트완 로캉탱처럼, 외부로부터의 감각적 자극이나 타자적 대상물에 의해 촉발되어 구토하는 인물은 한강의 소설 속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우선 그들의 구토는 이질적인 타자를 거부함으로써 신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보존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토사물을 쏟아내듯 세계로부터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말소하거나 내던져 버리고 싶은 자기부정의 성격이 강하다. 입영 전날 자신의 “젊음이, 슬픔이, 바람 같은 만남들이 일제히 치밀어올라와” 욕지기를 느끼고 토악질을 하는 「야간 열차」의 화자나, 과거에 제작했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 이미지들에 대한 자신의 미움과 환멸과 고통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몽고반점」의 비디오 아티스트처럼, 혐오와 부정의 대상은 현재의 자신과 연속체를 이루는, 과거의 의식과 기억과 감각이 응축된 순간순간의 자신의 면모들이다. 이들에게는 과거가 비교적 다행스럽게도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자취와 기억의 편린으로만 남아 있는 반면,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의 L.에게는 사춘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다스리기 위한 폭식의 결과로 비대한 육체로 남았다. L.은 계부의 성적 폭력에 대한 방어적 기제로 “허벅지가 너무 굵어져서 억지로 파고들기” 어려운 “허옇고 물컹물컹한 몸”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몸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처이자 흉터이다. L.의 거식증과 구토는 근원이 불분명한 과거의 감정이나 기억에 대한 염오에서 비롯된 비자발적인 내장 운동에 의한 단순한 메슥거림과 욕지기를 넘어선다. 그녀는 과거가 각인된 자신의 신체 전체를 거부하려는 의지에서 자발적으로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는다.

“평생 못 달아나. 죽을 때까지 난, 내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내 몸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니까.” 그러나 L.의 자조에서 역설적으로 엿보이는 것은 해방과 탈출의 통로이자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전환되는 신체의 가능성이다. 구토는 식도와 입을 통해서 토사물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 “붉은 내장들을 줄줄이 토해낸 뒤, 할 수만 있다면 양말 속 뒤집듯이 항문까지 고스란히 뒤집어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흰 꽃」의 화자의 경우에서처럼 부정하고 싶은 과거의 기억들과 감정들을 내뱉으려는 욕구가 신체적 징후로 발현된 것이다. 입은 “흡사 짐승의 소리 같은, 분절되지 않은 비명”(『그대의 차가운 손』),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 괴성 같은 신음”(「몽고반점」)처럼, 소통과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언어로는 발화할 수 없었던, 응축된 회오의 감정이나 억압된 욕망의 목소리가 탈출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구멍은 신체의 도처에 존재한다.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몽고반점」) 듯한 몽고반점은 단순히 색소가 침착된 표피를 넘어서 그것보다 더 깊은 심층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내부를 꿰뚫고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의 시선을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구멍으로 변환된다. 멍은 외부에서 가해진 힘에 내부의 혈관이 반응하여 생성된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접점이자, 신체의 내부적 변화의 징후가 스미고 새나오는 탈출구이기도 하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떠나서 피를 갈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체의 가능성을 꿈꾸는 화자의 아내에게 피부의 푸른 멍은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가 발현된 징후이면서 녹색식물로의 변신의 욕망 역시 표출하는 탈주의 통로이다. L.에게 있어서 부정하고 싶은 신체로부터의 탈주가 자학적일 정도로 지난한 까닭은, 그녀가 껍데기로서의 신체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서 오로지 실제의 구멍인 입으로만 탈주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피부 전체를 탈주의 구멍으로 이용하고, L.의 경우와는 달리 환상적인 서사구조 덕택에 가능하긴 했지만, 기존의 신체로부터 탈피하여 완벽한 변신을 성취한다. 변신은 "되기"의 일환으로서, “알아볼 수 없게 됨”[devenir- imperceptible]으로써4) 세계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고 위장하는 행위, 정체성의 교란을 통해 억압적인 질서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와 구멍을 뚫는 행위이다.

투신과 질주의 충동 역시 구토와 함께 구멍을 통한 탈주의 욕망을 표출한다.「몽고반점」의 화자는 자기부정의 구역질과 동시에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먹고 마셔온 곳을 모두 토해”내고 싶은 구토감과 “달리다가 숨이 차서 고꾸라지고”(「질주」) 싶은 질주욕구는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징후는 신체를 생성한다. 그러나 징후에 의해 신체가 생성되는 양상은 작중인물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변화의 방향과 대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징후가 고통을 수반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신체는 실재이기도 하지만 담론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물질로서의 신체는 실재계에 속하지만 그것을 조직화하고 표상하는 것은 상상계의 이미지와 상징계의 언어의 그물망이다. 실재로서의 물질적 신체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개입되는 이미지와 언어의 스크린을 투과함으로써 하나의 통합적 조직체로 형성된다. 이미지와 언어에 의해 신체가 하나의 통합적 조직체로 형성될 때 실재로서의 신체는 필연적으로 억압되고, 그것은 징후의 형식으로 귀환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E.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신체, 즉 미, 경제성, 섹슈얼리티 등 모든 담론의 층위에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맞추어서, 소읍출신의 육손이 소녀에서 능력 있고 아름다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자신의 신체를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의 변신의 의도는 구멍이 아니라 “데드 마스크” 같은 껍데기를 만드는 데 있고, 그것은 탈주가 아니라 사회적 진입을 목적으로 한다. 완벽히 조직된 껍질로 감싸인 그녀의 신체에서 누출되는 징후는 불감증, 즉, 고통 없는, 그러나 쾌락에도 반응하지 않는, 감각의 부재이다.

E.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인물들은 표층적인 욕망의 방향과는 다른 신체를 생성하는, 또는 알 수 없는 근원에서 발생해서 신체의 통합적 조직성을 교란하는 징후들에 시달린다. 이때 격렬한 고통의 감각은 통합적 조직체와 그 조직체의 틈을 뚫고 나오려는 징후 사이의 길항에서 발생한다. 징후는 일견 정상적으로 조직되고 기능하는 신체의 표면 아래 다른 신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징후는 진부한 이미지와 빈곤한 언어로 표상되지 않은, 협소한 주변 세계를 구성하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벗어나는 신체가 탈주해 나오는 구멍이다. 정상적인 기관 기능을 학습하고 조직의 통합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체의 실재적인 국면, 그것은 들뢰즈가 제시한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의 한 정의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각각의 기관들은 존재하되, 그 기관들이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되지는 않은 신체를 의미한다.5)

경련, 구토, 배설 등을 통해서 조직체로서의 신체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기관 없는 신체는 한강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겪어내는 징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존의 이미지와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신체의 영역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를 탐색하고 발명하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를 환기한다. 따라서 징후는 발명으로 향한다. 「몽고반점」의 화자가 감지하는 예술 창작의 단초, “에너지가 조금씩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느낌이 내장 경련이나 욕지기의 징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외적 현실로부터 규정된 이미지와 언어의 껍질을 뒤집어쓴 신체를 거부하고, 내부에서 추동되는 에너지에 걸맞는 새로운 신체를 발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구토감을 자극한다. 「저녁빛」의 재헌이 그리는 회화,「몽고반점」의 화자가 찍는 비디오클립, 『그대의 차가운 손』의 장운형이 제작하는 인체캐스팅 등 예술작품 연작은 반복적으로 추동되는 낯선 에너지에 의해 새로이 드러나는 신체의 가시적인 한 국면을 재현한다. 연작은 징후의 반복성에 관한 자기반영적 형식이고, 그런 점에서 한강의 모든 소설들 역시 제목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징후들을 끊임없이 변주해내는 연작을 이룬다.

새로운 신체 발명의 욕구는 예술적인 창작 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가가 스스로 창조해낸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의 몸이 아니라 자기와 분리된 대상이자 타자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자 타자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 만들기보다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고정시킬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조직화된 신체에서는 발현되지 못했던 감각을 해방시키고, 감각은 기관 없는 신체를 파도처럼 가로지르면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움직이는 리듬을 직조한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온몸의 장기들이 출렁이”(『그대의 차가운 손』)는 듯한 토악질은 내장의 리드미컬한 운동이자 기관 없는 신체의 탈주의 시작이다.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몸 위에 꽃들이 그려질 때, 즉 그녀가 통합적인 조직체나 단일한 개체 개념으로서의 신체를 벗어나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가 되어갈 때, 그녀의 몸은 떨리고, 그 가녀린 진동은 화자에게까지 파장을 전달한다. 병적인 징후들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체 상태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강렬한 감각을 일깨우고, “이적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또렷한 감각들이 내 눈과 코와 귀와 살갗을 뚫고 몸속으로 헤엄쳐들어오기 시작”(「흰 꽃」)하는 느낌처럼, 고통의 임계점에서 무한한 희열로 전환된다. 자극은 구멍으로서의 감각기관들을 통해 신체 내부로 침투하고, 조직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신체는 역으로 미지의 자극에 반응하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감각기관, 구멍이 된다(『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예리한 송곳 같은 것으로 명치께가 관통된 것 같았고, 그 관통된 부분이 차츰 넓어지는 것 같았다. 가슴과 복부 전체가 거대한 구멍이 된 것 같았다.")


3. 의인법, 공감각, 관능

 부드러운 개펄 위로 한발 한발 다가온 바다는 뻘밭 속에 처박혀 있던 목선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물결의 춤추는 듯한 발끝이 배밑창을 두드릴 때마다 낡은 목선들은 잠 덜 깬 여인처럼 게으르게 뒤치락거렸다. [......]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의 영육을 두 팔 가득 끌어안으려는 듯이 다가오는 바다, 부드러운 혀로 핥고 매만져 구석구석 침윤해 있던 온갖 상처와 갈망과 슬픔을 끄집어내려는 듯한 저 담홍빛 물결.
- 「저녁빛」


그러나 단지 인체만이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의 가능성을 지닌 것인가. 신체 개념은 유기체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 언어, 국가, 집단 등 조직과 체계를 구성하고 개체화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 문학은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낸,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라는 들뢰즈의 정의에서, 생의 외연을 반드시 유기체의 자연발생적인 생장과 소멸이나 인간의 삶과 역사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되기”가 개체적 활동이 아니라 언제나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것들과의 관련하여 실천되는 집단적 활동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유기체의 생명 바깥에서도 일어나는 기관 없는 신체 되기는 충분히 가능하다. 작품내적인 인물의 형상과 징후를 넘어서 문학적 글쓰기 자체에도 작용하는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기관 없는 신체가 저항하는 것은 기관들이 통합적으로 조직화된 신체, 각각의 기관에 적합한 기능과 감각이 배분된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진 실체가 아니다. 정치경제적 제도, 상징계적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와 기호, 미적 판단과 취향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 등은 신체를 통합적으로 조직화하는 인자들이다. 신체는 제도와 담론과 이미지의 그물망 안에서 감각과 기능과 사용법에 관한 훈육과정을 거치고, 통합적 조직체로 편성된다. 문학이 조직적 유기체로의 신체에 저항하고 기관 없는 신체 되기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허구를 경유하여 현실세계의 지배적인 언어, 이미지, 미디어, 사회적 타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분절되고 유기적으로 재구성되는지 폭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문학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면, 그것은 문학이 기존의 언어적 질서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관 없는 신체를 관통하는 감각과 리듬과 떨림의 운동을 표현할 만한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은 기관 없는 신체 되기를 실천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신체적 징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징후의 발명을 넘어서 징후적 언어까지 발명함으로써,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적 신체가 되기를 지향하고 실천한다.

언어적 구성물은 어떻게 리듬감 있게 움직이며 어떻게 파동을 생성해 낼 수 있는가. 그것은 우선 문자와 소리의 차원과 의미의 차원이 분리된 언어 자체의 특성을 극대화하여, 하나의 표현이 여러 의미를 내뿜으며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은유와 환유의 수사법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하다. 또한 기관 없는 신체가 되어 새로이 경험하는 감각들, 신체 자체의 파동을 언어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함으로써도 가능하다.

한강의 작품에서 가장 현저한 수사적 어법은 의인법[anthropomorphism]과 공감각[synesthesia]적 묘사이다. 자연계의 사물들이 고유명사로 불리는 오비드의 『변신』에서처럼, 일반적인 의인화에서 하나의 대상은 인간적인 특성과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단일한 개체성을 획득한다. 6)

그러나 한강의 작품에서 의인화된 자연계의 사물들을 각각 호환될 수 없이 구별되기는커녕, 서로 몸을 뒤섞듯 개체간의 경계를 흐리고 지운다. 왜냐하면 의인화는 자연에 인간 신체의 이미지를 투영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한강의 소설들에서 인간 신체는 통합적으로 조직된 단일한 개체, 각각의 기관들이 제 자리에서 정확하게 기능하는 유기조직체가 아니라, 여기저기 분절되고 그 분절된 각각의 부분들이 공감각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발명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몸을 통합적으로 응시하지 않는 인간의 시선에 자연계의 사물들 역시 어떤 것이든 통합적인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도시, 바닷가, 광산촌, 지형과 공간을 구성하는 대상들 어떤 것에나 목소리, 눈물, 통곡, 가슴, 손, 혀, 때로는 몸 전체 등 인간적 형상의 자취가 새겨져 있다. 의인화된 외부적 공간과 풍경은 작중인물의 내면의 정서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상이 아니다. 파편화되고 무질서하게 분절된, 기원이 이질적인 신체의 부분들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고, 누구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감각과 감정과 기억이 투사된 풍경은 그 자체로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내고,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여수의 사랑」) 하고 싶은 자해의 충동은 자연의 풍경과 인간의 감각, 신체의 일부, 정서를 공유하고 교환함으로써 개체성과 정체성의 속박, 통합적 유기체로서의 신체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몸과 오토바이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고, “반인반수와도 같이 결합된 민첩한 물체가 격렬한 속력으로 아스팔트를 미끄러”(「어느 날 그는」)지는 극한적 속도의 체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혼이 피부를 뚫고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질주」), 극한의 경험을 통해 신체는 구멍, 강렬한 감각을 받아들이는 기관,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 그 자체가 된다.

새로운 신체로 경험하는 더욱 풍부한 감각, 새로운 신체가 획득하는 더욱 복합적인 기능, 그 인간적 신체와 시선으로 새롭게 재현하고 발명하는 자연과 언어, 한강의 소설들은 이러한 새로운 징후들의 연속체이다. 인간과 자연과 언어를 통합하는 이 감각적이고 기능적인 신체의 징후들은 관능의 경험으로 나아간다. 관능[官能]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모든 종류의 감각기관들이 제 기능을 최고도로 다 하는 것, 외부에서 부과되는 자극에 가장 적극적으로 신체를 내맡기는 것, 경련에 이를 정도의 신경의 떨림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강의 글쓰기는 “관능적일, 다만 관능적일 뿐인”(「몽고반점」) 이미지를 향해, 관습적 언어와 이미지에 억눌린 감각들의 극한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신체를 발명하며, 끝없이 떨리고 파동치는 징후들을 발명하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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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Editions de la Difference, 1981) 38p.
2) Gilles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93) 11p.
3) Deleuze, 위의 책 13-15p 요약.
4)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10. 1730 - Devenir-intense, devenir-animal, devenir-imperceptibl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2: Mille Plateaux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80).
5)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35p.
6) Paul de Man, "Anthropomorphism and Trope in Lyric," The Rhetoric of Romanticism (New York, Columbia UP, 1984) 참조.



단평·빈곤한 역사와 소설 :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우리는 빈곤해졌다. 우리는 인류의 유산을 조금씩 조금씩 포기했으며, “동시대”의 자잘한 변화와 교환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종종 백분의 일밖에 안 되는 가격에 전당포에 맡기기도 했다.
- 발터 벤야민, 「경험과 빈곤」 중에서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위시한 여러 문학 에세이들에서 소설의 발생에 관한 자신만의 독특한 의견을 반복적으로 개진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야기꾼들의 구전적인 이야기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이야기는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 - 전통, 역사, 유산 - 을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매체였고, 인간은 그렇게 누구나 공유하고 실제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함양했다. 이야기꾼과 이야기는 철저하게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전쟁 등의 사건은 인간의 삶의 양식과 존재기반을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이 단절시키고, 이야기꾼과 이야기가 대변하는 공동체적인 경험, 역사나 전통이나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가치를 파괴한다. 소설은 이렇게 공동체적 경험이 빈곤해진 시대, 역사와 전통이 회의적으로 부정되는 시대에 단자화된 개인들을 위무하기 위한 문학양식으로서 태어난다.

배수아는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위한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이자 최초의 모티프는 빈곤이었으며, 점점 넓어지고 팽창하는 빈곤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원고 역시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았다고 밝힌다. 빈곤이 소설을 발생시키고 지속시키는 근원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벤야민과 배수아는 각자의 시대와 영역을 넘어 공명하고 조우한다.

마지막 한 장[章] 이전까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작중인물인 김성도의 모순형용적인 표현대로 ‘빈곤에 대해서 풍부한 스펙트럼을 제공해줄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관한 '초상화, 인간의 백서'에 충실하다. 많은 인물들이 일회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각각의 장들은 지극히 사소한 디테일로 연결되어 있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빈약한 시간만이 경과할 뿐이어서, 게다가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면서 어떤 결정적 파국을 예비하는, 따라서 진부한, 이야기 구조도 아니어서, 소설은 언뜻 무질서하게 수집되고 나열된 단편적 이야기들의 몽타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이야기의 질서를 결정짓는 것은 사건의 전후관계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으리만치 얇고 납작한 이 동시대의 시간성이 아니라, 가난하고 빈곤한 삶의 조건을 인식하는 능력의 점진적인 전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장악력의 점층적인 강화이다. 빈곤을 재현하는 소설의 언어는 "돈이 없어"라는 단순하지만 현실적인 두 마디의 말, 주관적이고 편협한 신세한탄에서 출발하여, 사회학 논문의 문체를 원용하면서 날카로운 통찰과 객관성 위에 반어적인 자기부정과 연민의 어조를 더한 "예비적 서문: 슬픈 빈곤의 사회"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의 결을 점차로 다각적이고 다층적으로 촘촘하게 조직해나간다.

글머리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와 관련하여, 소설의 마지막 장인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에 이르러, 빈곤에 관한 가장 통시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인식을 구현하는 인물로서 전당포 업주가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빈곤이란 허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태생적인 외모의 추함, 지식과 교양에 대한 문화적인 욕구를 채워줄 만한 환경의 부재 등, 빈곤의 형상은 개인의 내면과 외면뿐만 아니라 가족과 국가의 역사, 인류 전체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헐벗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배수아의 소설에서 빈곤은 마침내 동시대와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 훨씬 오래 되고 근본적인 인간의 역사와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인식으로 급격히 확장된다. 우리가 빈곤하다면, 그것은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 사랑, 명예, 지식, 미 등 개인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대상들이 부재하고 그것들에 이르는 방법이 좌절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이 한국의 역사고 유산이란 말인가? 그들은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은 한시도 같은 '역사' 안에 머물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빈곤하다면, 보다 확장된 인식의 차원에서, 개인들을 공동체로 묶는 역사, 유산, 공통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역설적으로 그 빈곤한 역사의 공간에서 태어나고 지속된다. 역사적으로 빈곤한 인간을 위하여, 소설은 있다.
 

오생근(문학평론가) 한기(문학평론가)
 
문학평론 부문은 비교적 쉬운 심사 작업이 되었다. 한강의 소설을 해부한 ‘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현대적 몸의 담론 펼치기를 넘어, 병적 징후로 드러나는 신체미학의 세계를 질 들뢰즈의 이론에 비춰 의미화하는 비평적 솜씨는 드문 재능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당선자의 주소로 보아 유학 중이 아닌가 짐작되지만, 타국에서도 우리 문학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는 흔적을 보여주어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은 부피의 안심(安心)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배수아 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 대한 단평 ‘빈곤한 역사와 소설’도 유려한 비평적 해석의 글로 판단되었다.
그동안 많은 여성작가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더욱 유력하게 만드는 여성비평가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빈곤한 감이 있어 아쉬움을 주었는데, 유능한 신예 비평가를 맞아 한국문학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차점자들에겐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러 글들이 눈에 띄었지만, 대상 선정과 재단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비평 작업이란 담론의 개진 이전에 대상의 재단과 주제 포착으로 작업의 반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제가 신선하면서도 안정된 작가의 세계를 포착하여 당대성의 담론을 펼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윤 경 희
△197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동 대학원 불문학·영문학 석사
△미국 브라운대 비교문학 석사
△파리8대학 비교문학 박사과정 재학 중 

가장 먼저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말과 글을 처음으로 가르쳐주시고 감정과 생각이 번져 나오는 기원이 되어주셨습니다. 동생들에게 고맙다고 전합니다. 지구별 곳곳에 멀리 떨어져 빛나는 반딧불 같은 우리들. 신광현 선생님께 아무리 드려도 모자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게 문학적 소양이 있다면 그것을 처음으로 알아봐주시고, 북돋아주시고, 존경하는 지도교수님이자 제 글의 가장 멋진 독자이자 삶의 따뜻한 멘토가 되어주셨습니다.

이성원 선생님께 잘 익은 포도주와 함께 감사드립니다. 낭만주의에 관하여, 공부의 대상을 넘어, 그것을 반드시 내 삶으로 살아내겠다는 의지적 충동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써도 써도 부족하도록 쓰겠습니다. 멀리 있어도 들리는, 깊이 울리는 언어를 만드시는 작가께 감사드립니다. 어느 먼 곳으로나 그녀의 책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부재하는 재능에 자학할 때마다 포근히 다독여주는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분, 제가 만드는 거의 모든 문장들의 독자, 제 삶의 수신인에게, 나침반으로, 체온계로, 사랑과 감사의 말을 보냅니다. 아침에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덤덤했는데, 하루의 일과를 무심히 수행했는데, 지금 감사의 말을 쓰는 동안 눈물이 아롱아롱 맺힙니다. 감사의 말로만 가득 찬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가작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
단평·그 여인의 등 뒤에서 -이창동의 ≪밀양≫에 관하여                       - 이 나 라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


0. 익숙한 풍경에 맞서다.
지아 장커와 홍상수는 익숙한 영화의 풍경내지는 풍경을 재현하는 익숙한 영화적 방식에 의문을 표시하는 감독이다. 이들은 자연이나 도시의 풍경을 안정된 깊이감을 지닌 영화적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이들의 장면 구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시종 일관 넓은 범위를 담아내는 롱 샷으로 산시성, 북경, 삼협의 '어떤'풍경을 잡아내는 반면 홍상수의 영화에선 방 구석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어정쩡한 자세의 육신들이 풍경을 대신하기 일쑤이며, 집 밖에 나선 등장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세계의 풍경을 좀체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관광지로, 옛날 여자 친구가 사는 주변 도시로,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이 두 감독은 각각 ≪죽은 풍경≫ 속에 흐르는 시간을 찍어내려 하거나 (지아 장커의 경우),≪죽은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찍어내려 한다. (홍상수의 경우) 이들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근대적인 의미의 ≪풍경≫ 개념, 고정된 주체의 눈 앞에 펼쳐진 대상으로서의 원근법적인 풍경에 맞서는 영화적인 대결을 벌인다.

1. 여백의 풍경과 풍경의 부재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의 한 장면과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의 한 장면을 우선 겹쳐 보자. ≪스틸 라이프≫ 속 산밍과 센홍 (그리고 다큐멘타리 ≪동≫ 속 화가 리우 샤오동) 은 모두 산샤 언저리에서 이 곳의 풍경을 바라본다. 물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샤의 풍경은 중국 전통 산수화마냥 화면의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기며 인간을 압도하는 풍광을 드러낸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와 그의 선배 역시 댐공사로 만들어진 춘천 소양강호 풍경을 바라보며 전망대에 서 있다. 평평한 앵글로 찍힌 롱 샷은 소양강호의 풍경을 배경에 깔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부분에 두 남자의 뒷 모습을,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부분에 여대생의 뒷 모습을 배치하고 있다.

산샤 계곡의 여백은 평소 지아 장커가 즐겨 담는 여백과 다른 듯 닮아 있다. ≪임소요≫에서 차오 차오가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로 질러 걷는 빈 터 역시 황량하게 버려진 여백의 공간이다. ≪플랫폼≫에 등장하는 옛 성곽 역시 어떤 형태를 지닌 구조물의 역할을 하기보다, 여기에 기대 선 등장인물의 뒷면을 채우는 무차별적인 평면이다. 이 성벽은 인물 뒤에서 공간을 가득 메우지만 관객은 오히려 이 전면적인 평면 탓에 등장인물들을 빈 공간에 존재하는 형상들처럼 지각하게 된다. 동양의 산수화에서 여백은 의도적으로 비워진 공간이고, 산과 물을 이어주는 기가 흐르도록 하는 긍정적인 공간이다. 반면 서구의 공간론이나 시각 구성의 역사에선 이런 긍정적인 여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빈 공간(진공)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그에 따르면 진공이 존재한다면 사물이 방향을 잃고 모든 방향으로 흐르고 뒤엉키는 무한한 혼란의 상태에 빠질 것이므로, 우리는 세계의 질서, 코스모스를 인정하는 한에서 진공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지아 장커가 구성해내는 여백은 세계의 흐름이 멈춰 선 고요한 지점이 아니다. 이 여백은 항상 세계의 혼돈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철학자들이 세계를 질서 지워진 공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세계에서 배제한 빈 틈, 빈 공간이 바로 지아 장커가 표현하는 여백이다. 나는 이 여백을 질서 잡힌 세계의 풍경에서 배제된 ≪죽은 풍경≫, 세계가 죽은 것으로 간주한 풍경이라 칭할 것이다.

다시 소양강 앞으로 돌아와 보자. 언뜻 보아 호수를 앞에 둔 두 남자와 한 여자는 모두 풍경을 '완상'하고 있는 듯하다. 십 초 가까이 지속하는 이 샷의 다음 샷은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의 정면 샷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관객-가 화면 뒤쪽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이들이 풍경 대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은 홍상수가 어떻게 의도적으로 풍경을 자신의 영화에서 지워내는가,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풍경의 부재를 목도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홍상수가 작심하고 풍경을 (찍기를/보여주기를) 거부하는 감독이라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영화는 대체로 집을 벗어나서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옆집 화단에 심어진 채소의 짧은 클로즈업에 이어 주인공이 옥탑방 문을 열고 햇살 아래로 나와 집 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을 세세히 보여주며 시작한다. 집 밖에 나선 존재들의 피곤함,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인물들은 ≪죽은 시간≫을 살고 있고, ≪시간을 죽이려≫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온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꼬셔 여관방을 들락거리며, 길 위에서 택시를 잡는데 세월을 소모할 뿐 도통 도시의 풍경이나 자연의 풍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집 안과 집 밖, 이곳과 저곳, 이 여인의 몸과 저 여인의 몸은 매양 한 가지여서, 이들은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죽은 풍경(여백)을 통해 질서잡힌 공간 밖의 혼돈과 생기를 보여준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죽은 시간의 반복을 통해 풍경의 부재를 보여준다. 부재를 보여주기, 이것은 다시 말해 부재하고 있는 것의 프레임화이다.

2. 들끓는 여백 또는 프레임의 밖

여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아 장커의 화면은 전통 동양 산수화의 화폭을 닮았으면서도 이를 넘어 선다. 우선 그는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고 시점의 중심을 만들어내는 서구 풍경화의 전통(이는 회화뿐 아니라 영화 등 시각 이미지 구성에서 하나의 규범이 된다. )과 확연히 구분되는 화면 구성을 위해 지평선이나 수평선의 설정을 피하는 산수화의 기법을 가져 온다. 이는 ≪스틸 라이프≫ 속 샨사의 묘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영화가 산밍이 탄 배 ≪세계≫호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호에 승선한 인민들의 육체를 흩어가던 수평 트래킹은 배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산밍을 잡아내고, 산밍의 뒤편 열린 공간 사이로 산샤가 내다보인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의미에서 풍경을 대하는 지아 장커의 태도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첫째로 강을 따라 흐르는 배 위에서 산샤의 풍경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풍경은 고정된 자리를 가진 주체의 시선이 관찰해 낸 상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지아 장커의 영화에서 풍경은 단 한 번도 정지된 자가 바라보는 정지된 세계의 풍경이었던 적이 없다. 세계의 풍경은 늘 배, 버스, 트랙터, 모노레일, 오토바이 위에 올라탄 사람들의 시선으로 목격되었고, 이 풍경들은 늘 흐트러져 있다. ≪임소요≫ 도입부의 부산한 거리 풍경-달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들, 길을 걷는 행인들의풍경-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빈빈과 '함께' 시작한다. 원신 원샷의 정적인 화면으로 유명한 그의 영화 ≪플랫폼≫ 역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고자 밤버스를 탄 단원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고, 영화 내내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떠도는 문화 선봉 대원들과 이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요동치는' 풍경을 보여준다. 영화 ≪세계≫에서 여 주인공 타이셍은 세계 공원 내의 모노레일을 타고 공원 내에 축소 전시된 모형들 사이를 지난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거나 모노레일의 속도감 속에서만 비현실적인 공원의 풍경을 지각해 낸다. 벤야민은 사거리에서 돌진하듯 달려오는 차량이 주는 충격 체험을 영화의 지각 체험에 비교한 바 있다. 영화의 태동은 넘쳐나는 시각 이미지-사진, 광고, 포스터 등-들을 빠르게 변화하는 운동 상태 속에서 지각하면서 예지되었다. 다만, 이 때 속도를 체감하며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의 도래를 목격한 인물들이 길을 걷는 산보자였다면, 지아 장커의 영화 속에서는 지각 주체 자신이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있다. 주체는 세계에 대한 투사를 시작할 고정된 자리를 잃어버리고, 세계는 움직이는 주체,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에 흐트러진 풍경을 선사한다.

둘째로, 이 장면은 풍경과 인물의 공존을 보여 준다. 본래 중국 산수화는 조화로운 자연을 나타내는 것을 큰 이념으로 하고, 이 산수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을 드러낼 때는 인간의 감정과 자연 풍광이 하나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려고 애쓴다. 덧붙여 큰 스케일의 산수를 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산수화는 전경의 작은 부분에 인간 혹은 인간사 풍경을 덧붙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크게 보아서는 인간사의 세밀한 풍경을 담아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아 장커는 영화의 제목을 ≪스틸 라이프≫, 곧 정물이라 붙이고, 산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정물처럼 그려낸다. 이는 서로 다른 스케일-원경으로 표현해야 하는 풍경과 근경에서 세밀하게묘사해 내야하는 인간세계-과 이념으로 인해 동시에 주제화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풍경과 인물, 풍경과 정물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표현해내려는 야심 찬 의도의 반영이다. 또한, 지아 장커의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풍경은 산수화에서와 달리 주인공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지아 장커가 풍경과 정물을 나란히 놓으면서도 대조하는 영화적인 수단은 리듬이다. 풍광과 이 풍광 '내'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정(靜)과 동, 짖고 부숨의 대립적인 리듬과 작용으로 그려진다. 기어이 재회한 산밍과 아내가 부서진 건물 실내에 쭈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이들 뒤 부서진 틈으로 바깥 공사장의 풍경이 보인다. 이 때 세계의 풍경은 반듯한 프레임 속에 들어 있지 않고, 곧 무너져 내릴 건물 외벽의 울퉁불퉁하게 벌어진 틈 사이에 들어 있다. 이 흐릿한 틈이 바로 지아 장커의 여백인 셈이다. 이 여백은 때로 화면 전체에 넘쳐 나기도 한다. 앞서 밝혔듯, 서구 풍경화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기준으로 원근법 적인 공간의 중심을 설정한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탄생'한 장르이자 용어인 풍경화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 또는 하늘과 바다를 갈랐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로프≫에 등장하는 지평선 없는 대지의 풍경, 거스 반 산트의 영화 ≪엘레펀트≫에 등장하는 하늘의 풍경은 이런 원근법적인 공간의 규범을 흔드는 이미지들이다. 이들은 화면 전체에 넘쳐나는 여백, 프레임을 넘어서는 무균질의 카오스, 죽은 풍경들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아 장커는 공사장의 돌무더기를 찍어 낸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돌무더기는 ≪플랫폼≫의 성벽, ≪임소요≫의 공터의 평평한 이미지와 공명을 이루어 낸다.

3. 풍경의 소거 또는 텅 빈 프레임

지아 장커가 산수화를 차용하고 극복하며 여백, 반풍경을 통해 풍경에 대한 근대적인 규범을 거스른다면 홍상수는 풍경 자체를 소거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일의 불가능함을 피력한다. 일례로 ≪스틸 라이프≫가 건물 외벽이 만들어 내는 울퉁불퉁한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구획 짓는 네모 반듯한 프레임 자체의 형식에 의문을 표한다면, 홍상수는 프레임을 벗어난 풍경을 보여주기보다, 프레임 자체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사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 속 장면을 비교해보자. 지아 장커는 차 속에 앉아있는 인물을 창을 배경으로 찍어내는 것을 즐긴다. 반면, 홍상수가 즐겨 찍는 샷은 앞좌석과 뒷좌석의 교환 샷이다. 지아 장커에게 창은 세상을 보여주는 열린 틈인데, 홍상수에게 창은 아무런 내용을 담지 않은 프레임이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타고 있어도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의 인물들은 어쩌면 안과 밖의 구분 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공간을 내부와 외부, 둘로 구분하여 나누는 자명한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 이 구분이 (근대 사고의) ≪기하학적 규범≫에 길든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공간을 내부와 외부로 구분하여 사고하는 대신 내부와 외부를 변증법적으로 사고하자고 제안한다. 앞서 필자는 홍상수의 영화는 주인공들이 집 밖을 벗어날 때, 자신의 영토를 벗어날 때에야 시작될 수 있다고 적었다.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대구가 깨어지는 영화라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출발점에서도 '외출'이 아닌 '방문'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문호의 집에 들리기 위해 집 앞까지 찾아온 헌준을 문호는 마당에나 기껏 들일 뿐 부인 핑계를 대며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 헌준과 문호 역시 홍상수 영화의 다른 인물들처럼 우선 '외출'을 해야 한다. 집 밖으로 벗어난 인물들은 탈 일상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리 같은 모습의 행위를 반복한다. 이들은 밖으로 나오지만, 밖에서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하고 다시 (여관이나 술집) 안으로 돌아온다.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답습하는 것이다. 이들이 반복해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영화는 그들이 지나치는 장소의 특정한 좌표를 의도적으로 지우며 풍경을 비워낸다. 좌표가 지워진 자리에서, (장소를 지각하는) 우리는 내부(에 대한 지각)에서 외부(에 대한 지각으)로 곧장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풍경만을 바라보거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더 정확히 표현해 우리는 비어 있는 프레임만을 보게 된다.

비어 있는 프레임을 보여주는 과정은 프레임 속의 내용을 지우거나, 애초에 내용이 지워진 프레임을 보여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된다. 가령 ≪극장전≫에 등장하는 남산 타워의 경우를 보자. 줌인을 통해 타워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당겨져 보이긴 하지만, 이 타워는 원경에 속해 있다. 본래 원경에 속한 사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방향을 알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아무 데서나 보이는≫ 남산 타워는 동수에게나 관객에게 동수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남산 타워는 동수나 극 중 극의 주인공이 남산 근처를 배회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식(repere)이거나 기념비적 풍경이기 보다 아무 데서나 나타나 이곳이나 저곳, 이 장소와 저 장소를 마찬가지의 장소,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무규정적인 공간(quelconque)으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와 같은 기념비적 풍경들, 웨스턴이 영화사에 기재한 풍경의 좌표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강원도의 힘≫의 강원도 동해나 설악산에서조차 우리는 기념비적 풍경을 목격하지 못한다. 웨스턴에 등장하는 기념비적 풍경은 미국민, 미국 영화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기호들이었다. 상권과 그의 후배는 기껏해야 내설악과 외설악을 아우르는 조형물을 통해서야 풍경의 전체성, 허구의 전체성과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남산을 오르고, 여관에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우리는 점점 방향 감각을 잃어간다. 이곳은 집 안인가, 여관 방 속인가, 남산 발치 아래인가, 극장 앞인가, 극장 속인가? ≪극장전≫ 영화 시작부에서 나뭇가지 뒤로 보이던 남산 타워가 뿌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이 풍경이 등장 인물에게 미치는 무기력함을 반영하면서 풍경의 자기 소멸을 암시한다. 남산 타워와 함께 시작하는 ≪극장전≫은 홍상수의 영화 중 단연 프레임 자체를 강조하는 영화다. 영실과 하루밤을 보낸 동수가 2층에 자리한 여관 계단을 걸어 나오는 현관 장면은 마치 동수가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이미 이영수 감독의 회고전이 상영되던 극장 문-또 하나의 프레임-을 열고,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온 바 있다. 영실이 동창회에 오는 장면 역시 영실이 음식점 대문으로 들어오는 샷과 방문으로 들어가는 샷을 끊어 구분하면서 문-프레임에 대한 통과를 강조한다.

내 집, 내 영토가 아닌 곳의 풍경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내 집과 내 집 밖의 구분이 희미해질 때, 내 집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벤야민은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곳은 개인의 우주, 개인의 실내 공간이다. 그는 부르조아들이 자신들의 실내 공간에 개인의 흔적을 새기기 시작했을 때, 이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구성되는 탐정 소설의 장르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유일하게 등장인물들이 새기는 흔적-수정된 원고지, 찢어진 콘돔 사이에 남은 흔적-을 뒤 따라 가며 보여주는 영화였고, 다른 어떤 그의 영화들보다 등장 인물의 거주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반면 이후의 영화들은 술집과 여관, 택시 안을 보여주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오! 수정≫에서 정보석은 이불을 빨아 흔적을 없애려 하고( 수정은 이불을 빨려고 애쓰는 재훈에게 ≪우리 흔적 남기는 게 그렇게 싫어요?≫라고 말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은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지우며,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은 벽의 낙서를 지운다. ≪해변의 여인≫의 김 감독은 아내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지워내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 풍경의 지배권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이다.

≪해변의 여인≫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라는 신도리 바닷가의 수평선은 극 중반에 이를 때까지 화면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김 감독과 그 후배, 문숙 세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며 일자로 서서 ≪저기 등대가 있네≫, ≪황사가 심하네≫같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카메라는 고집스럽게 세 사람의 모습만을 비추고, 서해안 바닷가의 풍경은 장면 밖에 남겨 둔다. 식당에서 다툰 후 바닷가 쪽으로 뛰쳐나온 김 감독과 후배가 지리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팬 기능이나 파노라마 기능이 고장이라도 난 듯이 화면 왼쪽에 있을 바다를 비켜가며 어중간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을 담는다. 김 감독과 하룻밤을 보낸 문숙이 다음 날 아침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김 감독을 벤치에 남겨 두고 바닷가로 내려갔을 때, 바다와 그 바다 위의 등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지루한 욕망의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우리는 풍경을 바라볼 수 없다. 김 감독처럼 말을 잘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해변의 여인≫에서 바닷가 풍경은 인물의 대사 속에만 존재하며 화면에서 배제되거나, 황사로 뒤덮여 아무것도 분간 할 수 없는 뿌연 공간,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래사장의 이미지로 남는다. 지아 장커의 평면적인 화면에선 마치 마띠에르의 예술을 통해 탄생한 듯 흙더미, 돌무더기의 질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평평한 화면은 내용물이 빠져 질감과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풍경이 배제되는 것은 풍경 속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과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며, 무언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수정≫의 두 번째 부분, 재훈과 관계를 맺고 난 수정은 재훈의 품에 안겨 창 밖을 내다본다. 이때 재훈은 이리오라며 수정의 시야를 실내로 돌린다. 애초 제주도에 가고 싶어했던 수정을 재훈은 서울의 한 호텔방으로 데려왔고, 수정은 제주도의 풍경도 서울 호텔 방 밖의 풍경도 바라볼 수 없다.

4. 청각적 풍경화 잡음들 또는 웅얼거림

지아 장커가 화면에 담아 내고자 주력하는 또 다른 풍경은 소음/잡음의 풍경이다. 잡음은 불어로 'parasites'인데, 이 단어는 '기생충 같은 존재, 기식자'라는 본래의 뜻이있다. 그렇다면 다시 기생하는 자, 식객이란 무엇인가. 식객은 본래 부잣집 식탁에 끼어들어 흥을 돋워주고 그 대가로 밥을 얻어먹는 자를 일컬었다. 그래서 잡음이란 본래의 음에 끼어들어 그 음을 흐리는 소리이긴 하지만, 우리는 잡음 제로의 순수 음을 상상할 수 없다. 잡음은 어쩌면 세상의소리가 존재하는 조건이다. 지아 장커는 시종일관 거리의 소리를 영화에 담아왔다. 역의 안내 방송, 길거리 가라오케 가판대의 노래 소리, 당국의 선전 방송 등이 그것이다. 이 소리들은 극의 흐름에 필수적인 정보를 주거나 주인공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대변하거나 하는 기능이 없이, 화면에 끼어든 '잡음'들이었다. 이 '밖'의 소리들은 평평하고 황량한 시각 이미지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해준다. 이차원의 공간은 이 잡음들과 함께 삼차원의 생명감-현실과 환영을 아우르는 기운-을 획득한다. ≪스틸 라이프≫에서 지아장커는 꼬마 아이가 부르는 유행가 소리 이외에도 공사장에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를 잡아냈다. 이 망치 소리의 리듬에 맞춰 시간을 잃어버린 듯한 산샤의 풍경은 역동성을 획득한다. 물론 이 역동성은 멜랑꼴리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는 산샤의 죽은 풍경들이 유독 ≪근원적 세계 unmonde originaire≫의 풍경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 자연주의 영화가 나타내는 세계라고 부른 ≪근원적 세계≫는 규정된 세계, 질서 지워진 세계 내 어디인가에 존재하는 어떤 무정형의 세계를 일컫는다. 이 외따로 떨어진 세계는 질서 지워진 세계의 시작점이면서 종결지점으로 세계를 축조해 내면서, 세계로부터 부서져 내리는 그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2000년을 흘러온 강 물길을 뒤 바꾸어 버리는 공사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돌무더기들, 돌무더기를 쪼는 망치질 소리는 이 근원적 세계의 거친 기운을 전해 낸다. 또한 ≪세계≫ 속 세계테마파크 역시 이런 양면적인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가?

일상의 넘쳐나는 소음에 민감한 지아 장커와 달리 일상을 꼼꼼히 담아낸다는 홍상수는 이런 거리의 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홍상수가 관심을 기울이는 잡음은 거리의 소리, 소음이 아니라 인물들이 뱉어 내는 쓸데없는 말(이들은 대사일까, 아닐까), 말의 억양, 말 사이의 쉼표 같은 것들이다. 홍상수의 극 중 인물들은 때로 대사를 하기보다, 정확한 대사의 전달을 가로막는 쓸데없는 혼잣말이나 웅얼거림의 톤을 조절하는 데 더 큰 신경을 쓴다. 그때문에 우리는 빈번히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혹은 중얼거림)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사를 극의 텍스트라고 한다면, 이들의 웅얼거림은 텍스트의 빈틈이다. 그러나 이 빈틈은 텍스트 밖의 세계를 지칭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5. 사막의 시간과 시간의 사막

우리는 서로 다른 관심과 전략을 통해 규범적인 공간 구성의 규칙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두 감독의 예를 살펴보았다. 이들의 관심과 전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둘 모두 풍경을 경유, 이탈의 길을 걷는다. 지아 장커는 기실 들끓는 에너지를 가진 죽은 풍경들을 통해 변화하는 중국의 시간을 나타낸다. ≪여백의 공포≫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사람들이 비어 있는 땅, 죽어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막 아래의 들끓는 움직임에 관해 길게 적은 바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린 왕자≫의 우화는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인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중국 회화의 전통과 서구 근대 시각 양식의 규범이 강요하는 긴장감 사이에서 새로운 영화 형식을 탐구하는 지아 장커는 이 시대의 운송 수단에 몸을 싣고, 황량한 사막 어디인가의 우물을 찾아나서는 자다. 홍상수의 초기작들은 기름진 평야 앞에서 발견한 말라 비틀어가는 잡초 더미, 경치 좋은 설악산 자락에서 발견한 죽어가는 금붕어를 보여주는 작업들이었다. 주인공들의 죽은 시간은 이 죽은 사물들과 공명을 일으켰고, 세계의 풍경을 지워갔다. 하나하나 지워진 풍경은 프레임으로만 남았다. 바다가 참 예쁘다고 말하는 인물들의 대사는 상대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 대화의 프레임일 뿐, 아무런 알맹이를 갖지 못한다. 프레임으로 가득 찬 세계의 풍경 없음을 보여주는 데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홍상수는 모더니즘 영화의 진정한 적자이다. ≪최고의 휴양지≫ 바닷가에서도 그는 출렁이는 물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해안가의 노랫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아니 그는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을 참이다. 그는 모래 바람과 모래 언덕-시간의 사막만을 생각하는 외롭고 용기있는 모험을 하고 있다.



단평·그 여인의 등 뒤에서 -이창동의 ≪밀양≫에 관하여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남편을 사고로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땅에 살러 왔다. 이 사연 하나만 들어도 우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팔자 사나운 년, 지지리 복도 없는 년. 그녀가 남편의 고향, 밀양 땅을 찾은 건,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세상에 등을 지고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애와 그녀의 아들 준을 태운 차는 밀양으로 진입하는 국도 변에서 고장이 나 서 버린다. 쌩쌩거리며 달리는 차로 변에 그녀가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서 있다. 겨우 세운 트럭을 향해 슬리퍼를 끌며 달려가는 그녀의 애처로운 뒷모습, 고장 난 차 안에서 꼼짝 않고 앉아있는 아들을 향해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녀의 피곤한 뒷모습. 그녀는 밀양 땅에서 우리에게 얼굴에 띤 환한 웃음을 보여줄까. 그러나 좁은 밀양 땅에 도착하자마자 이웃에게 훈계를 둔 탓에 신애는 금세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자신에 대한 이웃의 '뒷담화'를 듣고 있는 신애의 거울 속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녀는 얼굴에서 진짜 표정을 지우고 갑각류의 딱딱한 등짝 같은 가면, 웃음 띤 얼굴의 가면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창동의 영화 ‘밀양’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자신에게 닥친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 영화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납치와 죽음을 겪고, 신의 교회가 주는 은총과 인간의 신앙심이 주는 배신감을 겪은 여인의 얼굴이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등으로 들려주는 영화. 그런데 이 모든 세상의 고통은 타인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문구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진정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타인에게 우리의 진짜 표정을 감출 수 있다면, 타인은 지옥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자는 등을 내 보인다. 또는 딱딱하고 표정 없는 등짝 같은 얼굴의 가면을 내 보인다. 그렇지만 타인의 지옥, 내 마음 속 타인의 지옥은 끔찍한 것이어서 신애는 고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대면하지 못한다). 경찰서에서 범인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했듯이. 그래서 우리는 등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아들의 납치 사실을 안 신애가 종찬의 카 센터로 꺼이꺼이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뛰어갈 때 우리는 얼굴보다 더 큰 격정을 표현하는 신애의 등을 바라본다. 한참을 뛰어가는 신애의 뒷모습, 길거리에 주저앉은 신애의 웅크린 등짝은 신애의 또 다른 얼굴,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는 얼굴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영화‘일식’의 첫 장면을 무기력과 권태에 빠져 소통을 거부하는 모니카 비티의 뒷모습으로 채웠을 때, 모니카 비티의 뒷모습도 그렇게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영화들이 등처럼 딱딱한 가면을 쓴 사람들의 얼굴만을 비추거나, 등진 자세가 표현할 수 있는 정념들, 정념의 이미지를 화면 안에서 감춘다. 이창동은 한 여인의 등을 통해 그녀가 외면했던 것, 그녀가 절박하게 표현했던 것,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 한다.우리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신애의 뒷모습을 같은 구도로 두 번 목격한다. 교회에 나가 마음의 평화를 얻은 신애가 싱크대 앞에서 떠오르는 아들 생각에 괴로워하며 서 있다. 그 뒷모습은 신애가 이웃에게 지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 뒤 감추고 있는 불안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범인을 만나고 난 후 정신을 놓은 신애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일련의 복수 행각을 벌인 후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도 싱크대 앞에 그렇게 서 있다. 하늘을 향해 “봐, 보란 말이야”라고 외치던 그녀 얼굴의 독기보다, 싱크대 앞에서 선 신애의 뒷모습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 뒷모습을 당신은, 우리는, 신은 과연 지켜보았던가. 영화의 마지막, 신애는 카메라에 등을 지고 집 마당에 앉아 머리를 자르고,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 사이로 신애의 얼굴이 비쳐 보인다. 우리는 그녀의 등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우리를 바라본다. 내 앞의 타인이 들어주는 거울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등 뒤를 바라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에게 얼굴과 등, 두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 뮤지컬학부 교수) 
올해는 예년에 비해 평론 응모작 수가 부쩍 줄어 20여 편에 불과했다. 이는 한국영화의 전반적 침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상당수가 이창동의 ‘밀양’을 평론 대상으로 삼았다. 기존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내가 다른 시각으로 읽어내겠다’는 창의력으로 꿈틀대는 글이 그리웠다.
최종 검토대상에 오른 글은 세 편이었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에 대한 논문과 ‘별빛 속으로’에 대한 단평을 쓴 이수정은 단정한 문체와 차분한 논리전개가 돋보였지만 다소 교과서적인 시각이었다. ‘밀양’에 대한 논문과 ‘우아한 세계’에 대한 단평을 쓴 최남현도 논리전개가 튼튼했지만 보편적인 인문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지아장커와 홍상수에 대한 논문과 ‘밀양’에 대한 단평을 쓴 이나라가 가장 돋보였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에 연출된 풍경의 여백과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체계적으로 의도된 풍경의 부재에 관해 예민한 시각적 감식안으로 파고들었다. 창작자의 관념이 시각적으로 육화되는 방식에 주목한 점에서 이나라의 글을 넘어서는 것이 없었다. 다만 단평감각은 아직 미숙해 당선작으로 내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이는 모든 응모자들에게 해당되는데 간결하게 원고지 10장 분량의 글로 독자를 설득시키려는 열정과 준비가 모자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10장 분량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70장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준비와 요령이 필요하다.
 


이 나 라
△1973년 서울 출생
△1998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2002년 서울대 미학과 석사
△2005년 프랑스 뚤루즈 2대학 영화과 DEA
△2007년 프랑스 파리 1대학 영상미학 박사과정 재학 중 

나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살아본 적이 없다. 주변에는 나를 극장에 데려가 줄 어른들이 없었고, 그나마 TV의 옛날 영화들을 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말의 명화보다 소소한 한국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영화광들에 둘러싸여 소위 어려운 영화들을 보며 영화를 처음 배웠다. 영화 속에서 세상을 배우기보다, 세상 속에서 영화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더랬다. 그래서 영화는 늘 내게 세상보다는 둘째 가는 것이었고, 오락이기엔 너무 어렵고 진지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기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통에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 고백은 더디고 수줍기만 했다.

몇 년째 거주하고 있는 파리 골목 골목의 낡은 극장들을 들락거리며 낡은 할리우드 영화나 모르는 세계 저편에서 온 영화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작가들의 영화들을 만난다. 이 끊임없는 만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이제 더 당당하게 영화에 대한 사랑, 영화가 내게 사유하도록 한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극장 출입이 몇 번 없으셨지만, 영화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주시고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먼 곳에서 다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글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 배움의 어려움과 가치를 일깨워주신 학교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 파리의 거의 모든 골목과 극장들을 하나하나 알게 해 준 티에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08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2008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8개 부문에서 한국 문학과 문화계를 이끌어갈 신예들이 탄생했습니다. 당선자 여러분께 뜨거운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당선의 기쁨을 왕성한 활동으로 승화시켜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전통을 이어갈 것을 기대합니다. 당선작들은 오늘자 D섹션과 조선닷컴(www.chosun.com)에 싣습니다.
 
◇2008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와 당선작

▶시: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단편소설: 양진채 ‘나스카 라인’ ▶시조: 김남규 ‘염전에서’ ▶동시: 김영민 ‘봄길’ ▶동화: 장보영 ‘깜나리’ ▶희곡: 정민아 ‘꽃밥’ ▶문학평론: 강지희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 되기-한강론’ ▶미술평론: 정현아 ‘불행한 추상 그리하여 행복한 추상-양수아론’

◇심사위원

▶시: 문정희 황지우(본심)/박상순 정끝별 이광호(예심) ▶단편소설: 서영은 윤후명(본심)/구효서 우찬제 김미현 천운영(예심) ▶시조: 이근배 ▶동시: 박두순 ▶동화: 이금이 ▶희곡: 임영웅 이강백 ▶문학평론: 이남호 박혜경 ▶미술평론: 오광수


[2008 신춘문예] 시 당선작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 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2008 신춘문예] 나스카 라인
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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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상자는 가로 52센티미터, 세로48센티미터, 높이40센티미터의 6호 택배상자 두 개를 위아래로 이어 붙인 것이다. 조금 비좁은 듯하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천천히 숨을 고른다. 상자의 열려 있는 윗부분을 안에서 누런 비닐테이프로 봉한다. 우체국 안을 희미하게 비춰주던 가로등 불빛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상자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미열이 있긴 하지만 견딜 만하다. 눈을 감는다. 상자 안에 붙인 그림처럼 나도 무생물이 된 느낌이다. 상자 위에는 EMS국제특급우편용지가 붙어 있다.

비닐봉투를 잔뜩 든 사내가 들어온다. 불룩한 비닐봉투가 사내의 양 손에서 부채꼴 모양을 만든다. 갈색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단단한 근육에서 태양의 냄새를 맡는다. 숯불에 구운 감자를 쪼갰을 때 나는 냄새이거나, 불에 오래 달구어진 차돌에서 나는 싸한 냄새 같은. 사내는 대형 소포상자를 두 개 사서 비닐 봉투 안에 든 물건들을 꺼내 상자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옷이다. 레이스가 달린 아동복부터 원피스로 된 부인복, 남성복까지 골고루다. 옷 위에 마지막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올려놓고 박스테이프를 두른다. 공단지역이 멀지 않은 이 우체국에는 자국으로 택배를 보내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볼펜을 쥔 사내의 손톱 밑이 까맣다. 사내가 내민 국제소포 우편물 주소기표지 신청서에 수취인 주소를 적어 넣는다. 우즈베키스탄의 한 도시. 나는 도착 국가명 약호에 UZ 라고 쓴다. 컴퓨터의 국제우편 발송조건표 비고란에 ‘서신불가’라는 글자가 뜬다. 나는 사내가 옷가지 위에 테이프를 올려놓던 것을 기억한다. 사내는 편지 대신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넣었을 것이다.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사내는 이국의 어두운 밤에 카세트 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떨리는 목소리로 가족의 이름을 부르거나, 밤새워 쓴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간 사 한 니 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사내의 검은 얼굴에서 미끄러진다.

조금 전에 넘긴 탁상달력에는 페루의 마추픽추 전경이 새로운 달 안에 있다. 달력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숲의 어디쯤을 가로질러 달리는 인디오 아이가 사진 속에서 숨을 헐떡이는 것 같다. 나는 그 아이를 안다. 아이의 이름은 굿바이 보이. 몇 년간 부은 적금으로 그와 내가 유일하게 호사를 부려 다녀온 여행에서 만난 소년이었다. 마추픽추를 떠나는 버스가 구비 돌 때마다 만나던 아이는 결국 버스보다 먼저 도착해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나와 그도 세상에, 하고 외쳤던 것 같다. 아이는 버스가 출발하려 할 때 깡충깡충 뛰며 관광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대던 바로 그 아이였다. 버스보다 더 빨리 숲을 헤치고 마추픽추를 내려오던 아이. 아이는 여행자들로부터 박수와 돈을 받았다. 나는 아이의 여린 발목을 보면서 신발 밑창보다 더 단단해졌을 발바닥을 떠올렸다. 아이는 잉카제국의 통신을 담당한 파발꾼 챠스키의 후예였다. 고립된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던 챠스키. 어쩌면 이제 우체국은 이제 굿바이 보이다. 무선통신에 의해 쇠락한 파발꾼이다. 나는 이틀 전에 푼 로직퍼즐의 그림이 나스카의 어떤 문양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추픽추, 나스카, 페루,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 그림=황주리
나는 밤마다 로직퍼즐을 푼다. 로직퍼즐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나 마찬가지이다. 로직퍼즐은 모눈종이에 숨겨져 있는 그림을 제시된 숫자를 칠해가며 숫자들의 조합을 보고 알아내는 퍼즐이다. 나는 연필을 들고 윗줄과 왼쪽에 제시된 숫자만큼 모눈종이에 검게 칠해나간다. 세로 행에 쓰여 있는 숫자 배열과 가로에 쓰여 있는 숫자배열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무작정 한쪽의 숫자대로 칠하면 다시 지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로직 실력이 뛰어난 편이다. 쉬운 로직은 가로세로 각각 열 칸짜리지만 나는 주로 가로세로 칠십 칸씩인 로직퍼즐을 공략한다. 사백구십 칸의 퍼즐을 맞추다 보면 서너 시간은 쉽게 흘러갔다. 작은 칸을 전부 메우면 어느 순간 떠오르는 전체 그림. 풀기 위해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로직퍼즐이 나는 편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내 ‘말’도 할머니 묘에 같이 묻혔다…

난 늘 운동장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어제도 로직퍼즐을 풀었다. 사백구십 칸의 모눈종이에 숨어 있는 그림을 풀려면, 먼저 큰 수부터 찾아 모눈종이에 연필로 칠해야 한다. 가로와 세로의 숫자들이 칸마다 맞아 떨어져야 숨어 있는 그림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집중해서 칸을 찾아나가야 한다. 똑같은 7이라는 숫자는 일곱 칸을 차지하지만 제각각 위치가 다르다. 나는 로직을 푸는 중간에 가끔씩 고개를 젖혀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주기도 하고, 손을 비벼 열이 나는 두 손을 눈두덩에 대고 가볍게 눌러주기도 한다. 눈의 피로가 풀리는 듯 눈자위가 따뜻해지고 새벽쯤이 되면 웬만한 로직은 다 풀 수 있었다. 숨어 있는 그림은 원숭이였다. 사백구십 칸 속에 들어있는 검은 원숭이는 백이나, 이백 칸짜리 로직에 비해 훨씬 정교했다. 긴 꼬리를 치켜 올리고 있는 원숭이는 무리를 이끄는 대장 원숭이 같았다. 나는 종합장을 펼쳐 그 원숭이를 옮겨 그렸다. 종합장은 언제나처럼 가방에 넣었다. 나는 종합장 크기보다 작은 가방을 산 적이 없었다. 그림은 어떤 위안보다 따뜻했다.

밤사이 갑작스럽게 영하로 내려간 기온 탓에 방안은 썰렁한 냉기가 돌았다. 이불을 돌돌 말고 눈을 감았다. 코끝에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 기운이 느껴졌다. 보일러 통에 석유를 채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척일 때마다 낡은 침대의 스프링이 찌꺽였다. 적막 속에서 스프링의 탄성이 녹슬어갔다. 이불깃으로 얼굴을 여미듯 덮었다.

“그 펜던트 특이하네, 무슨 문양 같다?”

뭐든 색다른 것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미스 신이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묻는다.

“벌새.”

“벌새? 어디서 들어 본, 아! 옛날 과학 시간에 배운 기억난다. 일 초에 수십 번 날갯짓을 한다는 그 새, 맞지? 그 새가 이렇게 생겼구나, 처음 보네.”

미스 신은 내 목걸이 줄에 걸린 펜던트를 신기한 듯 들여다본다. 내가 아는 벌새는 날갯짓과 상관없다. 내가 아는 벌새는 페루의 나스카 대평원에 그려져 있던 무늬였다. 로직퍼즐을 풀다 보면 7이라는 숫자라도 제각각 위치가 달라 무조건 일곱 칸을 채우면 제대로 풀지 못해 결국 지워야 한다. 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갈피에 숨은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이해했다고 말하지만 실상 이해 못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끔 옹알이할 때가 제일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둥근 몽돌 같은 그 옹알거림을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들었을 테니까. 말 대신, 옹알거림으로, 눈빛으로 얘기할 순 없는 건가?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 나는 말이 어긋날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님에게서 소포를 받아들고 도착지를 확인한다. 뉴질랜드로 보내지는 소포다. 나는 슬쩍 소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내용물과 상관없이 캐나다나 뉴질랜드 쪽으로 가는 소포에서는 나무냄새가 난다. 소포에 대고 냄새를 맡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국제우편 요금 및 발송 조건표에 눈을 주고 검지손가락으로 나라명을 훑어 뉴질랜드를 찾는다.

“저기…”

퍼뜩 고개를 든다. 키가 껑충 큰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다.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

“주소를 정확하게 썼나요?”

“편지 안에… 그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볼 방법이 없나요?”

“없어요, 혹시 모르니까 연락처를 적어놓고 가세요.”

남자는 실망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우물거린다. 나는 남자를 무시하고 다른 손님의 우편물을 받아든다. 남자가 주춤 옆으로 물러선다.

분실물로 들어온 두 대의 휴대전화를 본다. 하나의 휴대전화에는 긴 생머리의 여자와 남자가 다정하게 얼굴을 맞댄 스티커사진이 붙어 있다. 한 대는 최신형 휴대전화이다. 휴대전화의 플립을 열어본다. 창이 뜨지 않는다. 배터리가 다 된 휴대전화는 먹통이다. 번호를 꾹꾹 눌러본다. 02…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일 분실 휴대전화 송부서를 작성한다. 이 휴대전화들은 모두 휴대전화 찾기 콜센터로 보내질 것이다.


▲ 그림=황주리
우체국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몇 사람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지 계속해서 휴대전화 버튼을 눌러대고 몇은 통화를 하고 있다. 그 잠깐 사이에도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어디를 가도 전화를 걸고 받고 통화하는 사람들이다. 휴대전화를 통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붙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향해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불안한 모양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교신하기 위해 스스로 중독됐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타전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 문득 네로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숫자대로 로직판을 검게 칠할 동안 네로는 침대 위로 올라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나는 로직퍼즐을 펼쳐 놓고 네로의 목덜미부터 온몸을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이건 원숭이야. 어때, 굉장하지? 넌 내 말을 다 알아들을 거야그치? 아웅. 기분이 좋아진 네로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어느 날 네로가 현관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꼬리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가만히 신발 등에 앞발을 올려놓았다. 검은 색과 흰 색이 섞인 새끼고양이로 눈동자가 크고 맑았다. 현관문을 열자 네로는 나를 따라, 제 집에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네로가 캔의 참치를 먹기 시작하자, 나는 네로의 엄마라도 된 기분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새끼고양이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고양이 이름은 네로 밖에 없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면 네로는 하루 종일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내 바지를 슬쩍 잡았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듯해 네로를 새삼스레 바라보곤 했다. 한동안 네로는 부쩍 발에 몸을 비벼대고 달라붙었다. 등뼈를 둥글게 하고 꼬리를 바깥쪽으로 감거나 아기 우는 소리를 내기도 했고, 식욕도 왕성해서 무엇이든 먹으려 했다. 아웅. 네로가 느리게 창턱에 올라앉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멋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네로와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우표 열 장만 주시오”

일주일에 편지를 두 통씩 붙이는 할아버지이다. 우체국 안 누구도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직원들은 다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밖의 우체통을 두고 꼭 안으로 들어와 바구니 안에 편지를 담는다. 우체국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잠깐 동안,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지팡이가 무색할 만큼 가벼워 보인다. 환한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얹혀 있다. 편지를 놓는 손길이나, 우표를 받아드는 손의 떨림이 할아버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니까. 봐, 얼굴에서 광채가 나잖아.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 없지? 언젠가 점심을 같이 먹고 나오던 동료가 말했다. 걷는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렇게 바쁜 걸음을 걷지 않지.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일부러 천천히 걸으려고 애썼다. 그 직원이 다시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천천히 걸어도 가볍지. 발이 땅에 닿는지도 모르거든.

열 장의 우표를 건네주며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본다. 고맙소. 소중하게 우표를 받아드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사람처럼 맑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우편물과 소포를 취급하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소포나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우표를 지갑 사이에 구겨지지 않게 넣고는 지팡이를 고쳐 쥔다.

지팡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어릴 적 내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 손에는 언제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하고만 살아 온 나는 할머니처럼 얘기하고 행동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로봇 태권브이나, 요술공주 세리 같은 만화영화 얘기에도 끼지 못했고, 아이들만의 은어를 쓸 줄도 몰랐다. 자연스레 아이들의 놀이에서 밀려났다. 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내가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망구망구 할망구, 하고 놀렸다. 아이들이 놀릴 때면 할머니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할머니가 지팡이로 땅을 땅땅 두드리면 아이들이 후다닥 도망을 갔다. 지팡이가 있으면 왠지 내 마음도 안심이 되었다.

할머니는 가는귀가 먹었다. 할머니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하던 나는 점점 귀찮아졌다. 할머니와 얘기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할머니와 나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알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나마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 묘비 옆에 지팡이를 꽂아두듯, 내 말도 할머니 묘에 같이 묻혔다. 나는 늘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어느 날은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긴 뱀을 그리기도 하고,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삶기도 하고, 목을 길게 뽑고 있는 꽃을 그리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그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얘기도 나누었다. 저녁노을이 붉은 색을 덧칠해 검게 변할 때까지. 고아원 원장의 냉대도, 툭하면 건물 뒤로 끌고 가 나를 무릎 꿇려놓고 패는 언니나 오빠들도, 차가운 방바닥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다 잊을 수 있었다. 커서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림의 형태나 종류도 세밀하고 다양해졌다.

자꾸 하품이 나왔다. 지독한 몸살감기 때문에 출근 전 약국에서 산 해열제와 편도선 약과 코감기 약까지 복용한 탓이다. 하루 종일 몽롱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소포 상자를 받아들고, 우표를 뜯으며 스탬프를 눌러댄다.

어제저녁 퇴근해서 지하방 문을 열었을 때 네로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내 발등을 핥았다. 나는 오다가 일부러 정육점에 들러 네로가 좋아하는 신선하고 연한 쇠고기를 샀다. 요즘 부쩍 식욕이 좋아져 무엇이든 먹고 싶어하는 네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문 앞에 내려놓고 네로를 번쩍 안자, 네로가 게으르게 내 목덜미를 핥으려 했다. 평화로웠다. 하지만 어두운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고 네로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질겁하고 네로를 내동댕이쳤다. 네로는 자지러지듯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순간적으로 손등을 할퀴고 열린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다. 네로의 입 주변에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네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했다. 달아나는 네로의 배가 불룩하게 늘어져 있었다. 가지마! 창턱에 올라선 네로가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네로의 날카로운 눈빛과 부딪쳐야 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창문 앞에 가서 네로를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 스웨터의 앞가슴에 묻은 흙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네로가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화장실의 좁은 창문으로 보이는 밖이 네로를 불러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네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네로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손등에 맺히는 핏방울에 혀를 대보았다. 따뜻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머리를 감고 싶었기 때문이다. 샴푸의 거품으로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이 나오던 샤워꼭지에서 갑자기 찬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대충 머리를 감고 수건을 터번처럼 두르고 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건 밖으로 나온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 그림=황주리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점을 이루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방울과 물방울을 연결해나갔다. 일부러 머리를 흔들어 물방울들을 바닥에 뿌리기도 했다. 격자무늬 장판 모양 위에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폈다. 기하학적인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새. 하지만 새는 금세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건조한 방바닥의 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그린 그림이 완전히 말랐을 때 나는 보고 말았다. 은행나무 옆의 벤치에 앉아 울던 나를. 도대체 너를 모르겠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공원 벤치에 어둠이 내려앉도록 앉아 있었다. 도대체 모르겠다니. 다 보여주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유일하게 나를 이해한다고 믿었던 그가 떠나려 할 때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내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볼펜을 꺼내 벤치를 긁어대고 있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러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 가슴은 넓고 단단했다. 나는 등 뒤로 안긴 채 울음을 삼켰다. 고개를 돌리려 할 때 그의 손이 스웨터를 우악스럽게 끌어올리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전에 입술이 뭉개졌다. 들큰한 술 냄새가 확 끼쳐왔다. 놀라 뜬 눈 속에 낯선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때까지 힘주어 잡고 있던 볼펜으로 사내의 손등을 내리찍고는 도망쳤다. 뒤따라오던 낙엽 부서지는 소리.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까무러치듯 쓰러졌다. 공원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었다. 그 일이 마음속에서 무심히 비껴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억이란 단단한 세월 속에서 느닷없이 톡, 하고 씨앗이 사방으로 터져버리는 봉숭아 씨방 같은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보일러의 실내온도조절기의 확인램프를 보았다. 붉은 램프가 깜박였다. 단지 석유가 떨어졌음을 알리는 빨간등의 신호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결국 가슴을 훑었다. 빨간등의 점멸이 우주 한끝에서 내게 보내는 모스부호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불빛은 점점 크고 깊게 보였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옹알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모스 부호를 해독이라도 한 듯 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지갑을 들고 공중전화를 찾아 나섰다.

그는 내게 근사한 저녁식사를 사주고 싶어했다.

빌딩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에서 적당한 음식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일식집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만개한 벚꽃이 그려진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그런 곳이었다. 벚꽃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등까지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두툼하게 썰린 회를 앞에 두고 조금 쓸쓸해졌다. 그가 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놓았다. 많이 먹어.

살이 오른 그의 얼굴은 기름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 미묘한 차이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한 끼에 팔만 원씩이나 하는 식사를 앞에 두고 있는 만큼의 거리가 느껴졌다. 한 번도 그런 음식을 먹어본 적 없는 나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젓가락을 들었다 놓곤 했다.

“페루의 나스카 라인, 기억나니?”

매실차를 마시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 쿠스코의 태양제도 생각난다. 잉카제국의 태양제를 재현한다던 의식이었던가? 장관이었지. 라마인가 하는 동물 배를 갈라 꺼내 들던 그 시뻘겋고 뜨거운 심장은 우우, 대단했어.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그 심장의 펄떡대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니까.”

나는 더욱 쓸쓸해졌다. 같이 여행을 했지만 나는 나스카의 거대한 그림들을 먼저 추억하고 그는 쿠스코에서 보았던 태양제를 기억했다.

쿠스코에서부터 지루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을 달려 나스카에 도착한 뒤, 프로펠러가 달린 경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가 높이 떠올랐을 때에야 전체가 보인다던 거대한 그림들. 나는 긴장과 떨림으로 신음을 삼켰다. 아침에 식당에서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는 음식점 주인의 아기를 보았을 때 나는 그 그림을 보게 되리란 확신을 했다. 이 먼나라에서 우리 민족과 같은 몽골계통인에게만 있다는 몽고반점을 보았을 때, 나는 가볍게 흥분했다. 그림을 직접 보면 분명 무언가를 알게 될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낡을 대로 낡았고, 삐걱거리며 심하게 흔들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왼쪽 라인을 돌고 다시 접듯이 반대쪽으로 돌며 그림을 보여줬지만 비행기가 당장이라도 추락할 것 같아 안전벨트를 움켜잡아야 했다. 아찔했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벌새, 콘도르, 거미, 나무. 그 그림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모은 적금을 타고 여행을 준비할 때의 설레던 마음이 사라졌다.

세계의 미스터리를 소개하는 책에서 나스카 문양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그림들은 내가 혼자일 때마다 그려왔던 그림과 많이 닮아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다. 그 그림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혼자라고 생각할 때에도 누군가는 나에게 교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끔 농담처럼 말했다. 너 혹시, 외계인 아니니? 너는 외계인인데 네 기억이 지워져서 네가 외계인인 줄 모르는 그런 거 말이야. 나는 나스카 문양을 보면서 그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작 나스카에서 내가 본 것은 거대하지만 희미한 그림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나스카 라인의 은으로 된 펜던트를 선물했다. 펜던트에는 벌새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말했다. 꼭 다시 오자고. 하지만 그는 나스카 라인을 다시 보여주겠다던 약속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음 달이면 삼 년 만기 정기적금을 타게 된다. 나는 다시 페루로 여행을 갈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또다시 나스카 라인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나는 아예 입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행을 주저하게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그가 슬쩍 손을 잡았다. 축축하게 땀이 밴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성급하게 나를 끌어안고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벨트를 풀었다. 내 몸을 더듬는 그 손길은 그대로였다. 도대체 너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하던 그 이전의 그. 그러나 벽면의 대형 거울을 통해 담배를 피우는 있는 그의, 완강해 보이는 등은 내가 알고 있는 등이 아니었다. 등의 땀이 식고 담배를 연달아 피워대던 그가 옷을 꿰입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번호 불러줘.”

“…없어.”

“왜, 싫어?”

“아니, 정말 핸드폰 없어.”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휴대전화가 없었으므로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휴대전화가 없는 나는 이 세계에서 다시 외계인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쓰는 이모티콘, 은어, 기호들을 전혀 몰랐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의미가 되고 말이 되는지도.

긴장이 풀렸는지 지하철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어쩌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는 동안 지하철은 달렸다. 그를 만나는 내내 긴장했는지 어깨가 뻑뻑하게 굳어 아팠다.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설핏 잠이 깼을 때는 내릴 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고, 그때마다 나는 순환선 밖으로 밀려나 까무러치듯 잠 속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잠에서 깨어 집에 도착한 시각은 한 시가 넘어 있었다. 어두운 거실에는 여전히 보일러의 실내온도 조절기 확인램프가 깜박였다. 네로. 어둠 속에서 네로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 몇 번 네로를 불러보다 찾기를 포기했다. 피곤해서 씻지도 못하고 그냥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낡은 침대 스프링이 출렁였다.

배가 축축해왔다. 잠결에 배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칠한 감촉과 끈적이는 무언가가 스웨터 속으로 스미고 있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배 밑에 죽은 쥐가 내장을 드러낸 채 헤쳐져 있었다. 쥐의 검은 눈동자가 까맣게 빛을 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웨터에도 쥐의 내장이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었다. 차마 손을 보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돗물을 틀기도 전에 구토가 밀려왔다. 변기를 붙들고 저녁에 먹은 부드러운 생선살을 와락와락 토해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까지 씻지 못한 손에 샤워기를 갖다 대고 스웨터를 벗었다. 몇 번씩 비누칠을 해가며 온몸을 닦고 나왔을 때, 오소소 한기가 몰려왔다. 샤워를 할 때는 물이 차다는 사실조차도 미처 몰랐다. 옷을 가지러 방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덜덜 이를 부딪치며 건조대에 널려있는 미처 마르지 않은 옷을 걷어 입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이기로 머리와 몸을 대충 말렸다. 거실 겸 부엌으로 된 좁은 공간에 무릎을 세우고 팔짱을 끼고 쭈그려 앉았다. 몸이 떨려 누울 수가 없었다. 헤어 드라이어의 온풍으로 머리와 몸을 데웠다. 잠깐은 괜찮았지만 추위를 몰리게는 어림도 없었다. 둥그렇게 몸을 말고 냉장고 옆에 기댔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등으로 전해져 오는 것에 위안을 느꼈다. 모터 소리가 끊기면 다시 그 소리가 울릴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중간중간 드라이기를 켰다.

싱크대 밑에 있는 페스트푸드 점에서 주는 감자튀김용 일회용 케첩소스가 눈에 들어왔다. 케첩은 비닐이 뜯겨진 채 피처럼 짓이겨져 눌러 붙어 있었다. 네로의 입에 묻어 있던 검붉은 피가 떠올랐다.

행복을 파는 우체국?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오면 왼쪽 벽 액자에는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행복을 파는 우체국이라고 쓴 글귀는 시 제목 위에 있다. 아이 엄마는 번호표를 뽑고 금융 업무를 보는 코너에서 공과금을 낸다. 아이는 소파 위에 올라서서 띄엄띄엄 시를 읽는다. 오늘도, 나는, 에머, 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주연아, 뭐하니? 공과금을 낸 엄마가 아이 손을 잡아 끈다. 빨리 와! 엄마, 우체국에서 행복을 판데. 어떻게 행복을 팔아? 아이 엄마는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유리문을 연다. 그건 말이야,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유리문에 잘려나간다. 아이가 서 있던 자리에 어느새 보험설계사가 앉아 있다. 그녀는 편지를 수십 통 쌓아놓고 수첩에 적힌 주소를 편지봉투에 옮겨 적고 있다. 우편물 중에는 행복이나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보다는 카드회사나 공과금고지서 같은 공공성을 띤 우편물이 훨씬 많다.


내 그림 담은 소포 안에서 난 잠이 들고

소포는 페루의 나스카로 배달된다

그림이 상자 밖으로 나오자 난 눈물이…

집배원 아저씨가 몇 통의 우편물을 꺼내 놓는다. 우편물을 확인하는 동안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오십 원을 꺼내 준다.

“이 편지 좀 다시 붙여줘.”

아저씨가 내민 반송된 편지에는 이백 원짜리 우표가 붙어 있다. 이십오 그램 이상 나가는 편지는 이백오십 원짜리 우표를 붙여야 한다. 받는 사람은 포천 군부대의 김정석 이병이다.

“아들 군대에 보내 놓고 얼마나 구구절절이 썼겠어. 목 빠져라 답장을 기다릴 텐데 집으로 반송하지 말고 오십 원 보태서 다시 보내 줘.”

아저씨가 슬쩍 웃는다. 나는 오십 원짜리 우표를 이백 원짜리 우표 옆에 붙인다.

“저기…”

오전에 왔던 그 키 큰 남자이다.

“누가 그러는데 마감 시간에 오면 되돌아온 편지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이름이 뭔데요?”

집배원 아저씨가 남자에게 묻는다.

“가만 있어보자.”

아저씨는 주소가 부정확해 되돌아온 편지들을 살핀다.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남자의 어깨가 쳐져 돌아선다. 문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다시 돌아온다.

“저, 며칠만 여기 나와서 편지를 확인해 봐도 될까요?”

“이름을 적어놓고 가시면 연락 드린다니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이 차 편별 마감을 한다. 국제소포와 자국 편으로 보내질 것, 집중국으로 보내질 우편물을 분류해 커다란 자루에 넣고 송달증을 첨부한다. 집배원이 놓고 간 반송된 편지 가운데 주소가 불확실한 편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수취인 불명이거나, 주소가 부정확한 편지들이 하루에도 몇 통씩 되돌아온다. 보낸 사람의 주소가 없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다.

“슬슬 퇴근 준비 하라구.”

국장이 기지개를 켜며 코트를 집어 든다.

오늘 나간 사백 오십 장의 우표와 입금액을 확인한다. 일반우표 말고도 별납 처리된 편지만도 이천여 통이 된다. 몽롱한 약 기운 탓에 여러 번 다시 계산해야 했다. 나는 팔린 만큼의 우표를 주문하고 입금액을 맞춘 다음 자리를 정리한다. 내 눈길이 어둠이 내려앉는 우체국 안에 잠시 머문다. 국장 자리에 있는 CCTV가 희미하게 몰려드는 어둠 속으로 푸른빛을 흘린다. 여섯 군데 설치된 카메라는 어둠을 응시하며 저 혼자 밤새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약을 털어 넣는다. 국장이 퇴근하고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간다. 스팀이 들어오는 탈의실은 따뜻하다. 나는 냉기로 가득 찬 방을 떠올린다. 스팀에 등을 대고 두 손을 등 뒤로 넣는다. 할머니의 온기처럼 따뜻하다. 아니, 엄마의 자궁 속처럼 평화롭다. 쭈그려 앉자,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다 나갔지? 또각또각 구두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다. 철컥. 멀리서 쇠가 결합하는 소리가 들린다.

약에 취해 탈의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깨었다. 탈의실 문을 열자 가로등 불빛이 버티컬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실내는 CCTV만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낮 동안의 분주함이 사라지고 청록으로 빛나는 밤의 우체국은 낯설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다. 문을 밀어본다. 꿈쩍도 안 한다. 나는 불을 켤까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둔다. 국장의 자리로 다가가, CCTV모니터를 본다. 여섯 개로 분할된 화면 중에 위쪽 가운데가 내 자리였다. 나는 낮 동안 앉았던 자리로 돌아간다. 모니터의 여섯 칸 중 한 칸에 유령처럼 서 있는 내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서랍에서 EMS국제특급우편용지를 꺼낸다. 펜을 들고 꼭꼭 눌러가며 보내는 사람의 칸을 채우다가, 받는 사람의 주소지를 써야 할 때 나는 잠시 망설인다. 뉴질랜드나, 캐나다 어디든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쓴 나라는 페루이다. Nazca, Peru. 볼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마음이 설렌다.

마음이 들 뜬 나는 6호 택배상자 두 개를 위아래로 튼 다음 박스 포장용 누런 테이프로 여러 번 단단하게 두른다. 그리고 상자 윗면에는 EMS국제특급우편용지를 붙인다. 손이 가볍게 떨린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우편물과 소포를 취급하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소포나 편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새삼 쓸쓸해진다. 가방 안에서 종합장을 꺼낸다. 그동안 그려왔던 그림들을 꺼내 뒷면에 풀칠을 하고, 상자 안쪽에 붙인다. 작은 방 안을 그림으로 도배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상자 밑면이 벌어지지 않도록 테이프를 여러 겹 겹친다.

나는 소포 안에서 잠이 들고, 소포는 페루의 나스카로 배달된다. 어려서부터 홀로 그려왔던 그림들과 똑같은 그림이 나스카 대평원에 펼쳐져 있다. 내가 그려왔던 그림들이 상자 안에서 나온다. 나스카인들이 천 년 동안 그린 지상 최대의 그림들 위에서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들은 끝을 알 수 없는 크기로 늘어난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천오백 년 이전의 그림들과 포개져 합일을 이룬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옹알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가슴 벅차게 한반도의 작은 땅덩이에서 페루의 소도시까지 시공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중이다.

〈끝〉


심사평… 잔잔한 일상에 차근차근 ‘삶의 무늬’ 짜 넣어  

본심에 넘어온 작품은 모두 8편이었다. 새로운 감각의 작품이 많아서 시대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좋은 작품이란 서사와 미학이 튼실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서사에서는 삶이 묻어나야 하며, 미학에서는 감각이 빛나는 작품. 이 조화에 문장의 연마도가 ‘깊이’를 담보하는 작품.

작품에서 삶이 뒤로 물러서고 수사가 앞서는 것은 언제부터 비롯된 병폐였을까. 현실과 동떨어진, 거의 엽기적인 소재에 대한 접근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아울러 문학이란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건만, 이른바 트렌드라는 신기루를 좇아 허둥대는 모습에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 단편 소설을 심사 중인 윤후명(왼쪽)·서영은씨.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채현선의 ‘사바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정원의 나무들을 공룡 모습으로 키우는 어머니의 설정이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나무가 공룡으로 살아 뛰어다니는 ‘사바나’에는 생동감이 있었다. 문장이 좀더 견고했으면, 하고 생각되었다.

김윤희의 ‘10시 10분 41초’는 주인공인 카레이서가 경주 코스를 이탈하여 30년 지난 미래 세계를 오간다는, 예리하고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문장은 만만찮게 세련되었고, 의식도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과학소설은 아니더라도, 30년 뒤의 세계에 설득력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새로운 눈을 가진, 매우 아까운 작품이었다.

양진채의 ‘나스카 라인’은 우체국에 근무하는 주인공의 잔잔한 일상에 외로움과 그리움을 짜 넣은 작품이었다. 차근차근 삶의 무늬를 그려나가는 솜씨도 돋보였다. 치밀함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만큼 무리도 없다고 여겨졌다. 고아로 자라며 그려온 그림을 ‘나스카’의 신비한 그림에 맞추어 승화시킨 결구는 아름다웠다. 더욱 정진하여 빛나는 작가가 되기 바란다.


[2008 신춘문예] 다양한 삶의 빛깔… 내 소설도 그와 같을 것
[단편소설 당선작] 나스카 라인 - 양진채
소설가 서영은·윤후명


 
▲ 단편소설 당선자 양진채씨.당선소감

당선 통지를 받기 전날 홍릉, 유릉에 갔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지요. 비질 자국이 선명한 정갈한 길과 울울한 나무들, 기린이나 코끼리, 해태 등의 석물들이 왕의 무덤과 함께 있었습니다. 침전 처마에서 눈 녹은 물이 듣고 있었지요. 모란공원을 찾았습니다. 역시 어떤 작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마고만한 봉분들, 잔디는 누렇게 시들어 누웠고, 눈은 얼어 푸석했습니다. 묘의 젊디젊은 주인들은 열사의 이름으로 사진 속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전태일 묘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가슴이 묵지근해져왔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 옆으로 돼지를 실은 트럭이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돼지들은 비좁은 트럭 짐칸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터널 속에서 길고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차가 밀려 터널 안에 갇히다시피 한 돼지들이 울부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돼지들은 연신 콧숨을 내쉬었고, 침을 흘렸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의 왕과 몸을 불사를 수밖에는 없었던 노동자, 죽음의 공간과 터널 속 돼지 비명과도 같은 삶이 한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제 제 소설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오정희 선생님, 이원규 선생님, 경인교대 문광영 교수님 감사합니다. 함께 기뻐해준 가족 친지, 굴포문학, 새얼 동인 여러분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황소처럼 묵묵히 가라던 그의 말씀대로 한발 한발 물러서는 일 없이 앞으로 가겠습니다.
▲1966년 인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심사평… 짜임새 있는 서술에 신뢰감 


올해의 문학평론은 예년에 비해 응모편수도 늘었을 뿐더러 문장의 순발력이나 글 구성 능력에서 안정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꽤 여러 편이었다.

그 가운데 심사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내면을 투사하는 두 개의 궤적’, ‘90년대 〈은둔〉과 새로운 세기의 〈유목〉’, ‘인생이라는 이름의 퀴즈쇼’, ‘애도의 기술, 악취의 미학’,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 등이었다.

 
▲ 문학평론 심사를 맡은 평론가 이남호(왼쪽)씨와 박혜경씨.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앞의 두 글은 생태적 상상력과 동아시아적 담론이라는 큰 틀을 작품분석에 적용하려는 의욕적인 시도가 결과적으로 작품에 대한 접근의 유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이유로 먼저 제외되고, 남은 세 작품들 사이에서 심사자들은 한동안 고민했다.

먼저 ‘인생이라는…’은 김영하의 ‘퀴즈쇼’에 대한 다각적이고 정밀한 비판적 논의로 주목을 끌었으나 논지 전개 과정에서 김영하 소설의 부분적인 특성을 그의 문학의 전체적인 특성으로 일반화시키는 무리한 서술들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애도의…’는 편혜영 소설의 새롭고 이질적인 특성들을 작품의 미학적 전략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규명해내고 있지만, 이러한 논의가 편혜영 소설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에 비해 ‘환상이…’는 한강의 소설이 지닌 미학적 특성들에 대한 논의를 단순한 식물성의 미학이 아닌, 식물성과 동물성이 길항하는 보다 역동적인 풍경 속에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차분한 문장과 짜임새 있는 서술 또한 글에 대한 신뢰감을 더했다. 당선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많은 활동을 기대한다.


모과처럼 짙은 글 쓰려고 합니다
[2008 신춘문예]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
강지희
문학평론가 이남호·박혜경
 
 
▲ 강지희씨◆당선소감

당선 소식을 전해들은 건 타지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새벽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축하 소리 속에서 이게 또 꿈은 아닌가 싶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되돌아 보니, 신촌을 가득 메운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변해가던 지난 계절 동안 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일종의 존재 증명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곁에서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인생의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비밀들, 존재의 쓸쓸함과 두려움, 세상의 허위까지 조근조근 알려주었던 것은 문학이었습니다.

이런 문학을 놓지 않고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꿈이 부끄럽지만 지금 저를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혼자 온 길이 아니기에 너무나 감사해야 할 분들이 많습니다.

우선, 아직 채워나가야 할 것이 더 많은 글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아주시고 커다란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정으로 이끌어주신 국문과 교수님들께는 빚진 마음뿐입니다.

문학을 기반 삼아 4년동안 동고동락한 은정, 예린, 정은, 그리고 글지이 선·후배님들, 평생 볼 따뜻한 사람들이 모인 카리스, 좋은 글을 쓰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은 효정 언니, 경연 언니, 상훈 오빠, 힘이 되는 친구들 혜진, 영준, 세희, 유선, 유진, 저의 부족함을 껴안아주는 승연, 그리고 미처 여기서 말하지 못해 따로 인사를 전해야 할 분들까지 모두 제 곁에 있어줘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평생 문학을 하고 싶다는 고집 센 딸을 밀어주시고 지지해 주신 어머니 아버지, 이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기에 이 모든 기쁨을 부모님께 돌리고 싶습니다.

이제야 출발점에 섰습니다. 절대 오만해지거나 쉽게 글을 쓰지 않고, 떨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고 향기를 남기는 모과처럼 깊고 짙은 글을 써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86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4년 재학중



 

중앙 분리봉-신호등 넘어지고 삐뚤어지고…

2008.01.02 00:13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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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전북신문


▲ 전주시 평화동 장승로 중앙 분리봉이 넘어진채 방치되고 있다.  
 

전주 도심도로 중앙 분리봉이 쓰러진 채 방치되거나 신호등이 비뚤어지게 설치돼 운전자와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전주시 평화동 장승로에 설치돼 있는 중앙 분리봉은 쓰러진 채 방치돼 있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 어은터널 사거리의 한 보행 신호등은 비스듬하게 설치돼 원래 이 신호등을 보고 건너야 할 횡단보도에서는 절반만 보이고 다른편 횡단보도에서도 이 신호등이 보여 보행자가 착각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하모씨(30·전주시 중화산동)는 “파란 불인 줄 알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차가 지나가 깜짝놀랐다”면서 “알고보니 내가 건너려던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아니고 다른편에 있는 횡단보도의 파란 신호등이 이쪽에서도 보여 착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 새전북신문

 

진안 동향 외유마을 김준영-성영 형제의 희망찾기

2008.01.02 00:09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세상에 단 둘뿐…그래도 포기하지 않아요" 
진안 동향 외유마을 김준영-성영 형제의 희망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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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전북신문


▲ 폭설이 3일째 지속된 31일 진안군 동향면 신동리 외유마을에서 김준형(뒤)-성형 형제가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며 즐거워하고 있다.  
 

“힘들어도 이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생활할래요.”


31일 진안군 동향면 신송리 외유마을에서 만난 김준영(17)·성영(15) 형제. 슬레이트 지붕 위로 하얀 눈을 한아름 이고 있는 김 군의 집은 마을 뒷산 언저리에 자리해 있었다. 마루 끝으로는 알루미늄 새시가 치마처럼 둘러져 있었지만 창호지를 바른 문 틈으로 황소바람이 안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늦잠을 청한 형 준영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극적이며 시야를 어디에 둘지 몰라 난감해한다. 동생 성영이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라처럼 머리만 쑥 내민 채 밥상 위에 얹어놓은 컴퓨터 게임에 몰두해 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어엿한 고교생이 될 터이지만 아직까지는 중학생으로 남고 싶은 모양이다.


준영이 형제는 외진 산골마을에서 단 둘이 낡은 집을 지키며 생활하는 소년소녀가장이다. 자신들의 생활이 왜 이렇게 됐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부산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에 의지해 생활해왔고, 준영이가 초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둘 무렵 빚쟁이들이 집으로 몰려와 난장판이 벌어졌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외삼촌 식구들을 따라 멀리 이곳까지 찾아 의지해왔지만, 이젠 이들마저도 곁에 없다. 피붙이같이 지내온 외숙모는 5년 전 여름 뜻하지 않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지난해에는 외삼촌마저 짐을 챙겨 떠나셨기 때문이다.


“추수조차 마치지 않은 몇 필지의 전답을 모두 처분한 뒤 부랴부랴 부산으로 향한 것을 보면 꽤 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요….”


준영이 형제는 자신들의 이러한 생활을 탓하거나 가족을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정부가 매달 지원하는 보조금으로 쌀과 부식을 마련하고, 학교를 오가는 버스비와 공과금 등을 충당하지만 부족할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다. 요즘 같은 방학 때면 여성자활센터 등 후견기관에서 지원하는 라면과 밑반찬이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힘든 것은 없어요. 현실에 만족할 뿐이어요. 과거에 집착한다고 해서 다시 올 것은 아니잖아요?”


가족이 그리울 때면 뒷산에 올라 고함친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실 모를 부모님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땐 눈을 감고 억지 참을 청한다. 이러던 사이 어느덧 이 두 형제는 의젓한 청소년이 됐다.


이들 형제는 우애 좋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나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곳곳이 빈집이어서 몇 세대 안돼 보이는 곳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철마다 배추·상추나 호박, 감자 등을 나눠준다. 물론 삼촌에게서 배운 농삿일로 농번기 때면 마을 일손을 썩 잘 거들었던 대가인 셈이기도 하다.


며칠 먹을 밥을 번갈아가며 지어야 하고, 늦잠을 자 지각이라도 할라치면 다투기 십상이지만 서로 의지하며 굳건히 생활하고 있다.


준영이는 3학년 2학기를 남겨둔 채 돌연 학교를 그만둔 것을 가장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 버스 시간이 맞질 않아 먼 길을 홀로 걷다 보면 지각하기 일쑤여서 포기한 일이지만, 내년엔 아르바이트 일자리라도 찾아 반드시 검정고시로 승부수를 띄울 각오다.


성영이는 새해에 형의 뒤를 따라 진안공고 전자과에 입학한다. 사극을 좋아해 국사교사가 되고 싶었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멋진 경찰관도 되고 싶었지만 취직을 염두해 진로를 변경한 것이다. 형은 동생이 자신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뒷바라지할 계획이다.


이들 형제는 “둘만 생활하는 게 친구들에게 조금 신경 쓰이지만 새해에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당찬 생활을 꾸려갈 것”이라며 “지금은 힘들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참고 이겨내 주위의 관심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새해 포부를 밝혔다. @ 새전북신문 
 

남원 실상사 도법스님에게 전북을 묻다

2008.01.02 00:06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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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전북신문


▲ 남원 실상사 도법스님.  
 

스님 도법 하면 '생명평화결사', '탁발순례', '마을 공동체' '등이 먼저 생각난다. 1일 남원 실상사에서 그를 만나 처음 한 시간은 고상하게 그런 것만 물었다. 찬찬히, 또박또박 설명하던 그가 갑자기 먼저 말을 돌렸다.


"그런 것 들으러 눈 속에서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고…"


- 맞습니다. 제주도 출신인 스님은 스스로를 전북 사람으로 생각하진 않으시지요?


"아니지. 나는 전북사람이요. 내가 열여섯 살 때부터 여기서 중 노릇하고 컸는데."


- 그렇다면 전북인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전북의 단점이 뭡니까?


"전북이 메가리가 좀 없지. 게으릅니다. 농경사회에서 너무 좋은 조건에 살다보니 딴 지역보다 남 핑계 대는 게 많아요. 소풍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전북의 초등학생들은 봄가을로 남고산성에 소풍갑니다. 그러나 가서 뭘 봅니까. 부스러진 돌담, 패배한 역사, 실패한 현장만 보지요.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그 어린이들이 커서 중, 고 때 타 지역에 수학여행 가면 어떻습니까. 문경새재만 가도 잘 복원된 성터를 보고 득의한 역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에서부터 열등, 피해의식을 확인하며 성장한 인격이 어찌될까요. 문제는 남고산성으로 상징되는 문제를 꼭 전북 출신 대통령이 나와야 해결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질적, 주체적, 자립적으로 남 핑계 대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패배주의에 찌들었다, 정치논리 '한 방'으로 풀려고 한다, 이것이 전북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 전북 출신 대통령 후보가 참패했습니다. 도내에선 80%나 얻었는데요…


"전북만 똘똘 뭉쳐 될 일이 아니지요. 외연을 넓혀 전국이, 세계가 전북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시민사회가 전북을 이해하도록 해야지요. 그것이 진짜 승리입니다."


'생명평화결사'로 요약되는 종교인 도법의 사회 실천을 남들은 이상적, 추상적이라고 평한다. 특히 쟁점지향적인 운동권, 시민단체가 그를 그렇게 본다. 그러나 네 시간 동안 인터뷰한 도법은 현실주의자였다. 일을 잘 추스리고 문제를 직시하고 해법을 내놨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생명평화도 전북의 경쟁력과 관련된다.


"현대의 가치는 경제성, 효율성이지요. 그러나 전라북도는 농도입니다. 농지, 농업, 농촌이 경쟁력입니다. 가치로 보면 경제성 이전의 선행가치입니다. 우주적 가치인 생명과 인간사회의 가치인 평화가 전북의 자산입니다. 21세기 시대정신이 생태, 생명평화에 있다 할 때 전국의 양심과 지성이 그런 점에서 전북을 주목하면 전북은 성공입니다. 한국의 잘난 이들이 모이는 서울을 떠나 어디에서 살고 싶다 할 때 그들이 전북을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 그는 이미 10년 전 실상사 주지 재직시 절 땅 10만평을 내어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남원시 산내면은 절집이 중심이 된 국내 유일, 최대의 공동체이다. 유기농 생산과 판매를 하는 '한 생명', 전국의 지원자가 몰려 경쟁하는 어린이 대안학교 '작은 학교', 귀농전문학교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를 아우르는 메타조직이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이다. 인드라는 불가의 하늘을 주관하는 제석천(제석천), 망은 그물이다.


"세상 우주는 그물처럼 이뤄졌습니다. 제석천의 그물, 하늘나라의 그물이 제가 지향하는 인드라 망입니다. 그물코처럼 상호의존하는 우주법칙에 따라 살자는 것입니다. 얻어 먹으며 돌아다니는 탁발 순례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안 얻어먹으면 살 수 없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별, 달, 구름, 산, 물, 숲으로부터 얻어먹습니다. 그런데 얻어 먹기만 하니까 문제입니다. 끝없이 주고 받아야하는데 얻어먹고, 뺏아먹고 안줍니다. 우주는 먹고 먹히는 것입니다."


-스님은 누구에게 먹히십니까.


"적어도 이 순간 신문사가 나를 먹고, 독자는 내 기사를 통해 신문사를 먹고, 나는 사부대중 독자와 대화하며 가르치며 그들을 먹습니다. 끊임없이 먹고 먹히는 것, 이것이 연기(연기)입니다. 그 밖에 진리는 없습니다. 간디 말씀 대로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입니다. 진리를 둘러 싼 연기입니다."


-새해 덕담 한 말씀 부탁합니다.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중요합니다. 편나누기가 몸에 배 제2의 천성이 됐습니다. 갈등 하는 것이 업(업), 습(습)이 됐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대동소이입니다. 한나라당, 통합신당도 대동소이입니다. 공통점을 살리고 키워나갔으면 합니다. 차이점을 어찌 조화롭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희망은 진실에 있고, 진실은 대동소이입니다."


설백 사백 천지백(설백 사백 천지백). 도법과 만난 4기간 동안 쏟아진 눈으로 절과 하늘 땅이 온통 하얗게 됐다. 실상사가 위치한 남원-함양 국도 변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진주 남강으로 흐르는 큰 내가 있고 그것을 잇는 다리가 해탈교다. 고작 20m 짜리 다리 하나를 건너 나는 그날 트럭이 달리는 허상 세계와 도, 법이 있는 실상 세계를 왕래했다. 도법의 동안거처인 실상사 화림원 창밖에선 눈바람이 춤을 췄다. @ 새전북신문


<도법스님은>


속명 홍길진, 1949년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출생.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상임대표, 생명평화탁발순례단 단장(2004)


남원 실상사 주지(1995)


출가(1965)


<도법의 농담>


"여긴 할 일 많고 게으른 사람만 오는 곳이요"(안거 수행처인 화림원에 들어서면서)


"나는 요새 유랑잡승이요. 안거보다 순례가 수행이 됐으니"('동안거 잘 하시냐'는 질문에)


"술꾼들 술 생각 나겠네"(인터뷰 도중 눈발이 심해지자)


"신문사 잘 돌아갑니까?"(전북 언론 현실에 대한 뜨끔한 질문)

 

전북도내 새해 첫둥이 박주현 아가

2008.01.01 23:58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도내 첫둥이라 기쁨도 두배" 
박태선-이채현 부부, 11시간 진통끝에 0시6분 아들 주현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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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전북신문


▲ 1일 새벽 도내에서 첫 아이를 출산한 박태선. 이채현씨 부부가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엄마가 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2008년 1월 1일 0시 6분. 전주 푸른산부인과에서 새해 새 생명의 첫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공은 박태선(36)·이채현(여·32)씨 부부의 첫 아이인 박주영군.


박씨 부부는 이미 4년 전에 결혼을 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기다림은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 아빠가 된 박씨는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생기지 않아 저희는 물론이고 주변 어른들께서 걱정을 많이 했다”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아이라서 기쁨이 두 배로 느껴진다”며 활짝 웃었다.


이씨는 지난달 31일 낮 1시께부터 산기를 느낀 후 11시간의 진통끝에 새해가 밝은 이날 0시 6분께 자연분만으로 3.18kg의 건강한 남아를 안았다. 사실 주영이는 엄마 뱃속에 들어온 것도 늦었지만 나오는 것도 늦었다. 원래 예정일은 12월 26일.


엄마 이씨는 “4년 만에 생긴 아이가 나올 때도 늦어서 기다림이 더욱 컸다”며 “첫 아이는 조금 늦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빨리 보고 싶은 마음 꾹 참고 기다렸는데 도내에서 첫 번째 새 생명이라니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미 임신 4개월째부터 아이의 이름을 지어놨다. 온 가족이 동원돼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 이름을 각각 3개씩 지어놨던 것. 그만큼 간절했다. 주영이란 이름은 친할아버지가 지은 것이고 아버지인 태선씨가 최종 선택했다.


친할아버지 박수창(74)씨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 “아들 며느리가 새해 첫 날 너무도 소중한 선물을 안겨줘 춤이라도 추고 싶다”면서 “새아기가 몸조리 잘해서 얼른 일어나고 손자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다”며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새벽에 셋째 딸이 출산하는 것을 보고 집에 갔다가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다시 병원을 찾은 외할머니 최경재씨(53)는 “새벽에 걸어서 집에 갔는데 너무 좋아서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며 “이날 날씨가 올 겨울 들어 제일 추웠다는데 걸어가는 동안 추위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연신 싱긍벙글 했다.


태몽을 꾼 외할아버지 이선희(60)씨는 “큰 구렁이가 갑자기 나타나 내 몸을 휘감더니 이내 하늘로 올라갔다”면서 “구렁이는 지혜와 재능을 상징하는 만큼 우리 주영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손자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이들 부부는 이제 막 눈을 뜬 주영이를 내려다보며 “부모로서 지금의 마음을 잊지 않고 고이 간직하겠다”면서 “주영이가 건강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며 행복한 미소를 띄웠다. @ 새전북신문
 

군산 삼남매 7년째 '사랑의 거리콘서트'

2008.01.01 23:51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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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전북신문

▲ 이번 거리공연은 김태인(왼쪽)군이 군 복무중이라 무산될수 있었지만 부대에서 휴가기간을 조정해 주어 공연을 펼칠수 있었다.  
 

“저희들 노래 듣고 함께 즐거워하는 분들을 보면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습니다.”


군산시 나운동에 사는 김태인(22·캠프 스탠리 상병), 설혜(20·숙명여대 2년), 태림(18·전북외고 3년) 군 삼남매는 1일 군산열린교회 조규춘 목사에게 모금함을 전달했다.

그 모금함 속에는 92만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이 돈은 이들 3남매가 지난달 29일 밤 8시부터 4시간여동안 나운동 차병원 앞 거리에서 ‘사랑의 도시락 콘서트’를 해서 모금한 돈이다.


7년째 거리콘서트를 하고 있는 이들 삼남매는 음악을 전공하거나 제대로 배워 보지도 않은 순수 아마추어.


산북중학교 당시 현악부에서 틈틈히 익힌 바이올린과 색스폰, 비올라, 그리고 평소 즐겨부르던 오까리나, 대금, 소금, 단소, 기타 등의 연주실력이 전부다.


이들은 지난 2001년 알콜중독자의 가정 등에게 365일 하루를 거르지 않고 따뜻한 도시락을 나르고 있는 열린교회 조규춘 목사의 소식을 듣고 함께 도움을 주기 위해 일명 ‘사랑의 도시락 콘서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매년 열리고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인 김수관(54) 군산대 교수가 10년전인 1997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 살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은 물론 평소에도 보통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나와 연주하며 성금을 모으던 것이 큰 아이디어가 됐다.


처음 거리공연을 가질 당시만해도 이들 삼남매의 나이가 어린탓에 지나는 행인들 중에는 ‘앵벌이’라는 생각에 혼내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주위 상인들이 ‘올해는 누구의 상가 앞에서 언제 하냐’며 자기들의 가게 앞을 다퉈 내놓는가 하면, 일부 시민들은 난로와 따끈한 음료도 전해주고 있다.


이번 거리공연은 카츄사로 근무하고 있는 태인군 때문에 자칫 열지 못할뻔 했다.


군 복무 중이여서 쉽게 공연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속사정을 전해들은 부대에서 태인군에게 휴가기간을 조정해 4박5일의 휴가를 내주었다.


휴가를 받은 태인군은 동생들과 27일 내려와 겨우 화음을 맞춰 공연을 가졌다.


태인군은 “부대의 배려로 이번 공연도 무사히 마치게 됐다”며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올 연말에도 동생들과 함께 공연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설혜양도 “이런 활동을 통해 남에게 하나를 주면 그 이상의 행복을 느낀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다”며 “남을 돕는 일이 우리사회를 밝게 하고 서로에게 삶의 의미를 심어주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말했다.


거리상인협회장 오세열씨(오서방 갈비)는 “매년 이 학생들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이 거리를 훈훈하게 만들어 주고 있고 그저 먹고 마시는 거리가 아닌 사랑이 피는 거리를 만들어주고 있어 고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새전북신문 


오마이도그 블로그에 오신 분들 고맙습니다!!

2007.12.15 22:51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안녕하세요? 오마이도그 블로그입니다.

이 블로그를 만들고 올블로그, 블로그코리아, 블로그링크만 연결해놓고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았음에도 30일 동안 조회수 1만건을 돌파하고 블로그 만든지 36일째인 오늘 밤 9시 40분쯤 하루 방문자수 1000건을 넘었습니다.

30일간 조회수 1만건이 아니라 하루 방문자 1만건이 넘는 블로그도 수없이 많이 있는데 한달간 조회수 1만건이 뭐 대단하다고, 하루 방문자수 1000건이 뭐 대단하다고 이런 글을 써서 자랑하나 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랑은 아니고 오마이도그 블로그는 11월 9일 처음 만들 때부터 인터넷신문 형태를 띈 블로그를 생각하고 티스토리를 선택해 앞으로도 잘 운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블로그에 오셔서 애견/애묘/동물에 관한 글을 읽고 가시는 분들이 카운터로 표현되어 보이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 오마이도그라는 이름으로 2002년부터 2년간 인터넷신문을 저 혼자 운영(OhmyDOG.wo.to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애견 관련 사이트에 다수 링크되어 있습니다.)하면서 애견/애묘/동물에 관심과 애정이 있으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이 오마이도그 안에서 모든 관련된 컨텐츠를 보시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끊임없이 하다 마침내 2007년 올해 11월 티스토리블로그로 다시 오마이도그를 시작하는 중입니다.


오마이도그는 1차적으로 컨텐츠를 제대로 갖춰놓고 2차로 애견/애묘/동물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분들과 같이 하는 장(場)을 만드는 블로그가 되고자 합니다. 오마이도그 블로그를 팀블로 운영하는 것도 이의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오마이도그는 좋은 그릇과 좋은 내용으로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도움을 드리는 블로그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오마이도그::팀블애견신문 OhmyDOG.ba.ro(ohmydog.tistory.com)

여러분은 개토레이세요? 반토레이신가요?

2007.12.14 02:14 | Posted by 오마이도그 오마이도그

술자리에서 매형이 "개토레이와는 과감히 끊는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개토레이가 뭔 말인가 했더니 운동하고 먹는 음료수 게토레이 있잖아요....

그 게토레이이라는 말을 개토레이(개가 강조된...)로 바꿔서
비상식적이고 자기만 알고 사회생활할 때도 띵까띵까 놀다가
윗사람이 오면 열심히 하는 척 하는 꼴불견 등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다르고 행동거지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좋지 않다고 할까?...
그런 사람들을 통칭해서 개토레이라고 말하더군요..


반토레이도 있어요...개토레이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긴가민가형 부류를 통칭하는 말로 쓰더군요...


우리 모두 개토레이나 반토레이가 되지 말고 상식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보자구여...ㅋㅋ


개토레이-반토레이란 말이 듣고도 웃겨서 함 써봤습니다.ㅋㅋ^^ 


* 이 글의 제목으로 쓴 오러브팝업, 하루 방문자 1만명 블로그에 매달 45만원이 생긴다는 팝캐시의 방문자 대비 수익률을 계산해주신 카누키님의 기준에 의해 2원을 적립해주는 오러브팝업을 단순계산해 나온 하루 만명 방문자 기준 팝업노출 한달 수익입니다.

* 내용 쓴 후 팝캐시와 오러브팝업을 헤집고 다니며 알아보니 오러브팝업은 성인광고가 있더군요. 그래서 2원인 듯 싶은데 질문게시판을 보니 팝캐시가 더 믿음직스럽더군요.  

아래 내용은 팝캐시와 오러브팝업이 돈 안주고 튀지 않는, 발생한 수익금을 착실하고 어김없이 주는 팝업노출수익모델일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쓰는 것이므로 이 내용을 보시고 팝캐시나 오러브팝업을 달았다가 나중에 돈 떼먹고 토낀 예스팝업꼴이 나더라도 저는 아무 책임이 없음을 밝힙니다.^^(저도 제 블로그에 팝캐시를 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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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블로거뉴스의 IT카테고리에서 눈에 확 띄는 글을 보게 됐다.

비퍼플님의 오감필터링블로그에 올려진 새로운 블로그 수익모델 팝캐시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기존의 다음 애드클릭스, 구글 애드센스 등이 CPC(클릭당 수수료 지급 방식)인데 비해 팝캐시는 한 개 ip가 하루동안 몇번 팝업이 노출되든 상관없이 한번만 노출된 것으로 계산해 1원을 적립해주는 노출당 수수료 지급방식을 취하고 있다.
   
블로거들 사이에서 애드센스로 대표되는 CPC는 물론이고 아이라이크클릭, 링크프라이스같은 제휴프로그램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PA(무료회원가입당 수수료 지급방식)나 CPS(유료회원 가입당 수수료 지급 방식), CPS(상품판매당 수수료 지급 방식)는 많이 봐왔지만 팝캐시처럼 노출당 지급방식은 내 경우 어제 비퍼플님 블로그글을 보고 처음 알게 됐다.

팝캐시는 1ip당 하루동안 한번 노출로 계산해 1원을 적립해주는데 띄워지는 팝업창의 크기는 450*350크기이며 사이트접속후 팝업창을 보고 없애더라도 사이트내에서 페이지를 이동할 때마다 새 팝업이 뜬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팝업창 없애지 않고 그대로 페이지 이동하면 새로 안나오고 또 팝업차단을 해놓은 방문자는 보지는 않겠지만 이래서 팝업차단으로 인해 팝업이 안띄워지면 조회수가 많아도 노출수익 1원 적립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퍼플님의 해당 글의 댓글을 보니 돈 안주고 튀었다는 예스팝업이라는 곳에 데인 분들이 팝캐시도 그러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인 우려가 많았다. 그래서 예스팝업이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검색을 통해 예스팝업에 대한 성토의 글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조용하더라.

비퍼플님 블로그의 댓글을 보면 예스팝업때문에 돈도 못받고 이미지만 버리고 낚인 분들이 많을 법도 한데 어이없어서 그런지 욕의 ㅇ자도 보이질 않는다.

헌데 11월 21일에 예스팝업에 대한 글을 올리신 썬도그님이 계셔서 댓글로 예스팝업 없어졌다고 달아봤다. 11월 21일 당시에는 예스팝업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예스팝업주소가 네이버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예스팝업이라는 낱말로 검색을 하던중 구글검색을 통해 일보전진님의 웹블로거에서 또다른 팝업노출 수익모델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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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브팝업

오러브팝업이라는 곳이다. 팝업창을 노출하면 하루 한 ip당 2원을 지급해주는 곳이다. 오러브팝업의 질문답글란을 보니 7원을 주는 곳도 있다는 댓글을 봤는데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팝캐시는 만원 이상 됐을 때 수익입금신청하면 시기없이 등록한 계좌로 입금해주는데 오러브팝업은 매주 월요일에 일괄 입금해주고 있다. 이곳은 공지를 보니 몇달전만 해도 5천원 이상이었는데 지금은 만원 이상이어야 입금신청할 수 있는 듯 싶다. 두곳 다 회원에 대한 수수료 등 부담없이 입금신청한 돈을 다 주는데 오러브팝업의 경우 농협 외의 통장입금시 500원의 수수료를 뗀다고 가입안내에 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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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캐시의 마이페이지 수익금확인 화면 @ 오마이도그




카누키님의 인드라마블로그에 11월 28일 올려진 새로운 블로그 광고 모델. 벌이는?이라는 글을 보면  

일단 유입 방문수는 26일 하루동안 620~670 사이로 나타난다.
이는 중복방문자도 포함된것이라, 각각의 사이트에서 절대고유방문자만 조사하니 약 600여명. 이를 기준으로 벌어들인 돈(?)에 대해서 평한다.


26일 하루 수익 465원. 방문객 600명.
어찌보면 상당한 수익일 것 같다.


예전에 다음의 블로그뉴스 노출로 2일간 약10만명의 절대고유방문자의 유입이 있었다. 이에 대해 계산을 한다면, 약 465*100000/600 = 77500원 이 나온다. 단순 계산이지만...(재접속자를 제외한 카운트가 10만이었다. 재접속을 포함하면 엄청난 방문수가 나왔다.)


일일에 2000여명 접속을 하는 블로그일 경우, 이 팝업으로는 1200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벌 수가 있다.


팝캐시로 하루 방문자 6백명일 때 465원이라면 60-70%가 팝업을 노출시켰다는 것이고(물론 홈페이지나 블로그 방문자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이 계산은 카누키님의 블로그를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루 만명의 방문자가 오는 블로그의 경우 매일 6-7천원 정도의 노출수익이 나온다는 것이다. 달마다 18-21만원의 수익이 생긴다. 이는 클릭을 해야만 수익이 발생하는 구글 애드센스에서 매일 7달러 수익이 나오는 것과 같은 금액인데 애드센스는 팝업노출수익처럼 이만큼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그리고 입금시기도 애드센스는 근 한달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데 팝캐시와 오러브팝업은 비록 만원 이상일 때만이지만 입금신청하면 돈을 바로바로 준다는 점이 좋다.  

당연히 팝업노출수익이 애드센스보다 월등한 수익을 준다는 계산이 나온다.

왠만한 파워블로그는 하루 평균 방문자수가 2-3만명이고 못해도 만명은 넘으니 만약 파워블로그에 이 팝업창을 띄울 경우 1-3만명 기준 매일 최소 6천원(방문자 대비 60% 노출 기준) 최대 2만1000원(방문자 대비 70% 노출 기준)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달로 치면 최소 18만원 최대 63만원이다.

내 블로그의 경우 하루 평균 방문자수가 5백명이니 카누키님이 계산하신 기준대로 하면 매일 최소 300원 최대 350원이 나온다. 500명 가지고는 적은 금액이지만 팝업노출은 하루 방문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노출수익 1원을 적립해주는 팝캐시로 계산해본 것이지만 2원을 주는 오러브팝업을 생각해본다면 하루 방문자 3만명의 블로그의 경우 매달 120만원의 수익이 생기는 셈이다. 게다가 팝캐시와 오러브팝업을 같이 달게 된다면?(같이 달 수 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블로그에 좋은 글을 만들어본다. 그러나 이 좋은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묻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읽어주는 사람을 모셔오기 위해 다음블로거뉴스와 각 메타블로그에 연결해놓는다. 이런 과정에 많은 방문자가 모이면 광고수익을 생각하게 되고 이 수익이 안정적으로 되는 날 전업블로거가 많이 탄생될 것이다.

전업블로거로 가는 길에 팝캐시, 오러브팝업 같은 팝업노출수익모델이 많이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오마이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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